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51화 (251/301)

251화

* * *

두 명의 용사, 아버지와 딸, 적색 마녀와 수정 공주, 끝으로 죽음의 신과 핏빛의 사가(史家)가 격돌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기사, 그토록 동경해 마지않은 아버지를 향해 딸의 검이 내리꽂혔다.

푸욱!

칼날의 꽃잎이 흩날렸다. 피의 꽃이 피어올랐다.

살과 피와 뼈를 토양 삼아 뿌리 내리고, 찰나에 걸쳐 피어오르는 죽음의 꽃.

남자의 육골을 따라 혈화가 흐드러졌다.

“……!”

그 꽃에는 색이 깃들어 있었다. 희고 어두운 겨울밤 속에서, 잔혹할 정도로 아름답게 빛나는 꽃잎이었다.

그것은 격돌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싸움이었다. 아니, 애초에 싸움조차 아니었다. 그저 엇나가 있는 존재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에 불과했으니까.

겨울밤의 풍경이 점차 희미해진다.

그곳을 뒤덮는 것은 흑색과 적색의 꽃잎으로 물들어 있는 딸, 샬롯 오르하르트의 세계였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풍경이구나.”

흩날리는 꽃잎 속에 파묻혀, 아버지 신검 바델이 덤덤히 중얼거렸다.

비로소 몸을 누일 곳을 찾았다는 듯.

“랭커스터 가의 장미, 그리고 작센 가의 흑색이에요.”

“그것이 너의 세계를 물들이고 있는 색이구나.”

샬롯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 세계의 형태를 가르쳐준 것은, 아버지의 검이었어요.”

“……그 말을 들으니 기쁘구나.”

아버지의 말에 샬롯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그가 이곳에 있으며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그날 ‘용사’의 검에 쓰러졌을 때, 제국을 향해 얼룩진 증오가 나를 붙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남자를 마지막까지 속박하고 있는 것은 그저 알기 쉬운 부성애였다.

“이렇게라도 너와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럼 이렇게 검을 맞댈 필요 따위는 없었잖아요.”

침묵 끝에 샬롯이 비로소 흐느끼듯 웅얼거렸고, 바델이 고개를 저었다.

“천 마디의 말보다도, 네 검은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더구나.”

“그래도……!”

“처음부터 나는 이곳에 있을 수 없는 존재였다. 네 검이 바로 그 진실을 바로잡아주었다는 것이, 너무나 기쁘구나.”

꽃이 피고 지는 것은 찰나의 일이다. 살과 피와 뼈에 뿌리를 내리고 피어오르는 꽃 역시 다를 것은 없었다.

“쉬세요, 아버지.”

흐느낌을 억누르며 샬롯이 애써 미소 지었다. 대화는 길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를 쓰러뜨린 적수, 용사를 향하는 시린 증오가 샬롯의 심장을 옥죌 따름이었다.

* * *

휘몰아치는 불과 피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

레이디 스칼렛의 등 뒤로 솟아나 있는 박쥐의 날개 역시, 흩뿌려지는 냉기에 휘감기며 얼어붙었다.

쨍그랑!

날개가 찢어진 적색의 마녀가 그대로 지상을 향해 고꾸라졌다. 귀를 찢는 것 같은 비명과 함께.

수정의 동토를 따라 사방으로 피가 흩뿌려졌다. 블러드 엘프의 일족으로서 흩뿌리는 혈마법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의 출혈이었다.

─ 그 아이, 레이 유리스도 그랬었지. 어리석은 것들.

동시에 목소리가 들렸다.

세피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녀의 심장에 깃들어 있는 마도서…… 『절대영도의 서』가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겨울’이 그곳에 있었다.

─ 벌레들의 핏속에 흐르는 잔불 따위가, 얼음의 산맥을 녹일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 아아……!”

이 세상의 끝에 다가올 종말을 거느린 묵시록의 기수(旗手)가.

그 앞에서 이전까지의 여유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이, 창백하게 질린 마녀가 있었다.

─ 매일 같이 질리지도 않고, 귓가에서 윙윙대는 꼴이라니. 도저히 참아줄 수가 있어야지 말이야.

