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62화 (262/301)

262화

* * *

“노아……!”

세상을 집어삼키는 잿더미가 흩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종말의 재 앞에서, 이계의 용사가 그의 밤까마귀 투구를 벗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드러났고, 동시에 그의 손에 들린 검이 휘둘러졌다.

피스메이커가 금색의 빛을 내뿜으며 빛났다. 일대의 시간과 세계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째깍.

초침이 흘러도 멎은 시간이 흐르는 일은 없었다. 여전히 세상은 정지해 있었고, 시곗바늘이 덧없는 공회전을 거듭할 따름이었다.

흩뿌려지고 있는 재의 빗방울 역시 낙하 운동을 펼치는 도중 그대로 멈춰 있었다.

정지해 있는 시간 속에서 데일이 홀로 걸음을 옮겼다.

용사의 아바타를 덧씌우고 있는 육체가, 정지해 있는 빗방울 사이를 가로질렀다.

사방에서 빗발치고 있는 소멸의 비를 가로지르며, 빗방울에 스칠 때마다 육신이 재가 되어 흩날렸다.

─ ……!

이 세계를 집어삼키는 종말의 시나리오. 그 앞에서 데일은 주저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피스메이커의 힘을 통해 애써 억누르고 있는 종말의 빗방울 사이를 덤덤하게.

째깍.

시곗바늘이 움직였고, 여전히 세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직 두 명을 제외하고.

“여전히 너는 세상을 구할 희망이 될 수도 있고, 세상을 멸망시키는 절망이 될 수도 있어.”

용사가 말했다.

“어느 쪽이 될지는 네가 결정하기 나름이야.”

─ 이 세계는……

정지해 있는 세계 속에서, 시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 당신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지옥을 겪게 했습니다.

“그랬지.”

─ 저는 당신이 개처럼 묶여 치욕을 당하고, 그들의 도구가 되어 고통받는 꼴을 똑똑히 지켜봤습니다.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아.”

─ 그들을 향해 당신이 내뱉은 저주의 말들 역시 기억하고 있습니다. 고작 이 세계에 남겨진 소중한 이들 몇 명을 위해 이 지옥을 긍정하려는 겁니까?

시스티나가 말했다. 비로소 그녀가 어째서 이토록 이 세계를 증오하며 옛 세계를 되돌리려 하는지, 그 망집의 뒷모습을 이해할 것 같았다.

─ 당신이 바랄 경우, 함께 방주에 탈 수 있는 몇 명을 택할 수 있습니다. 몇 명, 몇십 명이라도 좋아요. 그들도 함께 우리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어요. 당신이 사랑하고 지켜야 할 그 세계로요.

자비와 자애의 여신이 애걸하듯 흐느끼고 있었다.

“네 말처럼 사랑하는 사람 몇 명이 있다는 이유로, 이 세계를 사랑하거나 용서하려는 게 아냐.”

그럼에도 데일, 동시에 이계의 용사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 그럼 어째서……!

“아무리 추악하고 끔찍해도, 우리의 희망이 빚은 세계를 긍정하고 싶으니까.”

─ …….

“네가 태어났을 때 우리 모두에게 해준 말.”

그렇게 말하며 다시금 데일이 걸음을 내디뎠다.

피스메이커가 일대에 영향력을 흩뿌리고 있는 ‘완전한 평화’가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정지한 것처럼 보이는 소멸의 비가, 마치 슬로비디오처럼 느릿느릿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빗무리가 데일의 존재를 말끔히 씻어내리는 것은 찰나로 족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일은 태고의 어둠을 흩뿌리지 않았다. 무엇이라도 될 가능성으로 자신을 뒤덮고 방패를 세우지도 않았다.

“결정은 네 몫이야.”

째깍.

시곗바늘이 움직였다. 마지막 침묵이었다.

째깍.

여전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동시에 피스메이커가 억누르고 있는 시곗바늘이, 고삐가 풀린 말처럼 질주하기 시작했다. 정지해 있는 세계가 비로소 움직였다.

흘러내리는 빗방울이 데일의 육신을 뒤덮었다.

