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52화 (252/301)

252화

* * *

전쟁의 끝에 찾아온 것은 겨울이었다.

내일 당장 세상이 얼어붙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겨울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림자 군주는 이상할 정도로 덤덤하게 그의 존재를 받아들였다.

가슴 깊은 곳에서는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 같았다는 예감이 있었다.

그날, 힘을 얻기 위해 우주의 겨울에서 종말의 냉기를 손에 넣었을 때부터.

그럼에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 그림자 군주야, 너는 진실의 사도가 되기로 맹세했지. 그리고 존재하는 전부에는 끝이 있다.

겨울이 말했다.

희고 어두운 겨울밤 속에서, 쓰러진 용사와 얼어붙은 인조의 여신을 뒤로하고.

─ 그리고 너는 기꺼이 그 진실을 받아들이겠지.

“…….”

데일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등 뒤에는 인간을 사랑하는 옛 어둠의 어머니가 있었다.

“이 세상이 얼음으로 끝나리란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아.”

침묵 끝에, 데일이 입을 열었다.

“존재하는 것에는 모두 끝이 있고, 결코 그 끝이 허무하지도 않음도 이해하고 있지.”

즐거운 일이 끝나는 것은, 마찬가지로 슬프고 괴로운 일들 역시 끝내기 위함이다.

끝이 있기에 의미가 있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의미가 있다.

의미는 오로지 유한(有限) 속에서밖에 태어나지 않으니까.

그것이 흑색공이 깨달은 진리였고, 데일 역시 그와 같은 것을 깨달았다.

─ 그래, 알아주니 다행이네.

“그러나 그게 오늘은 아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일이 덤덤히 고개를 저었다. 겨울을 이루고 있는 순백의 실루엣이 재차 꿈틀거렸다.

─ 세상의 끝에 다가올 진실을 부정하려는 것이냐?

“네가 보기에는 이 세상이 당장이라도 끝날 것처럼 보이나?”

─ 이 별의 멍청이들과 같은 헛소리를 지껄이려는 거냐? 막상 자기 앞에 종말이 닥치니, 겁이 나서 벌벌 떨며 진실을 부정하겠다는 거냐?

겨울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데일은 웃지 않았다.

“네 존재가 정말로 이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하나?”

데일이 말했다. 그 말에 겨울의 웃음소리가 그쳤다.

동시에, 지금까지의 그 무엇과 비교할 바 없는 냉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저 존재하는 것으로 이 세상의 빛과 불꽃을 꺼트릴 것 같은 냉기를 흩뿌리는 존재.

아니, 그것은 냉기가 아니었다.

무(無)였다.

─ 어리석은 필멸자야, 감히 네놈 따위가 내 존재를 의심하려 드는 것이냐?

“이 우주는 아직 얼어붙지 않았다.”

데일이 남의 일처럼 대답했다.

“열적 사멸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양성자가 붕괴하지도 않았다. 이 대지에는 여전히 태양이 이글거리고, 지금도 우주를 떠돌고 있을 흑색왜성의 잔해와 물질이 소멸하지도 않았지.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이 별도 마찬가지지. 고등학생도 그 정도 사실은 알 수 있을 거다.”

그림자 군주로서 가진 능력, 진실의 눈이 겨울의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딱히 그럴싸한 능력이 없어도, 진실을 헤아리는 것 자체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저 이 별의 존재들이 시끄럽다는 이유 하나로 ‘끝’을 가져오는 존재를, 정말로 이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있나?”

사람의 실루엣을 가진 백색의 서리, 겨울이 필시 ‘우주의 끝’에 다가올 힘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그가 우주의 끝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 그럼 나를 뭐라고 생각하지?

“두려움.”

겨울이 물었고, 데일이 대답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이 그늘처럼 드리워져 있다는 두려움이지.”

─ …….

“종말 역시 마찬가지다.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종말 그 자체가 아니라, 이 세상에 드리워진 종말의 두려움이지.”

겨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데일이 말하는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네 존재는 종말의 공포가 낳은 허상에 불과하다.”

과거의 세계, 지구의 과학자들은 알고 있었다. 빅 프리즈를 통해 이 우주는 끝나게 되리라고. 제2제국의 엘프들 역시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다. 그들 모두가, 훗날 이 우주의 끝에 다가올 종말을 알고 있었다.

열역학 제2 법칙에 따라 이 우주는 결국 얼음으로 끝나리란 것을.

아마도 우주 전체에 걸쳐 존재하는 온갖 지성체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주의 모두가 두려워하는 종말의 진실로부터, 겨울이 태어났다. 그러나 겨울은 결코 종말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가 죽음 그 자체보다 성가시듯, 종말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가짜. 데일의 말에 슈브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나도 웃겨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그것도 마도서를 통해 존재할 수밖에 없는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두려움이지.”

겨울은 웃지 않았다. 아니, 웃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달라질 것은 없었다. 데일은 그저 그의 눈에 비치는 진실을 보고 있을 따름이었으니까.

진실은 누구에게나 잔혹하다. 데일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찍이 자신을 이계의 용사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진짜 용사는 그날의 희고 어두운 겨울밤에 죽었으니까.

이곳에 있는 두 용사는 그저 그날의 망령에 불과했다.

─ 재미있구나, 어린 필멸자야.

겨울이 즐겁다는 듯 웃었다.

─ 이 별이 얼음으로 끝나고 나서도 그 소리를 지껄일 수 있나 궁금해지네.

그대로 팔을 뻗었다.

데일의 육체에 깃들어 있는 종말의 냉기가, 육체를 빠져나와 겨울의 몸으로 흘러들었다.

동시에 마도서 『절대영도의 서』를 가진 소유자, 세피아가 힘겹게 입술을 꿈틀거렸다.