겨울이 질렸다는 듯 팔을 뻗었고, 냉기가 휘몰아쳤다. 아니, 그것은 냉기나 얼음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무엇이었다.

“……!”

일체의 거부를 허락하지 않는 절대의 무(無)가 있었다.

진정으로 ‘끝’이라고 형용할 수 있는 사상의 종말.

“왜 이렇게…… 춥지.”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세상의 끝에 다가올 풍경을 앞에 두고, 알기 쉬운 공포나 고통 같은 것은 없었다. 적어도 레이디 스칼렛에게는 그러했다. 감정이나 고통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으니까.

그러나 마도서의 소유주, 세피아는 그렇지 않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세피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것은 결코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으므로.

“어째, 서……!”

마도서에 깃들어 있는 힘을 제어하지 못하고 폭주를 일으키는 것. 마법사에게 있어서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고들이다.

그 사고의 대상이 우주의 겨울을 내포하고 있는 무엇이란 것은 둘째치고서.

─ 참으로 괴로워 보이는구나, 아이야.

세피아의 모습을 보며 겨울이 즐겁다는 듯 웃었다.

─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너희 필멸자들의 어리석음에는 이제 진절머리가 나니까.

희뿌옇게나마 사람의 실루엣을 이루고 있는 백색의 실루엣, 겨울이 말을 이었다.

─ 네 몸을 빌리는 것은 아주 잠시로 족하다. 이 별 하나를 얼려버리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닐 테니까.

어느덧 일대에 레이디 스칼렛이 흩뿌려진 불과 피의 세계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뒤였다.

또다시, 하나의 세계가 사라졌다.

─ 이 별의 멍청이들은 끝도 없이 같은 어리석음을 거듭하고, 모기처럼 내 귓가에서 앵앵대고 있지. 그때마다 나는 끝도 없이 기회를 주었다. 도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그 발버둥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을 거냐?

겨울이 질렸다는 듯 투덜거렸고, 그러나 세피아는 입술을 떼기조차 쉽지 않았다.

─ 이 세상은 얼음으로 끝나리란 진실을. 그리고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는 진리를.

겨울이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 * *

세계가 착실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 * *

아버지와 딸, 마녀와 공주.

그리고 ‘역사와 죽음’이 격돌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그것은 격돌조차 아니었다.

마도의 정점에 걸맞은 경외의 장이었다.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마도서 『피의 책』을 그의 육신에 새기며, 핏빛공이 입을 열었다.

“피와 죽음이라.”

역사의 수레바퀴는 오로지 피를 통해 굴러가는 것이다. 그리고 피가 흐를 때마다 그곳에는 죽음이 피어났다.

핏빛공이 펼치는 것은 피로써 돌아가는 역사의 수레바퀴였고, 그에 맞서 흑색공이 죽음의 장막을 펼쳤다.

까마귀 깃털이 흩날리며 죽음의 신이 비로소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마법사는 결코 서로를 해할 수 없었다.

“우리가 추구하는 사상의 끝이, 결국 이렇게 하나로 수렴하게 될 줄이야.”

“…….”

흑색공, 앨런이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그럼에도 그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과거의 죄업을 후회하고 뉘우쳐도 달라질 것은 없다. 흑적 교도대 하나의 일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과거, 작센의 앨런이라고 하는 남자는 작센의 옛 가주들과 다르지 않았다.

진리를 위해 일체의 과정을 정당화하는 괴물.

그렇기에 흑색공과 핏빛공, 두 마법사는 그들의 탐구를 위해 피와 죽음으로써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렸다.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서로를 닮았습니다. 그야말로 형제처럼 말이지요,”

핏빛공이 즐겁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피와 죽음을 떼어놓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어느덧 그가 펼치고 있는 세계는, 더 이상 전투를 수행하기 위한 결계의 형태조차 아니었다.

비명이 울려 퍼졌다. 피를 통해 굴러가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죄 없는 희생자들이 부르짖는 소리였다.

흑적 교도대의 실험실.

남자는 그곳에 있었다.

흑색 마탑의 정점에 서는 자로서, 제국의 어둠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남자가.

죄 없는 피험자들의 피를 적출할 때마다, 그곳에 죽음이 내려앉았다.

