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53화 (253/301)

253화

* * *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겨울을 쓰러뜨리고 나서, 비로소 희고 어두운 겨울밤의 세계가 스러졌다.

말 그대로, 지금의 데일에게 있어 그것은 ‘과거의 풍경’에 불과했으니까.

그의 앞에 진짜를 자처하는 이계의 용사가 어떻게 해서 나타났는지, 그의 정체가 무엇이고, 자신과 그 중에서 어느 쪽이 더욱 진짜에 가까울지. 여신 시스티나가 무엇을 바랐고, 얼어버린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

이제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겨울밤의 망령은 사라졌다. 겨울 역시도.

마왕령의 대지, 작센 자작성의 대회당. 그곳에서 세계의 격돌이 끝나고 남겨진 자들이 있었다.

“데일.”

샬롯이 그곳에 있었다. 아버지 신검 바델을 쓰러뜨리고 승리를 손에 넣은 그녀가.

“아버지, 신검 바델 경과 싸웠구나.”

데일이 나직이 입을 열었고, 샬롯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의미를 헤아리고 데일 역시 침묵을 지켰다.

“이계의 용사 역시, 이곳에 나타났어.”

“용사가…….”

샬롯의 표정이 얼어붙었고,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가 용사와 싸운 거야?”

두 겨울밤의 망령. 그리고 그 망령과 싸워 승리를 거둔 자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래.”

“그를 죽였어?”

샬롯이 되물었다. 그녀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증오를 데일은 놓치지 않았다. 진실의 눈을 가진 데일에게 샬롯의 그림자가 비쳤다. 자기 손으로 아버지를 쓰러뜨리고, 아버지를 겨울밤의 망령으로 되살린 용사를 향하고 있는 시린 증오가.

그렇기에 침묵 끝에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사는 죽었어.”

“그렇구나.”

데일의 대답을 듣고 샬롯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개운해졌다는 듯이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마워, 데일.”

“뭐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줘서.”

“…….”

샬롯이 감사를 표했고 데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용사는 죽었다. 그것이 진실이었고, 거짓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일에게는 그 말이 이상할 정도로 거짓처럼 느껴졌다.

‘우리의 진실을 증명하는 것은 오직 행동이다.’

무심코 용사의 말이 떠올랐다. 그 말대로였다.

말할 수 있는 진실에 대해 침묵을 택하는 것.

그것이 데일의 행동이었고, 그 행동이야말로 데일의 진실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최후의 최후에 이르러, 진실의 군주는 거짓을 입에 담았다.

세상에서 가장 추악하기 그지없는 거짓말이었다.

* * *

“이것 참.”

핏빛공 유리스 후작이 그곳에 있었다.

작센 가의 두 부자와 샬롯, 그리고 세피아를 비롯해 헤아릴 수 없는 그림자의 기수들에 둘러싸여서.

“설마 회심의 카드가, 이렇게 패배해버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네요.”

유리스 후작이 남의 일처럼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육체에 끝없이 새겨넣고 있는 피의 역사를 뒤로하고, 체념하듯 웃었다.

“레이도 스칼렛도, 사랑하는 이들이 죽고 저는 또다시 홀로 남겨졌군요.”

남겨진 자.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그를 보며 작센 가의 수장, 칠흑공이 입을 열었다.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두려워하는 종말의 공포 역시도 끝이 났지요.”

“……그렇습니까.”

“설령 이 우주의 끝이 정해져 있다 할지라도, 내일 당장 이 대지가 얼어붙지는 않을 겁니다.”

“아, 그것참 다행이네요.”

핏빛공이 덤덤하게 웃었다.

“보아하니 이 이상 발버둥을 쳐봐야 소용도 없을 것 같네요.”

“남기고 싶은 말이라도 있습니까?”

“글쎄요.”

핏빛공이 어깨를 으쓱였다. 동시에 그의 서클이 가속하며 화염이 휘몰아쳤다.

“……!”

