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55화 (255/301)

255화

* * *

꿈을 꾸었다.

희고 어두운 겨울밤이었다. 그리고 겨울밤의 망령이, 그곳에서 데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검 뒤랑달에 등이 찔린 이계의 용사였다.

“우리의 진실을 증명하는 것은 오직 우리의 행동이다.”

용사의 시체가 말했다.

“그리고 이것이 너의 진실이다.”

용사의 발밑에는, 쓰러진 신검 바델 경의 시체가 있었다.

“동시에 너의 그림자이기도 하지.”

뒤이어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용사나 신검 바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데일이 등 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림자가 그곳에 있었다. 무척이나 데일을 닮아 있는 그림자였다.

“누구나 옷장 속에 해골을 숨기고 있는 법이지.”

그림자가 말을 이었다.

“설령 그것이 그림자 군주라 할지라도 예외일 수는 없다.”

“너는 누구지?”

“그림자 군주의 그림자.”

그 말에 데일이 뭐라 말을 이을 틈도 없이, 딛고 있는 세계가 무너져 내렸다. 그것이 마지막 대화였다.

“……!”

꿈에서 깨어나자 그곳은 작센 공작성의 침실이었다. 곁에는 그의 아내, 작센의 샬롯이 잠들어 있었다. 랭커스터 기사국의 여왕이자, 작센 대공국의 군주로 군림하고 있는 칠흑공의 아내로서.

데일이 말없이 그녀의 금빛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일어났어?”

누워 있는 샬롯이, 데일의 손길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더 자.”

“네 손길이 간지러워서 잘 수가 없잖아.”

데일이 말했고, 샬롯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데일이 이내 손을 거두려 했으나 샬롯이 팔을 뻗어 데일의 손을 맞잡았다.

“좋아해, 데일.”

“……나도.”

데일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이 세상을 알지 못하는 어린 소녀가, 이제는 어엿한 여성이 되어 미소 짓는다. 데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괴로운 일들은 끝이 났다. 적어도 그날, 아버지의 공백에 눈물을 흘리는 샬롯 오르하르트의 고통은 끝이 났을 터였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잔혹한 진실을 일깨워주고 싶지 않았다.

설령 자신이 용사의 기억을 가진 ‘가짜’에 불과할지라도, 그녀의 아버지를 향해 칼을 찔러넣은 그 기억을 말해주고 싶지 않았다.

“좋아해, 샬롯.”

그렇게 말하며 데일이 샬롯을 향해 입맞춤했다. 샬롯 역시 잠결에 미소 지으며 데일의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최후의 최후에 이르러, 진실의 군주는 거짓말을 입에 담았다. 그것이 그의 진실이었다.

자신의 곁에 있는 그녀를 상처입히고 싶지 않은 까닭에. 혹은 그저 그렇게 자기를 정당화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라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평생에 걸쳐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닐 저주였다.

* * *

제국의 폐허 위로, 헤아릴 수 없는 국가들이 솟아나고 스러지기를 거듭했다.

그중에서도 작센 대공국은 랭커스터 기사국과 더불어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진 두 국가였다.

그리고 두 국가의 정점에 군림하고 있는 데일과 샬롯, 두 대공이 다스리는 것은 그들의 영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림자 군주는 기꺼이 왕들의 감시자를 자청했으며, 청색의 거미줄을 통해 대륙 곳곳에서 벌어지는 온갖 속삭임을 경청하고 있었다.

아무리 비밀스럽게 속삭이려 해도, 결코 속일 수 없는 새와 쥐들이 대륙 각지에 뻗어 있다.

일찍이 대륙의 온갖 속삭임을 경청하는 청색 마탑의 비밀 조직, 소서리스 의회를 통해서.

흑색 마탑의 정점, 동시에 청색 마탑의 정점으로 군림하는 그림자 군주가 그곳에 있었다.

지금도 청색 마탑을 위해 암약하고 있는 소서리스들의 의식을 결집하며, 비로소 의회의 막이 올랐다.

