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57화 (257/301)

257화

* * *

길 위에서 노숙하고, 허름하기 짝이 없는 주점의 지푸라기 위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금지옥엽처럼 자란 공작 가의 영애로서는 좀처럼 익숙해지기 어려운 나날들이었으나, 리제는 생각보다 꿋꿋하게 버텨주었다.

“다 왔어, 리제.”

몇 개의 자유도시와 영지를 거쳐 대륙을 가로지르는 강의 수로를 타고, 데일 일행은 비로소 발라이나 백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리제에게 세상을 보여주겠다는 것과 별개로, 데일이 수행해야 할 일.

이곳에서 엘프 추방자들을 납치해 노예 산업을 벌이고 있다는 청색의 속삭임을 듣고, 그 진상을 살피는 일이다. 그리고 설령 그것이 진실로 밝혀질 경우, 이곳 발라이나 백국의 왕을 자처하는 자는 마땅히 그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아울러 이 기회에 대륙의 군주를 자청하는 이들 역시 알게 될 것이다.

칠흑공이 말하는 왕들의 감시자는 결코 알기 쉬운 겁박도 무엇도 아니라, 그들이 결코 속이지도 도망칠 수도 없는 진실임을.

“이곳 백국에서 비밀리에 벌어지는 엘프 매매를 조사하기 위해 왔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그래, 마침 잘 되었구나. 때마침 좋은 미끼가 이곳에 있으니.”

앞서 데일에게 이야기를 들은 세피아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미끼라니……”

“이곳에 있는 자들은 엘프를 노리고, 마침 엘프가 이곳에 있지 않으냐.”

엘프 마법사는 걱정할 것 없다는 듯 미소 지었다.

“무엇을 두려워하느냐, 데일.”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데일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설령 이곳 백국의 전체를 적으로 돌려도, 데일에게는 능히 지켜야 할 이들을 지킬 힘이 있었으니까.

“세피아 님의 작전대로 하죠.”

생각하고 나서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며, 어린 리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저 고개를 갸웃거릴 따름이었다.

* * *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곧바로 행동에 나서기에 앞서 필요로 하는 것은 정보였다. 그리고 데일이 백국의 영지에 들어서기 무섭게, 마침 그를 기다리고 있는 로브 차림의 청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순 세피아의 표정이 굳었으나, 동요는 잠시였다.

“우리들 청색의 지배자이자, 그림자 군주시여.”

청색 마탑의 지배자, 소서리스 하나가 데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모두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이 일에 대해서는 수정 여왕께서도 적잖이 흥미를 갖고 계시지요. 아직 확신할 수 없으나, 그들 배후에는 발라이나 백국 이상의 자들이 있어 보이고요.”

“배후가 무엇입니까?”

“청색의 거미줄로도 쉽게 드러나지 않는 자들이랍니다. 오히려 그림자 군주께서 직접 그들을 보시는 게 빠를지도 모르겠네요.”

“…….”

로브 사이로 흘끗 보이는 귀가, 그녀 역시 세피아와 같은 동족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림자 군주의 눈과 귀를 자처하며 대륙 곳곳에서 그들의 속삭임을 경청하고 알려주는 거미줄.

“리제, 여기부터는 잠시 우리끼리 할 이야기가 있구나.”

“저, 저도 함께 듣고 싶어요!”

데일이 말했고, 리제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했다.

“이 영지의 악당들이 죄 없는 사람들을 납치하는 걸 보고 싶을 수는 없어요!”

“……벌써 거기까지 들었니.”

데일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를 안전하게 보호하며 데일의 임무를 수행하고 싶었으나, 동시에 리제에게 있어 가장 안전한 곳은 오히려 데일의 곁이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하는 거예요?”

“글쎄.”

어린 리제가 천진하게 되물었다.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해서는, 데일 역시 마찬가지로 알 수 없었다.

“힘이 있으니까.”

