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50화 (250/301)

250화

* * *

그림자와 강철의 거신이 맞부딪쳤다.

지키지 못한 세계를 되돌리기 위해 신(神)을 자처하는 용사가 있었고, 그에 맞서 그림자 군주가 칠흑의 거체를 움직였다.

전생의 자기를 버리고, 기꺼이 작센의 데일로 남기를 결의하며.

진실은 늘 잔혹하다. 그것은 설령 진실의 군주를 자처하는 존재조차 예외일 수 없었다.

이계의 용사로 사육되며 이 세계에 흘린 피를 기억하고 있다. 지키지 못한 세계를 잊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무엇 하나 돌이킬 수 있는 것 따위는 없었다.

이 세계를 가득 메우고 있는 마나가 끝없이 증식하며 데일의 세계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때마다 데일 역시, 그림자 군주로서 어둠과 냉기를 흩뿌리며 맞섰다.

용사의 말마따나 대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 마나는, 세계를 수복하는 힘이자 동시에 멸망으로 몰아넣는 병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용사는 기꺼이 그 힘을 종말의 병기로 사용하려 하고 있었다.

자신이 지키지 못한 세계를 되찾기 위해서.

그렇게 놔둘 수 없었다. 설령 나노머신이 다시금 이 행성을 집어삼키고 과거의 풍경을 덧씌워도, 그것은 결국 거짓에 불과하니까.

아름다운 거짓 같은 것은 없다. 진실과 거짓은 미추(美醜)가 아니다.

전생의 세계는 멸망했다.

그것이 도망칠 수 없는 진실이었고, 그것이 다였다.

“돌이킬 수 있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없다.”

“아, 그러신가.”

용사가 웃었다. 강철로 이루어진 기갑 병기 속에서,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웃음 끝에 강철의 거신이 말을 잇는다.

“무엇을 바라고 있지?”

“평화.”

“……나 역시 같은 것을 바라고 있다.”

용사의 대답에, 데일이 말했다.

황금의 군주를 쓰러뜨리고 나서, 마지막 전쟁이 비로소 끝났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지금 이곳에서 두 사람은 같은 것을 바라고 있었다.

평화를 위한 전쟁을 시작할 때였다.

* * *

데일과 용사가 그들의 세계 속에서 격돌했고, 작센 자작성의 대회당에 남겨진 신검 바델이 고개를 들었다.

데일과 흑색공을 따라 뒤늦게 그곳에 도착한 여기사가 그곳에 있었다.

그녀에게는 여러 이름이 있었다. 랭커스터 여대공, 작센 공작의 아내, 그러나 남자에게 있어 그녀의 이름이란 오직 하나였다.

“샬롯 오르하르트.”

“…….”

얼굴조차 알지 못하는 딸.

얼굴조차 알지 못하는 아버지.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았다.

“훌륭하게 컸구나.”

신검 바델 경이 짐짓 덤덤하게 말했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을 고쳐 잡으며.

매화잎이 흩날렸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샬롯이 그토록 동경해 마지않은 신검의 검이란 사실을.

“어째서 제게 검을 겨누시는 거죠?”

그렇기에 샬롯이 되물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여기 있는 나는 진짜가 아니니까.”

신검 바델이 대답했다.

“고결함을 가진 이들이 승리하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이 육체를 내 망집(妄執)이 집어삼키고 나서도, 포기하지 않고 싸움을 계속해 왔다. 그러나 저 용사를 자처하는 자를 보고 깨달을 수 있었지.”

“무엇을 말이죠?”

“그날, 희고 어두운 겨울밤 속에서 진짜 나는 이미 죽었다는 것을.”

“…….”

샬롯이 나직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곳에 있는 나는, 처음부터 망령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의미를 모를 리가 없는 까닭에.

“그렇기에, 기꺼이 네 검으로 이 겨울밤의 망령을 베어다오.”

샬롯의 아버지, 신검 바델 오르하르트가 말했다.

동시에 두 부녀(父女)가 딛고 있는 세계가 일전했다.

희고 어두운 겨울밤이었다.

