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63화 (263/301)

263화

* * *

순례자들의 전쟁이 끝나고 나서, 얼마 후.

신성 제국의 삼일천하가 끝나고 다시금 승리를 손에 넣은 것은 여느 때처럼 그림자 군주의 몫이었다. 일찍이 제3제국이 그러했고, 신성 제국이 그러했으며, 그 외에 헤아릴 수 없는 적들이 결국 칠흑공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여전히 그림자 군주는 왕들의 감시자를 자청했고, 이제는 대륙의 누구도 감히 데일을 거스르지 못했다.

저항할 수 없는 힘과 공포. 일찍이 ‘검은 공자’가 그러했고, 칠흑공의 이름을 가진 뒤에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작센 대공국. 지상 유일의 제국도, 유일의 군주도 아니다. 그러나 그림자 군주의 존재는 그 어느 제국의 황제와도 비교할 바 없는 무게를 갖고 있었다.

많은 것들이 질서를 되찾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몇몇 것들은 그렇지 못했다.

작센 대공성의 일실.

칠흑공의 아내로서, 샬롯이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손에는 백색의 포도주가 들려 있었다.

“……네가 나를 지키지 못할 전장 같은 것은 없어.”

백포도주를 홀짝이며, 샬롯이 체념하듯 웃었다. 그날, 데일이 진실을 고하고 나서 말해준 이야기를 떠올리며.

“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너는 늘 승리하는 쪽이었지.”

“글쎄.”

데일이 씁쓸하게 웃었다. 샬롯은 웃지 않았다.

“이 세상은 이미 너의 제국이 되었어. 그리고 너는 그 제국의 황제가 됐지.”

“…….”

“나는 그저 황제의 총애를 받는 공주님이고.”

“그렇지 않아.”

“아니야.”

데일이 고개를 저었다. 샬롯 역시 고개를 저었다.

“너를 위해 휘둘러지는 검이라고 믿었어. 그러나 그날, 뒷골목에서 도적들에게 노려졌을 때 이후로 이후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았어. 나는 처음부터 네가 쳐놓은 울타리 속에서 보호받고 있었고, 내가 해온 것은 네가 보기에 그저 치기 어린 소꿉놀이에 불과했겠지.”

“샬롯…….”

“기사 놀이를 하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공주님. 그게 나였어.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겠지.”

데일이 말을 이을 틈도 없이, 샬롯이 자조했다.

“그래도 네가 좋아.”

“…….”

“아무리 너를 미워하고 싶어도 미워할 수 없어. 그래서, 이대로 새장 속의 공주님으로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가끔 주군을 지켜주는 기사 놀이도 하고 말이야.”

“많이 취했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네가 춤추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되는 거야. 무척 행복하겠지.”

샬롯이 즐거운 듯 키득거렸다. 데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네가 나에게 그렇게 해왔듯이 말이야. 그래,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렇지?”

그렇게 말하며 샬롯이 다시금 포도주를 들이켰다. 희미하게 금빛을 머금고 있는 백포도주였다.

“좋아해, 데일.”

샬롯이 말했다. 그대로 입술이 겹쳐졌고, 포도주의 향기가 흘러들었다. 무척이나 달았다.

* * *

취해서 잠들어 있는 샬롯을 뒤로하고, 데일은 작센 공작성의 중정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밤하늘이 무척이나 어두웠다. 이따금 희미하게 깜박거리는 별빛들이 보였다.

데일이 고개를 내렸다.

쏟아지는 달빛에, 발밑에 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림자가 무척이나 검고 어두웠다.

─ 오빠.

바로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슈브가 그곳에 있었다.

─ 인간이란 참으로 사랑스러운 존재들이야.

산양의 뿔을 가진 소녀가, 즐거운 듯 미소 지었다. 칠흑의 드레스 자락 밑으로 꿈틀거리는 촉수들이 엿보였다.

─ 나는 인간들이 좋아. 그러니까 이 대지에 인간들의 세상이 사라지는 걸 바라지 않아.