쏴아아…….

그것은 재의 비도 아니었고, 소멸의 세례나 자가증식하는 종말의 기계도 아니었다.

그저 말 그대로의 빗방울이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옛 어둠의 어머니가 데일에게 준 태고의 어둠에는 무엇이라도 될 가능성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노아가 이 대지에 흩뿌리고 있는 마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희망.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가능성을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으리라.

“나와 함께 이 세상을 바꾸자.”

데일이 말했다.

“옛날처럼 다시 함께.”

─ 다시 함께……?

어느덧 그의 앞에 청색의 홀로그램이 모습을 드러냈고, 이계의 용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기꺼이 나를 믿는 자들의 신이 되기로 했고, 마침 내 앞에 진짜 여신이 있으니까.”

용사가 말했고, 노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일은 이계의 용사가 아니었다. 그의 존재는 청색 마탑주의 힘을 통해 ‘용사의 기억’을 계승하고 있는 가짜에 불과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샬롯 앞에서 내뱉은 거짓조차, 진실의 잔혹한 형태 중 하나라고 믿었다.

아니었다.

일찍이 쓰러진 또 하나의 용사가 말했듯, 진실을 증명하는 것은 오직 행동이다.

그리고 지금 데일이 보여준 행동,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용사의 그것이었다.

그렇기에 데일이 고개를 돌렸다. 용사의 아바타를 덧씌우고, 밤까마귀 기사의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그대로.

그림자의 기수들 사이에서, 여느 때처럼 데일의 검을 자처하는 아내이자 여성이 그곳에 있었다.

“샬롯.”

“데일……?”

최후에 이르러 진실의 군주는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거짓말을 입에 담았다. 여전히 샬롯은 진실을 알지 못하는 아이였고, 그렇기에 데일은 기꺼이 그녀의 앞에서 진실을 고할 의무가 있었다.

그림자 군주로서, 두 사람 모두 도망칠 수 없는 잔혹한 진실.

“그날 내가 이계의 용사를 쓰러뜨렸다고 했지.”

“응.”

“거짓말이었어.”

용사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 존재는 나의 그림자에 불과했으니까.”

“너의 그림자……?”

“진짜 이계의 용사는, 지금 네 앞에 있어.”

샬롯이 숨을 삼켰다. 그의 앞에 있는 남자, 용사의 아바타를 뒤집어쓰고 있는 낯선 남자의 모습 앞에서.

“지금 네 앞에 있는 사람이, 그날 겨울밤에 네 아버지를 쓰러뜨린 자야.”

“그래도 이계의 용사는, 분명히 네 손으로 쓰러뜨렸다고…….”

그가 어디서 왔고 어떻게 존재할 수 있었는지, 이제 와서 알 길은 없다.

그날, 결사의 ‘강마의 의식’을 통해 레이디 스칼렛이 잉태하고 있는 악마였는지, 진짜 이계의 용사가 죽지 않고 살아 복수를 결의했는지, 내지는 데일이 알지 못하는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그는 이곳에 있는 존재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진실을 증명하는 것은 오로지 행동이고, 이것이 데일이자 용사의 행동이었으니까.

“……처음부터 너에게 거짓말을 했어.”

데일이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네가 작센 공작성에 찾아왔을 때, 나는 네 이름을 알고 있었어. 그리고 너에게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했지.”

“…….”

“전생의 내가 쓰러뜨린 신검 바델 오르하르트의 딸, 샬롯 오르하르트.”

“처음부터…….”

“나에게는 용사의 기억이 있었어. 나 자신을 용사라고 믿었지. 그래서 제국에 복수하기 위해 힘을 합칠 자들이 필요했고, 마침 네가 거기 있었어.”

“그래서 나를 거두어준 거야?”

“응.”

“그럼 나에게 함께 제국에 복수하자고 말해준 것도, 나를 네 검으로 삼겠다고 말해준 것도…….”