데일과 용사가 그러하듯, 이곳에 있는 남자 역시 그날의 겨울밤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니까.

꽃잎이 흩날리고 있었다. 색이 없는 꽃잎이었다.

흑백으로 가득 차 있는 세계 속에서, 신검 바델이 검을 고쳐 잡았다.

* * *

“어머나, 설마 여기서 세피아 양을 보게 될 줄이야.”

“……레이디 스칼렛.”

황금의 기수들은 전장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결코 도망친 것은 아니었다.

작센의 두 부자가 대미궁에서의 위협을 감지하고 그리로 향했듯, 그들 역시 같은 경로를 향하고 있었으니까.

작센 자작성의 대회당.

바로 그곳에서, 데일과 용사가 격돌하고 있었다.

바로 그곳에서, 샬롯과 바델 경이 격돌하고 있었다.

레이디 스칼렛과 세피아 역시, 그녀들의 세계 속에서 격돌하고 있었다.

핏빛의 도살장과 수정의 대지가 지평 너머로 끝없이 교차하며.

하나의 장소에,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세계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핏빛공.”

“아, 역시 이곳에 있었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불과 피의 군주, 핏빛공과 작센의 앨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피의 바다와 꼭두서니 빛 어스름이 깔린 저물녘의 대지가 맞물렸다.

“느껴지십니까? 하나의 장소를 두고 터질 듯 요동치고 있는 세계들이.”

하나의 장소에서 교차하고 있는 저마다의 세계. 그들 정도의 마법사들이 그것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마법사는 누구나 자신의 세계를 갖고 있고, 마법사의 수행이란 바로 그 세계를 완성하는 과정이다.”

핏빛공이 즐거운 듯 말을 이었다.

“마법사의 이상(理想)이란 바로 그 세계를 현실에 덮어씌우는 과정이지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최후의 최후까지 살아남아, 누구의 세계가 마지막으로 이 세계를 덧씌울지.”

“모두가 너의 짓이었나.”

앨런이 싸늘하게 되물었고, 핏빛공은 여느 때처럼 과장되기 그지없는 미소로 화답했다.

“역사란 곧 강자들이 자신의 세계를 끝없이 덧씌우고 덧씌우는 화폭입니다.”

자신의 육체에 피의 역사를 새겨넣고 있는 마법사가 말했다.

“패자의 세계는 사라지고, 승자의 세계가 그 자리에 덧씌워지지요. 그렇기에 저는 평생에 걸쳐, 역사의 도화지 위에 그려질 최후의 그림을 갈구했습니다. 설령 종말이란 이름의 풍파 속에서조차 빛바래지 않을, 거장의 작품을.”

역사는 세계와 세계의 투쟁이다.

그리고 그 끝없는 투쟁 끝에 새겨질 최후의 세계를, 핏빛공은 평생에 걸쳐 탐구했다.

그것이 바로 핏빛공이 추구하는 진리였다.

“진리의 세계 같은 것은 없다. 우리가 그날 진리에 닿았다고 믿은 그 세계 역시, 결국 네가 말하는 역사 속에 새겨지고 사라진 찰나의 풍경 중 하나였지.”

“설령 그렇다 해도 개의치 않습니다. 적어도 그 세계의 강대함 자체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니까요.”

핏빛공이 대답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우주란 이름의 도화지 위에 끝없이 새겨지고 사라진 세계를 탐구하며, 과거로부터 배우고 비로소 영겁의 미래에 닥치게 될 종말과 맞설 수 있지요.”

그 말을 듣고 앨런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역사에 대해 알고 있는 배움이 하나 있지.”

“아, 꼭 들어보고 싶네요.”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유일의 사실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것이다.”

흑색공이 말했다. 어느덧 그의 곁에서 ‘죽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우리의 세계는 영 이해가 일치하지 않는 것 같네요.”

그 모습을 보며 핏빛공이 싸늘하게 웃었다.

* * *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할 수밖에 없다.

샬롯 오르하르트에게 있어, 이곳은 하나의 알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이 세계를 파괴해야 했다.