과다 출혈로 죽음을 앞둔 피험자들에게 새로운 혈액이 주입될 때마다, 죽음이 유예되었다.

피가 있는 곳에 죽음이 있었다. 그리고 남자는 흡사 명부의 왕처럼, 그곳에서 죽음을 다스리고 있었다.

흑적 교도대의 제2부대장으로서.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핏빛공이 말했다.

“그대가 함께할 경우, 그림자 군주를 설득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그의 입에서 아들 데일의 이름이 불리기 무섭게, 비로소 남자의 표정에서 동요가 사라졌다.

마치 꿈에서 깨어나듯이.

“그 무엇으로도 그날의 과오를 돌이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이 과오입니까? 우리에게는 좋은 목적이 있었습니다.”

기약조차 할 수 없는 훗날, 이 세상은 얼음으로 끝날 것이다. 바로 그 진실과 종말을 막기 위해 제국의 대의(大義)가 세워졌다.

“그런 식으로밖에 지킬 수 없는 세상 따위는, 차라리 망하게 두는 쪽이 나았다.”

흑색공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방금까지의 망설임이나 동요가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스칼렛……?”

핏빛공의 표정 역시, 차갑게 얼어붙었다.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일대에 휘몰아치는 세계가, 하나둘씩 무너지고 있었다.

* * *

용사의 검이 부러졌다.

부러진 검을 따라 나노머신이 모여 수복하려 했으나, 그보다 빠르게 그림자 군주의 어둠이 휘몰아쳤다.

휘몰아치는 어둠이 일대를 집어삼키고 ‘시스티나의 통제’ 속에 있는 나노머신을 빼앗기 시작했다.

양자에 버금가는 기계 입자 하나하나에 옛 어둠의 어머니, 슈브가 가진 태고의 어둠을 덧씌우며.

“끝이다.”

그림자 군주, 데일이 말했다. 비로소 두 사람의 전투에 종지부를 찍으며.

“이런, 시발.”

이계의 용사가 나직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그저 하나의 차이라고 할 경우, 데일은 결코 성검사처럼 용사의 등 뒤를 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데일의 손에 들린 피스메이커가, 용사의 가슴을 찢고 튀어나와 있었다.

용사가 무릎을 꿇었고, 그때처럼 피가 흘러내렸다.

또다시 집착과 망집을 품고 죽어가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데일이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때였다. 어느덧 용사의 등 뒤로 청색의 홀로그램이 모습을 드러냈다.

─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비와 자애의 여신, 시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아니, 입을 열려고 했다.

─ 아니, 다 끝났어.

쩌적.

실체가 있을 리 없는 시스티나의 홀로그램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 일기 예보를 보니까, 오늘부로 이 별이 꽁꽁 얼고 영겁의 빙하기가 올 예정이란다.

‘겨울’이 그곳에 있었다.

가짜 여신 따위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진짜 신, 결코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앙신(殃神)이.

그러나 데일이 경악하는 것은 결코 겨울 그 자체가 아니었다.

‘겨울’은 화신의 형태로 이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 매개체가 그곳에 있었으니까.

동생을 구하기 위해 옛 제국의 금기에 손을 대고, 절대영도의 마도서를 심장에 새겨넣은 세피아.

─ 이 좁쌀처럼 작은 별에 어쩜 이리도 머저리들이 많은지.

그녀를 뒤로하고, 겨울이 남의 일처럼 웃었다.

─ 어머니, 어머니께서 창조하신 무대의 막을 내릴 때가 되었습니다.

웃고 나서 겨울이 말했다.

태고의 어둠과 종말의 냉기. 이 세상의 시작과 끝.

그림자 군주가 가진 힘은 결국 그 존재의 사도로서 내려진, 대행자의 힘에 불과했다.

그리고 바로 그 시작과 끝의 존재들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겨울과 옛 어둠의 어머니.

─ 슈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일은 당황하지 않았다.

“아직 약속 이행 중이야.”

─ 응!

슈브에게 시스티나와 같은 자비와 자애는 없다. 그러나 여전히 데일은 믿고 있었다.

그녀는 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 인간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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