슈브가 말했다. 무척이나 의미심장한 목소리였다.

─ 그리고 지금부터 내가 할 말이, 진실과 그림자의 군주에게 알려줄 마지막 진실이야.

“마지막 진실……?”

또다시 그 말이다.

─ 있잖아, 처음부터 이 대지는 인간들의 것이 아니었어.

“그게 무슨 말이지?”

─ 그리고 이 별의 진짜 지배자들이 곧 잠에서 깨어날 거야.

“그들이 누구지?”

─ 오빠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존재들.

슈브가 즐거운 듯이 말했다.

일순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무의식중의 깊은 곳에서는, 어렴풋이 그 의미를 이해할 것 같았다.

─ 그들이 잠에서 깨어나, 이 행성의 정복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움직일 거야. 그들에게는 침략자를 물리치고 자신들의 별을 되찾기 위한 정당한 싸움이겠지.

“……우리가 침략자라고?”

─ 그들이 잠들어 있는 틈을 타 이 행성을 점령했으니까. 그들이 깨어나고 나서도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으니까. 그걸 침략자가 아니고서 뭐라고 불러야 할까?

슈브가 키득거렸다.

─ 처음부터 그들의 투쟁은 정당했어. 그리고 지금도 달라질 것은 없겠지.

슈브가 지칭하고 있는 그들, 그리고 그들이 잠에서 깨어날 거란 말. 그 의미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괴수들의 존재는 옛 세계의 멸망과 함께 사라진 게 아니었나?”

─ 모두가 사라지지는 않았어. 세상의 가장 깊은 곳에서 잠들어 있을 따름이지.

슈브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그들이, 그리고 그들의 왕이 일어날 거야.

애써 고개를 돌린 과거의 악몽이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데일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과거의 싸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인간들의 왕이자 정복자들의 군주로서, 괴수들의 왕과 맞서 결정을 내릴 때야.

“무슨 결정을 말이지?”

─ 그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대지를 돌려줄지, 정복자로서 이 땅의 지배자들과 맞설지.

“……처음부터 세계를 구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었나.”

슈브의 말을 듣고, 뜻밖의 진실 앞에서 데일이 웃었다.

─ 세계를 구하기 위해 싸우는 것은 처음부터 그들 쪽이었으니까.

“그럼 어째서 너는 인간들의 쪽에 서 있는 거지?”

─ 음, 그야 인간들이 더 재미있으니까.

슈브가 차갑게 웃었다. 일순 그녀의 표정에서, 헤아릴 수 없는 무저갱을 엿보는 것 같은 섬뜩함이 엄습했다.

─ 생존에는 옳고 그름이 없어. 굶주린 메뚜기 떼에게도 악의는 없지. 그저 이 별의 인간들은 처음부터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였고, 진실의 군주에게는 진실을 알 의무가 있었어. 그래서 말해준 거고, 그게 다야.

“……”

여느 때처럼 잔혹하기 그지없는 진실이, 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왔다.

그 말을 듣고 데일이 침묵을 지켰다.

어느 날 갑자기, 게이트가 열리고 이계의 침략자가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슈브가 말해준 진실. 침략자는 그들이 아니라 인간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잠에서 깨어날 때, 그림자 군주는 인간들의 왕으로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처음부터 이 전부가 하나의 세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계(異界) 같은 것은 없었다.

“답을 찾기 위해서는 어디로 가야 하지?”

깨닫고 나서 데일이 되물었다.

─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곳.

슈브가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인간들의 왕은 주저하지 않았다.

최후의 여정을 떠날 때였다. 그리고 그것은 오롯이 그 홀로 치러야 할 사명이었다.

* * *

그날 이후, 아무 말도 없이 그림자 군주는 모습을 감추었다.

얼마 후 익사공 바르바로사가 다스리는 사해 군도로 배 하나가 들어왔고, 남자는 그곳에 섞여 있었다.

비로소 그가 가진 능력의 정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사방이 거친 암초로 가득하고, 소금 냄새가 코를 찔렀다. 멀리서 갈매기들이 끼룩거리고 있었다.