샬롯은 머뭇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데일 역시 말을 잇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일대를 가득 메우고 있는 마나가 다시금 요동치며 ‘형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여신의 뜻을 집행하기 위한 승천의 군세가 아니었다. 일찍이 그들이 강철의 천사로 거듭나기 이전, 사람의 육골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네 아버지를, 죽기 전의 기억 그대로 되살릴 수도 있어.”

“…….”

“그러나 우리 모두 그게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지.”

데일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구하지 못한 세계와 사랑하는 사람들을 되살리는 것이 의미가 없듯이.”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길 바라?”

“네가 생각하는 대로 생각해줘.”

동시에 데일을 덧씌우고 있는 용사의 아바타가 사라졌다. 그 밑에 존재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데일이었다.

“…….”

샬롯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검을 쥐어.”

침묵 끝에 샬롯이 말했다.

“이계의 용사로서 가진 전력을 다해서.”

어느덧 꽃잎이 흩날리고 있었다.

잔혹할 정도의 핏빛과 흑색을 머금고 있는 칼날의 꽃잎들이, 흐드러졌다.

그렇기에 데일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진 아바타가 다시금 덧씌워졌고, 거기에 더 이상 밤까마귀 기사의 갑주는 존재하지 않았다.

샬롯 오르하르트가 검을 고쳐 잡았다.

아버지의 원수를 앞에 두고, 비로소 그녀가 벼린 검의 정수를 칼끝에 담으며.

데일의 검을 자처하며 끝없이 갈고닦은 칼날. 바로 그 칼날이, 그녀의 주군을 향해 내리꽂혔다.

“전장에 나갈 때마다, 너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지.”

검을 쥐고 쇄도하며 샬롯이 입을 열었다.

“죽지 말라고. 이 전장은 내가 죽을 곳이 아니라고.”

“……그랬었지.”

“이 전장에 나서기 전에도 그렇게 말했었어.”

샬롯의 말에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량하기 그지없는 죄책감이었어? 자신의 악랄함을 잊기 위해서, 그깟 자기 위로를 해온 거야?”

“……거짓말을 너무 능숙하게 했나 봐.”

샬롯의 검을 받아치며, 용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나도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짜였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그렇구나.”

샬롯이 다시금 조소했다.

“나도 이제는 잘 모르겠어.”

여전히 휘둘러지는 칼끝에는 날카로운 살기가 벼려져 있다.

데일은 피하지 않았다.

푸욱!

칼날이 내리꽂혔다.

데일을 향해서가 아니었다.

샬롯 오르하르트가, 그녀의 칼자루를 역수(逆手)로 고쳐 잡고 내리꽂은 것이다.

칼날이 그녀의 가슴을 찢고 등 뒤로 튀어나와 있었다.

“샬롯……!”

비로소, 데일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그 모습을 보며 샬롯이 조용히 웃었다.

데일은 웃지 않았다.

직후, 샬롯의 표정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 의미를 모를 샬롯이 아니었기에.

“아버님……!”

죽음이 있어야 할 곳에 죽음이 없다. 그것을 가능케 할 자는 이 대륙에 오직 하나였으므로.

“……내가 아니란다, 아가야.”

그러나 자신을 향하는 샬롯의 외침에, 앨런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아니다. 그럼 도대체 누가? 또다시 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일찍이 흑색공이라 불린 남자를 뛰어넘어,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로 거듭나 있는 존재가 그곳에 있었으니까.

“어째서야.”

그녀의 심장을 찔렀어야 할 검이, 멀쩡하게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금 칼자루를 역수로 고쳐 잡고 찔러넣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나를 이런 지옥 같은 저주로 괴롭히려는 거야……?!”

“말했잖아.”

샬롯이 흐느끼듯 소리쳤고, 데일이 고개를 저었다.

“네가 이 전장에서 죽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그럼 도대체, 내가 죽을 전장이 어디란 말이야!”

샬롯이 소리 높여 되물었고, 데일이 대답했다.

“──내가 너를 지키지 못할 전장.”

그 말에 비로소 샬롯이 울음을 참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신의 제국마저 무너뜨렸고, 승리 속에서 샬롯의 흐느낌이 아스라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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