“데, 일……!”

그 목소리에 비로소 평정을 가장하고 있는 데일에게 동요의 빛이 어렸다.

“주저하지 말고, 내 심장을……!”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동요는 잠시였다.

데일의 심장이 가속하며 어둠이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데일에게 ‘종말의 냉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을 준 당사자가 다시 그 힘을 빼앗았으니까.

그러나 여전히 데일에게는 태고의 어둠이 있었다.

─ 설령 네 말이 옳다고 가정해보자, 어린 필멸자야.

동시에 태고의 어둠을 흩뿌리고 있는 데일에 맞서, 종말의 냉기를 휘감고 있는 겨울이 있었다.

─ 이 우주에서 가장 오래되고 거대한 두려움에 맞서, 네깟 필멸자 따위가 감히 저항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거냐?

“필멸이라고?”

데일이 어처구니가 없어 되물었다.

“존재하는 전부에는 끝이 있다고, 네가 말하지 않았나?”

그리고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우주에서 가장 오래되고 거대한 두려움조차, 결국에는 필멸(必滅)의 운명을 가진 존재란 것을.”

겨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침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절대의 허무가 흩뿌려졌다.

완전하기 그지없는 소멸. 그의 말마따나, 겨울의 존재는 곧 우주에서 가장 강대한 두려움이었다.

감히 저항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사상의 종말.

──그리고 데일은 결코 그 존재를 이길 수 없었다.

어느덧 겨울이 흩뿌린 냉기가 데일의 존재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세피아의 모습이 지워졌고, 슈브가 지워졌고, 데일이 남겨진 곳은 얼음으로 끝나버린 세계의 위였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신을 차리자 텅 비어 있는 겨울의 대지 위를, 데일이 홀로 거닐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풍경이 그저 이상할 정도로 낯이 익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일찍이 불사공 프레데릭과 맞설 당시, 그가 보여준 종말의 거품들.

무엇 하나 예외 없이, 우주의 겨울을 맞아 얼음으로 끝나버린 세계들.

적어도 불사공 프레데릭은 그 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저 진실 속에서 내린 답이 달랐을 따름이지.

‘이 세계가 얼음으로 끝나고 다시금 어둠 속에 집어 삼켜질 때, 그 속에서 우리의 발버둥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죽음 앞에서 덧없어지지 않는 것 따위는 없다. 사람이 죽고, 별이 죽고, 종국에는 이 우주조차 죽음을 맞이하게 될 테니까.’

우주에서 가장 오래되고 거대하며, 강대한 힘을 가진 두려움.

아무리 데일이라 해도 힘을 통해 그 두려움과 맞설 수는 없다.

‘그러나 영겁의 삶 속에서, 불사공께서는 필시 즐거운 일도 슬프고 괴로운 일도 영영 끝나지 않겠지요. 아직도 세상의 끝이 그렇게나 덧없고 끔찍하기 그지없는 진실처럼 느껴지십니까?’

그저, 불사공 프레데릭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그리고 데일이 내린 해답을 떠올렸다.

떠올리고 나서는, 걷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우주의 겨울 위를, 그저 정처 없이.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 * *

얼마가 흘렀을까. 알 수 없었다. 억겁(億劫)일 수도 있었고, 실제로는 고작 며칠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이곳에서 시간의 흐름 같은 것은 아무 의미도 없었으니까.

그저, 여정 끝에 데일의 앞에 ‘겨울’이 있었다.

순백의 서리로 이루어져 있는 실루엣이, 아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앉아서.

“드디어 찾았네.”

데일이 말했고, 겨울이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 제발 죽여달라는 애걸이라도 하러 왔나?

데일이 고개를 저었다.

“네가 두렵지 않다고 말하러 왔다.”

─ 아직도 무모하기 그지없는 오기를 부리는구나.

“여전히 내 뜻은 같다. 너는 ‘끝’이 아니고, 그렇기에 너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지. 동시에……”

데일이 재차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네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흉측한 악마나 파멸의 마신이 아니란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 …….

“결말이 있기에 구제받을 수 있고, 슬프고 괴로운 일들이 끝날 수 있으니까. 네 존재는 모두의 두려움 속에서 태어나 손가락질받을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축복을 받을 존재여야 했다는 것을.”

몸을 웅크린 겨울이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 하루살이 따위가 감히 창세와 끝을 기억하는 나에게 훈계를 하려는 것이냐?

“못할 것도 없지. 나는 그저 너를 동정하는 거다.”

침묵 끝에 겨울이 말했고, 데일이 대답했다.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 시시하다.

웃고 나서 겨울이 말했다.

─ 너무 시시해서 상대해줄 가치조차 없구나. 흥미가 깨졌다. 꺼져버려라.

그것이 겨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데일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세계가 일전했다.

끝없이 펼쳐진 겨울의 대지가 스러지고, 다시금 데일이 기억하고 있는 세계가 되돌아왔다.

찰나의 꿈처럼 덧없게 느껴지는 나날들이었다.

종말과 두려움을 긍정하는 것. 역설적이게도, 그것이야말로 종말의 두려움을 부정하는 유일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세피아가 있었다.

용사와 여신이 죽고, 데일의 세계에 남겨진 엘프 마법사.

“세피아 님.”

“데일…….”

뭐라 말을 이으려다 말고, 세피아가 그녀의 가슴을 향해 팔을 뻗었다.

“심장의 냉기가…….”

“이제는 춥지 않을 거예요.”

“그래, 무척이나 따듯하구나.”

“적어도 내일 당장 세상이 얼어붙지는 않을 테니까요.”

세피아가 말없이 데일의 손을 마주 잡았다. 마주 잡은 손이 무척이나 따스했다.

전쟁의 끝이, 비로소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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