동시에 군도(群島) 전체에 드리워져 있는 음습하기 그지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세상의 끝.

그림자 군주는 비로소 여정의 종착점에 이르렀고, 마지막 진실과 조우할 때였다.

* * *

쏟아지는 햇살이 무척이나 창창했다.

“음,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기품 있는 숙녀가 입을 열었고, 어린아이들이 앞다투어 입을 열었다.

“인간들의 왕이, 세상의 끝에서 ‘괴수들의 왕’을 보러 가는 데까지요!”

“음, 그랬었지.”

하나같이 심장에 희미하게 마나 서클의 조각을 새겨넣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마법에 재능이 있고, 그 재능을 결코 파괴에 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귀족 가의 아이들이 청색 마탑에 적을 두는 것은 드물지 않다.

그리고 어린 마법사들을 향해 청색 마탑주 ‘리제’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심장에 새겨진 여덟 개의 서클이 움찔거리는 것을 느끼며.

거짓과 모략의 마탑, 청색 마탑의 실체를 아는 자들은 많지 않다.

아울러 청색의 흑막으로 거듭나 있는 리제에게, 순진하며 철없는 소녀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도 많지 않다.

그녀가 오라버니와 함께 첫 여정에 올랐을 때, 그녀의 오라버니가 보여준 모습을 떠올렸다. 당시의 그녀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잔혹하고 압도적이기 그지없는 모습.

‘나는 훗날 네가 힘을 가진 자가 되었을 때,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할지 생각하길 바라.’

그 말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지금의 리제에게는 힘이 있었다. 8서클의 청마법사로서, 일찍이 그녀의 오라버니가 보았을 풍경을 보고 있다.

“그래, 그렇게 내 오라버니께서 사해 군도로 향하셨지.”

리제가 말을 잇는다. 모두가 그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리제의 이야기에 흥미진진하게 귀를 기울일 따름이다.

“이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 괴수들의 왕을 쓰러뜨리기 위해서 말이지.”

──이 세계를 점령하려는 괴수들의 위협에 맞서, 마지막까지 세계를 지켜준 영웅이자 용사의 무용담.

그것이 이 세계에 알려진 이야기의 형태였다.

거짓과 모략의 마탑에 군림하는 자로서, 청색의 흑막 ‘리제’는 필요에 따라 진실을 덧씌우길 주저하지 않았다.

세상 모두가 진실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특히나 그 진실이 감당하기 어렵고 잔혹할수록 더더욱.

그러나 그녀의 오라버니, 진실과 그림자의 군주는 그렇지 않았다. 그 남자는 마지막까지 자신과 세상의 진실과 마주하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가 짊어진 것들, 아마 지금의 그녀조차 상상할 수 없으리라.

“그리고 그곳 사해 군도에서, 오라버니께서는 괴수들의 왕에게 충성하는 부하와 조우했지. 그 부하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

리제가 물었고, 아이 하나가 손을 들며 소리쳤다.

“익사공 바르바로사요!”

* * *

흑요석 상자 속에 남자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당신의 심장을 가져가십시오.”

사해 군도의 왕, 익사공 앞에서 데일이 입을 열었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의 남자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그것을 돌려주는 거지?”

“우리 모두에게 있어, 이 이상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는 것이니까요.”

“그렇겠지.”

익사공이 즐거운 듯 웃었다.

“이 대지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이 별의 입장에서, 그리고 이 별의 지배자들이 보기에 우리는 그저 침략자이자 기생충에 불과하지. 우리는 악(惡)이다.”

“메뚜기 떼가 농작물을 집어삼키는 것은 악의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데일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저 그들 역시,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지요. 우리 역시 다를 것은 없습니다.”

진실을 알았고, 그러나 달라질 것은 없었다.

“인간들의 왕으로서, 저에게는 인간들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투쟁할 겁니다.”

“참으로 어리석구나.”

익사공이 조소했고, 동시에 심해의 풍경이 일대에 덧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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