“우리 청색과 그림자의 왕이시여.”

미스트리스 티타니아, 제국의 5황녀 키아라를 비롯해 청색 마탑의 지배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어려운 걸음을 해주신 데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데일은 일찍이 그의 어머니이자 청색 마탑주가 그러했듯, 능청스러운 미소로 고개를 숙였다.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지요.”

데일의 말에, 소서리스 하나가 입을 열었다.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결의한 남부의 소국, 발라이나 백국(伯國)의 첩보입니다.”

“말씀하시지요.”

“발라이나 백작이, 남부로 유입되는 엘프 추방자들을 납치해 비밀리에 노예 산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속삭임입니다.”

노예 산업. 그 말에 일순 데일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대륙은 제3제국 시절부터 노예제를 공식적으로 금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말씀대로입니다.”

데일의 물음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소서리스가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노예제를 금하는 제3제국은 무너졌고, 그 폐허 위에 세워 올린 독립국의 군주들 역시 그들의 규칙을 존중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저는 그날, 제국 의회에서 왕들의 두려움이 되겠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발라이나 백작께서는 그다지 우리의 군주를 두려워하지 않는 듯싶네요.”

“그래 보이네요.”

데일이 덤덤히 대답했고, 그 목소리에 서려 있는 싸늘함을 소서리스들은 놓치지 않았다.

“어째서 당신의 제국을 포기하셨습니까?”

그렇기에, 애써 데일이 고개를 돌리고 있는 진실을 입에 담았다.

“그림자 군주께서는 황금의 군주를 멸망시켰고, 이 대지에 진정으로 그림자의 제국을 가져올 힘이 존재하지요. 어째서 당신의 제국을 거부하고, 당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의 존재를 용납하시는 겁니까?”

“…….”

데일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침묵은 길지 않았다.

“저는 결코 지상 유일의 국가나 제위 따위를 위해 황금의 군주와 맞선 것이 아닙니다.”

침묵 끝에 데일이 대답했다.

“제가 지켜야 할 것들, 그리고 제국에 맞서 세상을 더 낫게 바꾸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싸움이었지요.”

“그렇담 그림자 군주께서 보시기에, 지금의 세상은 더 나아졌습니까?”

소서리스가 되물었고, 데일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대들의 말이 옳습니다. 아직 새로운 왕들은 생각처럼 저를 두려워하지 않고, 옛 제국에 비해 그다지 나아진 것도 없지요.”

조용히, 그러나 덧없는 환멸을 뒤로하고 데일이 말했다. 그 말에 소서리스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부디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우리들의 왕이시여.”

“이 땅에 다시금 그림자의 제국이 내려앉을 수 있기를.”

“말씀을 해주십시오.”

말 하나로 족하다.

말 하나로, 데일은 다시금 옛 제국이 그랬듯 이 지상에서 가장 강대하며 누구도 대적하지 못할 유일의 국가를 세울 수 있다. 그리고 그 국가의 정점에 기꺼이 군림할 수 있으리라.

그 누구도 그림자 군주가 그의 제국을 세우고 제위에 앉는 것을 거부하지 못하리라.

데일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저는 그대들의 뜻과 충성을 존중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림자 군주가 입을 열었다.

“머지않아, 즉시 발라이나 백국을 향해 길을 떠날 예정입니다.”

“……!”

“그곳에서 직접 그들이 자행하고 있는 어리석음과, 나아가 저의 경고를 우습게 여기는 무모함을 지켜볼 예정이지요.”

일말의 주저도 없이 데일이 말했다.

“그대들의 말대로, 저는 이 폐허 위에 세워질 세계에 대하여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림자 군주의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데일이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대들의 말처럼, 이 세계가 옛 제국에 비해 무엇 하나 나을 것도 없으며 지킬 가치도 없다고 생각될 경우, 저는 기꺼이 이 대지에 그림자의 제국을 가져올 것입니다. 발라이나 백국은 바로 그 시작이 되겠지요.”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싸늘한 목소리에, 소서리스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부디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저 역시 그렇게 되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충성을 증명하는 소서리스들을 뒤로하고, 데일이 몸을 돌렸다.

