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 * *
신성 제국.
무너진 제국의 폐허 위에, 새로운 제국을 참칭(僭稱)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제국의 지배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사람을 사랑하며, 동시에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여신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신성 제국의 수도,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여성이 있었다.
순백의 오렐리아, 일찍이 성검을 쥐고 진실보다 진실한 거짓이 되기를 바란 성처녀.
동시에 성처녀의 이름을 박탈당하고 마녀로서 갇혀 있는 그녀의 기도가, 비로소 응답받았다.
─ 잘 참아주었어요, 오렐리아.
여신이 그곳에 있었다.
“시스티나님……?”
성검을 빼앗기고 마녀의 죄목이 씌워졌으며, 제국이 무너지고 나서는 그 쓸모마저 잃고 모두에게서 버려졌다.
그랬어야 했다.
─ 그녀에게, 성검을 되돌려 주세요.
성검 뒤랑달. 초대 백색 마탑주가 여신의 가호를 받아 벼렸다고 일컬어지는 검.
그녀의 손에서 빼앗기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 믿은 검이, 다시금 그녀의 손에 들려졌다.
아울러 여신의 곁을 함께하는 것은 매끄러운 금속 질감으로 이루어진 이형의 존재들이었다.
─ 저는 그대야말로, 누구보다 저의 군대를 이끌 적임자라 생각하고 있답니다.
“저에게 여신님의 군대를……?”
─ 묵시(默示)의 전쟁이 시작될 거랍니다.
시스티나가 말했다. 그 말에 순백의 오렐리아는 비로소 흐느끼기 시작했다.
─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에, 끝없는 어둠과 두려움 속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은 당신 이상의 적임자는 없겠지요.
“아아……!”
─ 진실보다 진실한 거짓은 결코 진실과 구별될 수 없는 법이니까요.
그 말을 듣고, 비로소 오렐리아가 북받치는 신앙심을 참지 못하고 흐느꼈다.
순백의 믿음은 비로소 보답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이 신성 제국, 여신의 나라를 강림시키기 위한 전장에서 그녀의 사명을 다하게 될 것이다.
승천 전쟁이 시작되었다.
* * *
그 시각, 브리타니아 왕국의 왕성.
일찍이 구국의 기수이자 성처녀의 이명으로 불렸으며, 끝내 그녀의 조국을 구하지 못한 성처녀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비로소 브리타니아 왕국을 되찾고 그곳의 여왕으로 군림했을 때, 그녀는 더 이상 성처녀가 아니었다.
그저 그림자 군주를 위해 충성하는 칠흑의 집행자에 불과했다.
브리타니아 왕국을 수복하는 것은 여신을 향하는 신앙이나 고결함 따위가 아니었다.
피와 힘이었다.
섬에 있는 제국파 귀족들을 남김없이 숙청하고, 끝없이 피어오르는 공포 속에서 누구도 오렐리아를 거스르지 못했다.
데일의 말처럼 그녀는 비로소 그녀의 왕국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여신의 왕국이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 진실하며 깊은 신앙을 가진 성처녀는 사라졌다. 더 이상 그녀에게 사람을 사랑하는 자비와 자애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곳에 있는 오렐리아는 거짓보다 더더욱 거짓된 진실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신성 제국이 이 대지에 묵시의 전쟁을 일으켰을 때, 오렐리아는 기꺼이 그림자 군주를 위해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 * *
그 시각, 사해 군도.
끝없이 몰아치는 파도와 소금 냄새 속에서, 물에 젖은 생쥐꼴의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암초 위에서 지평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를 내려다보며, 육중하게 출렁이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잠에서 깨어나실 때가 되었습니다…….”
익사공 바르바로사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어둠 속에서 출렁이고 있는 밤바다 밑으로, 불길하게 움직이는 그림자를 주시하며.