몇몇 이들이 당황하며 다급히 검을 휘두르려 했으나, 그들을 제지하며 작센의 앨런이 팔을 뻗었다.

휘몰아치는 화염이 집어삼키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니었다. 핏빛공 그 자신이었으니까.

“우주의 겨울을 목격하고 나서, 평생에 걸쳐 추위에 떨었습니다.”

이글거리는 겁화 속에서, 핏빛공이 덤덤히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정말로 추운 것은,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 홀로 남겨진 고독이었군요.”

“…….”

“어째서 기약조차 할 수 없는 영겁의 미래를 두려워하고 추위에 떨어야 했는지.”

마치 자기 자신에게 되묻듯 핏빛공이 중얼거렸다.

“이제는 무엇 하나 이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화르륵!

“평생에 걸쳐 따스함을 갈구했습니다. 그것이 처음부터 제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지요.”

조소하듯 핏빛공이 웃음을 터뜨렸다.

휘몰아치는 불꽃이 그의 육골을 집어삼키고, 피부를 녹이고 뼈를 불사르고 있었다.

그토록 얼음으로 끝나게 될 세계를 겁내며 발버둥 친 남자의 최후는, 아이러니하게도 이글거리는 불꽃이었다.

불꽃이 남자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의 육체에 새겨진 피의 역사가 녹아내렸다. 그러나 이글거리는 불꽃 속에서도 남자의 표정은 무척이나 평화로웠다.

마치 봄볕의 따스함을 음미하고 있는 것처럼.

최후의 최후에 이르러, 비로소 남자의 세계가 끝을 맺었다.

불로서 끝나버린 세계였다.

* * *

전쟁이 끝나고, 북부 전체에 걸쳐 끝을 알 수 없는 함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충성하며 소리를 높이고 있는 작센 가의 수장, 칠흑공이 그곳에 있었다.

그림자 군주는 제국의 황제를 쓰러뜨리고 황금의 기수들을 굴복시키며,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힘을 증명했다.

대륙 북부, 중부, 저 너머에 걸친 브리타니아 섬을 비롯해 황금의 심장이라 불린 옛 황도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일찍이 황금의 제국, 그 심장이라 일컬어진 황성의 그레이트 홀.

일대를 가득 메우고 있는 황금의 성채 속에서, 대전쟁의 승리자이자 제국에서 가장 강대하다 일컬어지는 자가 걸음을 내디디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작센 공작 각하.”

그리고 마땅히 있어야 할 군주를 잃고 텅 비어 있는 그곳에서, 데일을 맞이하는 것은 제국의 5황녀 키아라였다.

“키아라 황녀님.”

“이제는 더 이상 황녀라고 부를 수조차 없지요. 그림자 군주께서, 더 이상 작센 공작이라 부를 수 없듯 말입니다.”

데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대로였다.

황금의 제국은 무너졌고,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은 무너진 제국의 폐허 위였으니까.

“새로운 질서, 그림자의 제국을 가져올 왕이시여.”

키아라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무릎을 꿇었다. 황실의 일족이자, 동시에 그림자의 기수를 자처하는 청색 마탑의 소서리스로서.

“부디 이 황성의 옥좌에 앉아 주세요.”

“…….”

데일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침묵 끝에 데일이 대답했다.

“제가 바라는 것은, 황금의 제국이 거듭하는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제국이 사라지는 것으로 이 땅에 평화가 찾아올 것 같다고 생각하시나요?”

“적어도 실체 없는 공포에 떨며 흑적 교도대와 같은 광기의 업을 되풀이하지는 않겠지요.”

“인간이란 생물을 너무 신뢰하고 계시네요.”

“설령 황금의 제국이 사라져도, 여전히 이 대륙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자들이 아닙니까?”

데일이 차갑게 되물었다.

“그림자의 기수를 자처하는 그대들 역시, 제국의 폐허 위에서 그대들의 왕국을 쌓아 올리겠지요.”

“그림자의 제국을 가져오는 것을 거부하겠다는 뜻이신가요?”