“힘……?”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기꺼이 남을 희생시키는 행위. 제3제국의 그것은 결국 힘을 가진 자들의 본성과도 같은 행위였다.

이 세상에 강자와 약자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그와 같은 어리석음은 끝없이 거듭되리라.

무심코 생각했다. 정말로 왕들의 감시자 하나를 자처하는 것으로, 데일은 이 대지에 옛 제국의 과오가 거듭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오히려 누구도 감히 저항할 수 없는 압도적 힘을 바탕으로, 그림자의 제국에 군림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바라는 ‘이상의 세계’를 가져올 가장 확실한 방법이 아닐까.

“……왜 그러느냐, 데일.”

“아무것도 아니에요.”

세피아가 상념에 빠져 있는 데일을 불렀고, 그의 의식이 비로소 돌아왔다. 애써 평정을 가장하며 데일이 웃었다.

“리제, 이제부터 네가 보게 될 것들은 무척 잔혹하고 끔찍한 풍경일 거야.”

“……네, 오라버니.”

“그저 호기심 하나로 마주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지. 그에 맞는 각오가 있어야 해.”

웃고 나서는 리제를 향해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리제 역시 그 의미를 이해하고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께서 저보다 어린 나이에 작센 가를 위해 보여주신 활약을 기억하고 있어요.”

“…….”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오라버니의 활약을 들려주셨으니까요.”

데일을 향하는 동경, 나아가 마찬가지로 작센의 피를 잇는 자로서 그 의무를 짊어지기 위해.

“그리고 저 역시, 자랑스러운 오라버니의 여동생이니까요.”

“그래.”

일찍이 데일이 아버지의 아들임을 증명했듯, 리제 역시 다를 것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데일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럼 하나 약속해줄 수 있겠니?”

“약속이요?”

“절대로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말 것.”

“알겠어요, 오라버니!”

리제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데일은 망설이지 않았다.

* * *

며칠 뒤, 허름하기 그지없는 추방자의 모습을 가진 엘프가 도시의 어둠을 거닐고 있었다.

사전에 소서리스가 일러준 그들 인신매매 조직의 움직임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엘프 사회의 추방자들이 추방되어 대륙으로 향하는 길목, 그러나 산의 암살자들과 조우하기 전에 생기는 찰나의 틈을 노린 납치.

그 기준에 부합하는 장소는 대륙 북부에 있는 발라이나 백국 중에서도 극히 일부의 지역이었고, 세피아가 거닐고 있는 곳은 바로 그 도시의 뒷골목이었다.

사전에 소서리스가 수정의 대지에서 추방자가 있을 거란 거짓 정보를 흘렸고, 그 정보대로 세피아가 움직이고 있다.

대륙 전체에 걸쳐 눈과 귀를 가진 거미줄을 속일 수는 없다. 그것이 아무리 비밀스러운 납치 조직이라 하더라도 다를 것은 없으리라.

데일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듯 납치범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러나 세피아는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그들의 포박을 받아들였다.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진 세피아가 도시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동시에 그들을 따라 움직이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림자들의 왕이었다.

* * *

“월척입니다, 형님!”

발라이나 백국 내의 어느 도시. 소위 엘프 인신매매가 자행되고 있는 범죄 조직의 지하 아지트. 바로 그곳에서, 남자 하나가 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그들은 결코 일개 납치범이 아니었다. 척 보기에도 오러로 담금질 되어 있는 육체.

일찍이 제국에서 가장 강력하다 일컬어지는 철십자 기사 조직에 복무했고, 제국이 패망하고 나서는 곧장 도시의 뒷골목으로 흘러들었다.

말 그대로 그곳에 있는 자들은 무너진 제국의 폐허였다.

“보통 상품이 아니야. 아웃사이더(Outsider)들께서 값을 높게 쳐주겠군.”

엘프 중에서도 탁월할 정도의 미색을 가진 세피아를 보며, 남자 하나가 비릿하게 웃었다.