나아가 그 심해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을 깊은 곳의 존재 앞에서 전율하며.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뒤로하고, 익사공이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이 대지 위의 패자가 되기 위해 끝없이 다툼을 거듭하는 인간들, 그 역시 과거에는 그러한 자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진실을 깨닫고 나서, 익사공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이 행성의 지배자는 오직 하나였다.
그 존재를 뒤로하고, 지상에서 벌어지는 전쟁 따위는 그야말로 우스운 촌극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존재는 아주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따름이며, 머지않아 그것이 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 * *
“신성 제국…….”
참으로 느닷없고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날 시스티나와 ‘동쪽 대륙에서 찾아온 이방자’들을 보았을 때, 내심 이렇게 되리라 믿었다.
제3제국에 이어 또 하나의 제국을 참칭하는 자들이 나타났고, 무엇보다도 그 제국의 배후에는 여신이 있었다.
여신이 강림하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으며, 그들에게 기적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로 대륙 전체의 이들이 동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전쟁에 앞서 벌어지는 정보전에서, 그것이 갖는 의미는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작센 대공성.
그곳의 일실에서, 데일과 아버지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는 이계의 용사가 아닙니다.”
그리고 데일은 기꺼이 그의 아버지에게 진실을 고했다.
“그럼에도 동시에 저는 청색 마탑주의 힘으로 그의 기억을 계승했고, 이것이 제가 알고 있는 진실입니다.”
이 대지에 존재하는 마나의 실체와 여신 시스티나의 정체에 대해서.
“……사람을 사랑하는 여신이라.”
지혜로운 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 딱히 놀라는 기색조차 없이, 그저 씁쓸하게 웃음 지었다.
“참으로 가엾구나.”
그리고 그것이 시스티나의 정체를 듣고 나서, 지혜로운 아버지의 대답이었다. 그것은 데일로서도 다소 의외였다는 듯, 일순 눈을 끔벅거릴 따름이다.
“그러나 그녀에게 무슨 사정이 있다고 해도, 과거에 사로잡혀버린 망집(妄執)을 놔둘 수는 없겠지.”
“그렇겠지요.”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여신이 직접 모습을 드내고 신성 제국을 비호하는 이상, 사람들의 마음 역시 그쪽으로 흘러갈 겁니다.”
“그렇겠지.”
사람은 나약하다. 그렇기에 누구나 신(神)을 갈구하고 있다. 그것은 꼭 종교에서 말하는 신일 필요조차 없었다. 재물, 여자, 명예.
그러나 이 세계에서 여신의 존재가 가장 강력한 신이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설령 그녀가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잔혹한 신이라 할지라도.
“신을 상대로 하는 전쟁에서는, 누구도 우리를 위해 싸우지 않을 것이다.”
신을 거역하고 지옥에 떨어지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으니까.
“그녀가 거느린 군대는 지금까지 제가 보아온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존재들이었습니다.”
“네 말처럼 마나란 결국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물질’이며, 여신에게는 그것을 자유자재로 다룰 힘이 있다고 했지.”
그것이 바로 여신의 군대, 아웃사이더가 가진 힘이다.
“그러나 결코 전능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에게 맞설 방법이 있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동시에 그 힘의 실체를 파악하고 있는 데일이기에, 덤덤히 말을 잇는다.
“『검은 산양의 서』가 저에게 주는 어둠의 마력은 그녀의 나노머신과 별개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스티나 역시 대기 중의 마나 전부를 조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가 이 행성의 마나를 완전하게 통제할 수는 없다는 뜻이구나.”
“그 말대로입니다.”
그녀가 전쟁을 일으키려는 이유는 명백했다.
아직 그녀의 힘은 완전하지 않다. 그리고 그녀의 뜻대로 과거의 세계를 수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행성을 뒤덮고 있는 나노머신 전부를 장악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다시 말해, 아웃사이더들의 진짜 목적은 시스티나가 이 행성 전체의 나노머신을 제어할 수 있도록 리피터(Repeater)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리라.
