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3. 성년기
“저희 브뤼켈 백작령은 작센 대공 각하의 뜻에 받들어, 브뤼켈 왕국으로의 독립을 희망합니다!”
“트리아의 레몽, 마찬가지로 제국으로부터의 이탈과 함께 트리아 왕국의 독립을 희망합니다!”
“저희 발러 가 역시……”
헤아릴 수 없는 귀족들, 이름 있는 제후부터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군소 귀족들마저 왕의 이름을 자청하기 시작했다.
왕좌(王座)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데일이 제국의 해체를 입에 담기 무섭게 쏟아져 나오는 독립의 결의, 그러나 그들을 보고 있는 데일의 표정은 무척이나 무심했다.
“요크의 티타니아.”
바로 그때, 청색 마탑의 소서리스이자 그림자 군주의 기수를 자처하는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에 일순 울려 퍼지는 소요가 잦아들었다.
“감히 작센 대공 각하에게, 몇 말씀을 올려도 될까요?”
“말씀하십시오.”
앞다투어 왕을 자처하는 어중이떠중이 귀족들과 비교를 불허하는 대제후, 요크 가의 실세.
“어째서 대공께서는, 이 땅에 당신의 제국을 세우지 않으시는 거지요?”
티타니아가 물었다. 그 말에 얼어붙을 것 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말대로다. 이 남자는 자기 손으로 황금의 제국을 무너뜨렸고, 그 폐허 위에서 능히 새로운 시대의 유일무이한 왕을 자처할 힘이 있었다.
“당신께서 바라실 경우, 이곳의 누구도 감히 그 뜻에 거스르지 못하겠지요. 이름조차 알지 못할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이 왕을 자청하며 대륙이 전란(戰亂)의 도가니에 빠지는 것을, 그저 지켜볼 심산이신가요?”
그 노골적이기 그지없는 소리에, 곳곳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저는 지상 유일무이의 국가나 왕좌 따위에는 흥미가 없습니다.”
데일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침묵은 길지 않았다.
“동시에, 미스트리스 티타니아의 말씀처럼 이 대륙이 다시금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것도 바라지 않지요.”
“그럼 어쩌실 셈이지요?”
침묵 끝에 데일이 입을 열었고, 티타니아가 되물었다.
“제국의 해체를 천명하는 이 이후로, 이 세계에서 왕이 되겠다는 것은 오직 하나의 의미를 가질 겁니다.”
그림자 군주가 말했다.
“이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봉사하는 자.”
데일이 대답했다. 지금까지와 비할 바 없는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다시금 얼어붙을 것 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칠흑공의 발밑을 따라, 태고의 어둠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저는 왕들의 왕이 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기꺼이 왕들의 공포가 될 수는 있겠지요.”
제국을 무너뜨리고 황금의 대제를 쓰러뜨린 대륙 제일의 강자로서.
“이제부터 왕은 그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호사스럽거나 영예로운 자리가 아닐 겁니다. 그 누구보다 청렴하고 떳떳해야 하며, 진실로 국가와 백성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 이들의 자리지요.”
“그, 그 말씀은……”
일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귀족들 사이에서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브리타니아의 오렐리아.”
바로 그때, 침묵 속에서 후드를 눌러쓰고 있는 여성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무척이나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 신생 브리타니아 왕국은 제국으로부터의 이탈을 결의하고, 나아가 저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기꺼이 왕국을 의해 헌신할 것을 맹세합니다.”
“여, 여왕 폐하!”
그녀의 곁을 지키는 기사 하나가 경악하며 숨을 삼켰고, 그녀를 향해 데일이 고개를 돌렸다.
일찍이 데일의 곁을 지키는 그림자의 검이자, 이제는 주군의 곁을 떠나 브리타니아 섬에서 처음 그녀가 바란 결실을 손에 넣은 칠흑의 성처녀.
일찍이 작센의 ‘검은 공자’에게 패배해 조국을 빼앗기고, 그러나 최후의 최후에 이르러 그녀는 비로소 그녀의 조국을 손에 넣었다.