키아라가 싸늘하게 되물었고, 데일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저는 그림자의 제국을 가지고 왔습니다.”

데일이 대답했다.

“이 어둠 속에서 무엇이 창조될지는, 그저 그 왕국을 세우게 될 이들의 역량이겠지요.”

“…….”

“그러나 키아라 황녀님의 말대로, 헤아릴 수 없는 국가들에 의해 전쟁의 시대가 열리는 것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데일이 말했다.

“그렇기에 다시금, 제국 의회를 소집하고 싶습니다.”

그림자 군주, 칠흑공의 이름으로 소집되는 제국 의회.

“그곳에서 무엇을 결정하고자 하시나요?”

“군주들의 자격을 시험해야겠지요.”

데일이 말했다.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왕으로서, 그들이 얼마나 진실할지를 말입니다.”

* * *

제국이 무너지고 저마다 독립국의 군주를 자처하는 귀족들이 앞다투어 칭왕(稱王)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무질서 속에서 황금의 군주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작센 공작이자 그림자 군주가, 제국 의회를 소집했다.

황금의 군주와 제국을 무너뜨리고, 제국을 파멸로 몰아넣은 자.

그렇기에 누구도 그의 부름을 거스를 수 없었다. 동시에 그가 소집하는 의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림자 군주는 제국의 폐허 위에서, 일찍이 제국과 같은 하나의 국가를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그 폐허 위에 우후죽순 생겨날 왕국들에 의해, 전쟁의 시대가 거듭되는 것을 바라지도 않으리라.

다시 말해 그가 소집하는 제국 의회는, 제국의 폐허 위에 생겨날 군주들의 자격을 시험하는 장이 될 것이다.

하나의 질서가 스러지고, 어느덧 그 위에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고 있었다.

일찍이 황금의 제국이 그러했듯, 누구도 감히 거스를 수 없는 힘의 질서였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최후의 제국 의회가 소집되었다.

더 이상 제국이라 부를 수조차 없는 무늬밖에 없는 왕국이었으나, 의회의 소집을 바라는 자는 결코 무늬밖에 없는 존재가 아니었다.

대전쟁이 끝나고 나서 비로소 이 제국에,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힘을 가진 존재.

칠흑공.

더 이상 그는 작센 공작조차 아니었다.

북부 작센 공작 가의 수장이자, 작센 공국(公國)의 군주.

샬롯 랭커스터와 마찬가지로 작센 대공의 이름을 가진 자.

제국 의회장에 모여 있는 헤아릴 수 없는 제후들이, 바로 그 존재를 향해 예를 표하고 있었다.

저마다 지위의 고하에 따라 엄격하게 배정되는 그 자리에서, 가장 높이 솟아 있는 자리는 공석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키아라 황녀와 모드레드를 비롯해 살아남은 황실의 일족들이 있었고, 그들 바로 밑에 비로소 칠흑공이 있었다.

그러나 제위가 비어 있는 이상, 여기서 더 이상 앉아 있는 자리의 높고 낮음은 의미가 없었다.

나아가 이 자리는 제국의 총의를 결정하기 위한 자리조차 아니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엄숙하게 내려앉은 침묵 속에서, 의장의 역할을 자처하며 데일이 입을 열었다.

“황금의 제국과 아서 대제에 맞서, 이 전쟁에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일었다. 비록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라 해도, 그 말이 데일의 입에서 흘러나왔을 때, 그 말의 무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적지 않은 이들께서, 제국의 폐허 위에 새로운 국가를 천명하고자 하는 야망을 갖고 계시지요.”

데일이 말했다. 곳곳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말했듯이, 저는 과거의 제국처럼 이 지상에 유일의 국가와 군주를 고집할 마음도 없습니다.”

“…….”

머릿속에서 저마다의 셈을 마치며, 제후들이 침묵 속에서 데일의 흘러나올 바로 그 말을 기다렸다.

“그렇기에 저는 무너진 제국의 폐허 위에서, 공식적으로 제국의 해체를 천명하고자 합니다.”

하나의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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