아웃사이더들의 나노머신 동조율, 나아가 그들이 마나의 종족이라 일컬어지는 엘프들에게 흥미를 보이는 것조차 시스티나의 ‘진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스텝에 불과하다.
“그녀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이 행성의 마나 전체를 손에 넣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녀의 승리이고, 다시 말해 우리의 승리 역시 꼭 적들의 시체로 산을 쌓는 게 아니란 뜻이지요.”
“네 말이 맞다고 가정할 경우, 여신의 군대에 맞서 군세(軍勢)를 움직이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하나하나가 규격 외의 강자에 수렴하는 그들을 상대로는 개죽음밖에 되지 않을 터이니.”
“맞습니다.”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저에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끄덕이고 나서는, 데일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여느 때처럼 아버지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한 아들로서.
* * *
그로부터 얼마 후.
신성 제국의 사절들이 대륙 각지의 군주들을 찾아왔고, 누구도 감히 그들 앞에서 거스르지 못했다.
제국의 지배를 거부하기 무섭게, 그곳에 있는 금속성의 존재들이 보여준 결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신성 제국 앞에서 복종을 거부하고도 무사한 것은 오직 하나, 익사공 바르바로사가 지배하는 사해 군도였다.
그 외의 국가와 영지는 모두 신성 제국의 지배에 무릎을 꿇었으며…….
그것은 작센 대공국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직후, 작센 대공과 그의 기수를 자처하는 이들이 ‘순례의 의식’을 통해 속죄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작센 대공과 그의 아버지, 랭커스터 기사국의 여대공 샬롯, 브리타니아 왕국의 여왕 오렐리아…….
그림자 군주와 그의 기수(旗手)를 자청하는 이들이, 속죄를 위해 신성 제국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신의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할 수는 없다. 애초에 여신의 군대에 맞서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리라. 천하의 칠흑공마저 굴복하는 것을 보며 모두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림자 군주를 필두로 순례자들은 전쟁이 아니라 속죄를 택하며, 여신의 나라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울러 그들의 행렬을 보좌하기 위해, 적지 않은 숫자의 밤까마귀 기사들이 함께했다.
동시에 작센 공작 가를 상징하는 흑색의 갑주로 몸을 꽁꽁 가린 그들 중, 살아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데스 오더, 죽은 기사들의 수도회.
이 순례의 끝에 벌어질 일을 신성 제국 역시 모르지 않으리라. 그러나 동시에 그 제의를 거절할 명분도 없다.
전쟁은 바로 그곳, 여신의 나라에서 벌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산 자들의 몫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스티나 여신을 위해 충성하는 이들 역시 예외가 아니리라.
죽은 자들의 군세에 맞서, 여신의 군대가 그곳에 있었다.
하나같이 승천의 세례를 받고 매끄러운 금속성의 질감으로 거듭나 있는 자동병기들.
나노머신과 동조하기 위해 최적의 육체로 거듭나 있는 여신의 군세가 그곳에 있었다.
아울러 그 군세를 지휘하는 것은, 성검을 쥐고 있는 순백의 성처녀였다.
이제는 사람의 육골(肉骨) 따위는 남아 있지 않고, 승천의 세례를 통해 매끄러운 금속성의 오토마타로 거듭나 있는 존재.
동시에 성처녀의 여성스러운 실루엣은, 승천자들의 군세 속에서 유일의 이질감을 뽐내고 있었다.
순례자들을 맞이하는 여신의 군대가 그곳에 늘어서 있었고, 비로소 지평 너머에서 ‘순례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에게 여신 앞에서 속죄하고 자비를 구하려는 기색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헤아릴 수 없는 죽은 자들의 군세를 이끌고, 죽음의 신이 그곳에 있었다.
칠흑공과 흑색공.
나아가 그림자 군주와 그들에게 충성하는 기수들을 거느린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