신생 브리타니아 왕국의 여왕으로서.
“랭커스터의 샬롯.”
뒤이어 차례차례, 기꺼이 가장 낮은 자리에서 봉사하기를 결의하는 왕들이 몸을 일으켰다.
“우리 랭커스터 대공령 역시 제국으로부터의 이탈을 결의하고, 그와 동시에 아버지의 조국 ‘튜토니아 기사국’의 유지를 이을 것을 이 자리에서 천명합니다.”
두 여왕을 필두로, 떳떳하게 자신의 조국을 천명하는 이들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림자 군주는 말없이 그들의 그림자를 지켜보며,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그가 수행해야 할 일은 끝이 났다. 그 후 이 대륙에 무엇이 덧씌워질지는, 오로지 새롭게 쌓아 올리는 자들의 몫이리라.
그렇기에 그림자 군주가 수행해야 할 일은 그저, 어둠 속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것으로 족하다.
대륙 전체에 펼치고 있는 청색의 거미줄을 통해, 왕들을 감시하는 가장 두려운 존재로서.
* * *
그로부터 얼마 후, 이제는 랭커스터 기사국의 이름을 쓰고 있는 국가의 성.
여왕 샬롯 랭커스터의 일실.
제국이 무너지고 비로소 손에 넣은 샬롯 랭커스터의 국가.
여왕 샬롯은 랭커스터의 이름과 더불어 공식적으로 튜토니아 기사국의 유지를 잇고, 착실하게 기사국의 세력을 규합하고 있었다.
아울러 샬롯의 남편이자 작센 대공으로서, 데일이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두 사람은 더 이상 소년도 소녀도 아니었다.
“그날 일이 떠오르네.”
손에 쥐고 있는 포도주를 홀짝이며, 샬롯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무척이나 성숙하고 기품 있는 미소였다.
“그날?”
“처음 작센 공작성에서 너를 봤을 때.”
샬롯이 즐거운 듯 말했고, 데일이 말없이 웃었다.
“설마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지.”
“이제 시작이야.”
데일이 대답했다.
“폐허 위에 하나둘씩 새로운 국가들이 세워지고, 제국의 과오를 거듭하지 않는 새 시대가 열리겠지.”
“얼마나 달라질까?”
“글쎄.”
데일이 조용히 말을 흐렸다.
“많은 것들이 좋아질 수도 있고, 오히려 더 나빠질 수도 있겠지. 그걸 감시하는 게 그림자 군주로서 내가 수행해야 할 마지막 의무야.”
왕들의 공포. 비록 칠흑공의 위명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나, 새로운 국가를 천명하는 군주들은 아직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청색의 거미줄, 밤낮으로 그들의 ‘진실’을 헤아릴 수 있는 눈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어째서 너의 제국을 세우지 않은 거야?”
바로 그때, 샬롯이 되물었다. 일찍이 그림자 군주를 향해 헤아릴 수 없는 이들이 그렇게 물었듯이.
“그럴 가치가 없는 일이니까.”
데일이 대답했다. 일말의 주저도 없이.
“나에게는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킬 수 있을 정도의 힘으로 족해.”
“뭘 지키려고 하는데?”
“작센 가.”
데일이 말했다.
“그리고 작센의 샬롯.”
슬며시 팔을 뻗어, 사랑스러운 아내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그 말에 샬롯이 수줍은 듯 미소 지었다.
“몇 명이 좋을 것 같아?”
미소 짓고 나서 샬롯이 되물었다. 일순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데일이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그녀의 말뜻을 헤아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두 명.”
데일이 그답지 않게 수줍은 듯 말했다.
“그럼 아들이랑 딸로 하자.”
“그것까지 정할 수 있는 거야?”
“내가 어떻게 알아? 그야 될 때까지 힘내야지.”
데일이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고, 샬롯이 포도주를 홀짝이며 배시시 웃었다. 얼굴이 살짝 붉었다.