“아웃사이더?”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척조차 없이.

“누구……!”

아지트의 입구를 지키고 있어야 할 부하들이, 실이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쓰러졌다.

“그게 누구를 지칭하는 말이지?”

쓰러진 그들의 시체 사이로, 로브 차림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남자의 곁에는 겁에 질린 소녀가 있었다.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네놈……!”

남자가 다시금 팔을 휘저었다. 동시에 그의 심장에 새겨진 서클이 가속했고, 어둠이 지상을 내달렸다.

도망칠 수 없는 태고의 어둠과 촉수들이 아지트의 일대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알기 쉬운 학살은 일어나지 않았다.

말마따나, 왕의 감시자를 감시하는 존재가 그곳에 있었으니까.

‘전체 이용가로 배려하기가 쉽지 않네.’

내심 쓴웃음을 지으며, 데일이 덤덤히 팔을 휘저었다. 휘몰아치는 슈브의 촉수가 그들의 사지를 결박하고 어둠이 위협적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다시 묻겠다, 철십자 기사들로 이루어진 제국의 패잔병들이여. 누구에게 이 상품을 넘기려 했지?”

“서, 설마……!”

휘몰아치는 어둠 앞에서 기사 하나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확신 같은 것은 없었다. 그의 얼굴을 가까이서 목격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그날 전장에서 그 남자의 얼굴을 목격하고 살아남은 병졸 따위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 드넓은 전장에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자라도 ‘그 어둠’을 느끼지 못하는 자는 없었다.

바로 저 어둠이다.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 대륙 제일의 괴물이 펼치는 어둠.

어째서 그가 이런 촌구석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제국이 무너지고 지상에서 가장 강대하다 일컬어지는 왕국의 군주가 아무 말조차 없이 이곳까지 행차했는지조차.

그러나 그 존재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저 괴물이 그날 펼친 그림자의 지옥, 그 지옥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그 악몽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발광하는 전우들을 기억하고 있다. 이곳에 있는 이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매일같이 그 어둠의 공포가 트라우마로 남겨져 악몽에 발버둥치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악몽이 그곳에 있었다.

“치, 치, 칠흑공…….”

힘없이 중얼거렸고, 그 이름을 입에 담기 무섭게 싸울 전의 같은 것은 사라진 뒤였다.

아지트의 이들이 힘없이 실금하거나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촉수의 포박에 걸려 있는 이들은, 그저 그날의 악몽을 떠올리며 미친 사람처럼 웃을 따름이었다.

“너희는 두 가지를 결정할 수 있다.”

공포와 광기로 가득 차 있는 그곳에서, 칠흑공이 덤덤히 말을 이었다.

“하나, 이대로 죽음을 애걸할 정도의 고통 속에서 진실을 고하는 것.”

일말의 주저도 없이.

“둘, 고통 없는 죽음을 담보로 진실을 고하는 것.”

어느 쪽도 결코 유쾌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양자택일이었다.

“저, 저희도 그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네.”

“그, 그저 그들이 이 대지에서 온 자들이 아니란 것을 알 따름입니다!”

남자가 말을 이었다. 그 말에 데일이 조용히 숨을 삼켰다.

“……그래서 그들을 아웃사이더라고 불렀나?”

“그렇습니다! 그, 그리고 그들은 이 대륙의 인간들을 ‘상품’으로 취급하고 있었지요! 아울러 그중에서도 유독 엘프들에게 흥미를 보였습니다! 그들을 데려오는 대가로 이 대륙에서 볼 수 없는 진귀한 재화로 값을 치렀지요!”

“…….”

비로소 소서리스가 말해준 ‘청색조차 알 수 없는 배후’의 실체가 베일을 벗었다.

일찍이 익사공 바르바로사가 동대륙의 항해에 성공했듯, 그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더불어 그 존재들은 결코 친절한 이웃이 아니었다.

“……!”

일대를 집어삼키는 대규모의 폭발이 벌어진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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