겨울밤의 망령, 그녀의 아버지가 검을 쥐고 쇄도했다.

색이 없는 흑백의 세계에서, 겨울밤의 망령이 칼날의 꽃잎을 흩뿌렸다.

그러나 그에 맞서 샬롯 오르하르트가 펼치는 검의 꽃잎에는, 넋을 잃을 정도로 찬란하게 빛나는 보랏빛이 깃들어 있었다.

“강하구나.”

휘둘러지는 보랏빛의 꽃잎에 맞서, 신검 바델이 말했다. 샬롯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째서 제 검에 죽어야 하는 거예요?”

침묵 끝에 되물었다.

“진짜니 가짜니, 그런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죠?”

“……부디 이 아비를 용서하지 말아다오.”

“어째서 제가 아버지를 용서하지 말아야 하나요?”

샬롯이 애걸하듯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검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신검 바델 역시 마찬가지였다.

* * *

신검 바델과 마찬가지로, 그날의 겨울밤을 잊지 못하는 망령들이 격돌하고 있었다.

두 망령을 휘감고 있는 그림자와 강철의 거신(巨身)이 격돌 끝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발가벗겨진 두 망령이 그대로 격돌했다.

태고의 어둠 속에서 그림자 군주가 옛 애검 ‘피스메이커’를 뽑았고, 이계의 용사 역시 허공에 팔을 뻗었다.

마찬가지로 데일의 손에 들린 것과 똑같은 피스메이커가 찬란하게 빛을 흩뿌렸다.

두 자루의 검이 평화를 갈구하며 맞물리기 시작했다.

째깍.

동시에 두 자루의 피스메이커가 평화의 빛을 흩뿌렸고, 세계가 정지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었다. 지금의 데일이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저 나노머신이 일대 영역의 분자 구조에 침투해, 움직임을 정지시키는 것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데일은 주저하지 않고 그의 몸에 깃들어 있는 종말의 냉기를 흩뿌렸다. 시간을 멈추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대기 중의 나노머신, 마나다. 그렇기에 데일이 흩뿌린 냉기가 나노머신을 얼리고 기동을 정지시켰다.

이 세계의 끝에 이르러 우주를 집어삼키게 될 얼음.

“네 모습을 봐라.”

그 힘을 사용하는 데일을 보며, 용사가 조롱했다.

“역시 우리는 같아.”

“뭐가 같다는 거지?”

“이 세계를 지키겠다고 말하는 주제에, 이 세계의 끝에 다가올 냉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흩뿌리고 있지. 아이러니하지 않나?”

“…….”

데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진실이니 거짓이니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지금의 데일에게는 지켜야 할 세계가 있었다.

그리고 용사가 그러하듯, 그 세계를 지키기 위해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는 것은 마땅히 감수할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적어도 내일 당장 세상이 얼어붙지는 않을 테니까.

* * *

레이디 스칼렛이 박쥐 날개를 펼치며 하늘에서 지상을 향해 쇄도했다.

그에 맞서 세피아가 수정의 동토를 쪼개며 냉기의 조각을 흩뿌렸다.

세피아의 심장에 깃들어 있는 『절대영도의 서』가, 시린 냉기를 내뿜고 있었다.

휘몰아치는 냉기에 맞서 레이디 스칼렛이 펼친 핏빛의 도살장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아아, 추위 따위는 정말로 질색이에요.”

과거, 죽었어야 할 동생을 지키기 위해 세피아는 우주의 겨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절대영도의 금술. 그 냉기를 통해 동생의 심장을 얼음 속에 가둠으로써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고, 금기를 깨트린 대가로 수정의 대지에서 추방되었다.

엄밀히 말해 세피아의 심장에 깃들어 있는 것은 마도서조차 아니었다. 저주였다.

데일이 그의 몸속에 받아들이고 있는 종말의 냉기와 크게 다를 것도 없는 무엇.

“머지않아 이 세상이 불타게 될 날이 가까워졌답니다. 수정 여왕의 딸, 당신을 불태우는 것이 그 시작이지요.”

그렇게 말하는 레이디 스칼렛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