“……취했구나.”
“응, 취했어.”
데일이 말했다. 샬롯이 다시금 포도주를 홀짝이며 태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고 나서 샬롯이 데일에게 입맞춤을 했다. 희고 가녀린 어깨가 붉어졌고, 술기운 탓에 몸이 무척 뜨거웠다.
데일이 팔을 뻗어 샬롯의 목덜미를 휘감고 고개를 파묻었다.
네 개의 팔이 서로에게 엉켰고, 두 개의 몸이 하나로 포개졌다.
* * *
작센 대공국.
“왕들의 감시자가 되려고 합니다.”
그곳에서 데일이 말했고, 아버지 앨런이 놀란 듯 눈동자를 끔벅거렸다.
“무엇을 꾸미고 있느냐.”
“말 그대로의 일입니다.”
데일이 대답했다.
“저에게는 제가 무너뜨린 제국의 폐허 위에서, 무엇이 태어날지 지켜보고 감시할 의무가 있습니다.”
제국이 무너지고 그 위에 우후죽순 세워질 국가들. 그리고 새로운 국가의 왕을 자청하는 자들.
“저에게는 청색의 거미줄이 있고, 그들이 밤낮으로 속삭임을 들려주고 있지요. 그리고 제가 수행해야 할 일을 수행할 것입니다.”
“너의 나라를 뒤로하고서 말이냐?”
“작센 가에는 아버지가 계시니까요.”
“…….”
“작센 대공으로서, 아버지를 저의 대리자로 임명하겠습니다.”
데일의 말에 흑색공이 씁쓸하게 웃었다.
일찍이 과거의 작센 공작이 데일에게 그러했듯, 데일이 그의 아버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무엇보다 아직 이 영지는 제가 아니라, 아버지의 지혜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너는 이미 작센 가의 가주로서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
“저는 이 대륙이 다시금 제3제국과 같은 과오를 거듭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그림자 군주로서 제가 수행해야 할 마지막 사명이지요.”
데일이 대답했다. 그 말에 앨런 역시 그 이상 말을 잇지 않고, 묵묵히 미소 지었다.
“나는 늘 네 뜻을 존중할 것이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 * *
아버지의 방을 나서자, 어느덧 어엿한 숙녀로 성장한 리제가 데일을 마중하고 있었다.
그녀의 스승, 엘프 마법사 세피아와 함께.
“오라버니, 또 어디를 가시려는 거예요?”
“아무 데도 가지 않아.”
리제가 뾰로통하게 뺨을 부풀리며 말했다.
“아버지도 오라버니도, 사령술을 가르쳐주신다고 하고 매일같이 미루고 계시잖아요.”
“……꼭 사령술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있니?”
데일이 마지못해 물었고, 리제가 질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작센 가의 사람으로서, 흑색의 마법을 배우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니까요.”
“그래도…….”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구나.”
어떻게 해서라도 리제의 마음을 돌리려는 데일을 보고, 세피아가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어릴 적, 흑마법을 배우겠다는 데일의 고집을 떠올리며.
“……상황이 다르지 않나요.”
“무엇이 다르다는 말이냐? 내가 보기에는 두 명 모두 똑같아 보이는구나.”
세피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리제에게는 사령술의 재능이 있다.”
이어지는 말을 듣고, 데일이 조용히 숨을 삼켰다.
“설마…….”
“불과 몇 주도 지나지 않아 죽은 생물을 되살리는 데 성공했지.”
“세, 세피아 님!”
말을 이으려다 말고, 데일이 허탈하게 웃었다. 참으로 피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이다.
세피아의 고백에 리제가 당혹스러운 듯 소리를 높였고, 이내 데일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 모습을 보고 데일이 말없이 리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각오를 굳게 다져야 할 거야.”
“네, 오라버니!”
아버지의 뒤를 이어, 어엿한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가 말했다. 그리고 그 말에 리제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햇살이 쏟아지는 어느 겨울 낮의 일이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