소서리스들의 의식을 하나의 자리에 결속하고 있는 마법이 사라졌고, 비로소 그의 일실에서 데일이 고개를 들었다.

등 뒤에서 스며들고 있는 햇볕을 뒤로하고, 데일이 몸을 일으켰다.

제국이 무너졌고, 그의 적이 쓰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무엇 하나.

“…….”

침묵 끝에, 데일이 몸을 일으켰다. 어느덧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정오의 햇살이었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으니까.

* * *

어린 리제가 울고 있었다. 그녀의 발밑에 쓰러진 토끼 시체를 부여잡고서.

짐승에게 물어뜯겨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토끼였고, 리제는 필사적으로 그 토끼를 일으키려 했다. 겨우 힘을 주어 움찔거리듯 토끼가 몸을 움직였으나, 그것이 다였다. 애초에 그것은 죽어 있었다. 그리고 사령술이란 결코 죽은 존재를 살리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라버니……!”

흐느끼고 있는 리제를 보며, 데일이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리제, 누구도 죽은 것을 되살릴 수는 없다.”

“그래도, 흑색 마탑의 사령술이……!”

리제가 미처 말을 끝마칠 새도 없이, 데일이 팔을 뻗었다.

육골이 흩뿌려지며 죽어 있는 토끼가,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사방에 흩어진 피와 살점이 하나로 응어리지며 기이하기 그지없는 피조물이 되어서.

“지금 움직이고 있는 저 토끼가, 여전히 살아 있다고 생각하니?”

아무리 세상을 알지 못하는 어린 리제라 해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데일이 움직이는 저것은 죽음에서 되살린 토끼가 아니라, 그저 그의 뜻대로 춤추고 있는 꼭두각시에 불과함을.

“이것이 우리 흑색 마탑의 마법이야.”

데일이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죽은 자를 살리지 않아. 죽어 있는 존재를 움직이는 법을 배울 따름이지.”

그 말에 리제는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처음 네가 죽어 있는 토끼를 움직였을 때, 그 토끼가 살아났다고 생각했니?”

데일의 물음에 리제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자기가 살린 토끼가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나서 움직임이 멎었을 때, 리제가 며칠 밤낮 가까이 흐느끼는 일을 기억하고 있기에.

“누구도 죽은 존재를 되살릴 수는 없어.”

애써 흐느낌을 억누르고 있는 리제를 보며, 데일이 말했다. 여느 때처럼 자상하기 그지없는 오라버니가 아니라, 잔혹하기 그지없는 진실을 고하는 자로서.

“그럼 어째서, 아버지와 오라버니께서는 흑색의 마법을 배우신 거예요?”

동시에 흐느끼는 리제가 되물었다. 그 말에 데일이 일순 숨을 삼켰다.

“지켜야 할 것들이 있었으니까.”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네가 보기에 아무리 그것이 끔찍하고 추악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적들로부터 우리를 지킬 힘이 필요했다.”

“힘……?”

“그래.”

데일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비록 리제가 아직 그 말을 이해하기에 너무 어리다 할지라도, 데일은 개의치 않았다.

“잠시 작센 공작성을 비우고, 여행을 떠날 거야.”

이어지는 데일의 말에, 리제가 다시금 흐느끼듯 웅얼거렸다.

“또 혼자서 멀리 떠나시는 거예요?”

“아니야.”

그러나 리제의 말에, 데일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리제, 오라버니와 함께 여행을 떠나지 않겠니?”

젓고 나서 데일이 말했다.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리제가 일순 고개를 갸웃거렸고,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나와 함께 더 넓은 세상을 보러 가자꾸나.”

“네. 오라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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