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49화 (249/301)

249화

* * *

작센 자작성의 풍경이 스러지고, 오로지 두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이계가 있었다.

희고 어두운 겨울밤.

바로 그곳에, 암혈의 갑주를 휘감고 있는 그림자 군주가 있었다.

인간을 사랑하는 옛 어둠의 어머니, 슈브와 함께.

그에 맞서 이계의 용사이자 최강의 괴수 사냥꾼, 또 하나의 자신이 그곳에 있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인조(人造)의 여신, 시스티나와 함께 황금의 군주를 자처하며.

“이게 마나의 정체였나?”

자신의 그림자를 마주하며 데일이 물었다.

“우리의 행성을 집어삼키고, 지금도 대기 중에 가득 퍼져 있는 나노머신의 군체들이지.”

“…….”

“시스티나는 억겁의 세월에 걸쳐 대기 중의 나노머신을 통제할 방법을 찾아냈고, 이윽고 대기 중의 나노머신과 감응해 무너진 대지를 수복하기 시작했다. 대기 중에 가득 차 있는 ‘마나’가, 의식을 가진 존재의 강력한 사념에 감응하며 특정 물질을 구축하는 힘이지.”

테라포밍, 행성 개조. 자비와 자애의 여신이란 것은 결코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마법이라고 부르는 힘의 진짜 형태.

고도로 발달해 있는 과학은 마법과 구별될 수 없다. 참으로 그 말대로였다.

“그렇게 나노머신과의 감응에 최적화되어 있는 마법의 종족, 엘프들이 태어났다. 엘프들은 그 힘을 통해 대지를 수풀과 나무로 뒤덮고, 죽은 대지에 생명을 불어넣었지. 가장 강대하다고 일컬어지는 제2제국이 그렇게 생겨났다.”

“잘됐네. 그래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데일이 남의 일처럼 되물었고, 용사가 말없이 그의 검을 고쳐 잡았다.

“이 대기를 가득 메우고 있는 마나는 무너진 세계를 수복하는 구제(救濟)의 힘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일찍이 그러했듯, 지상의 전부를 집어삼키고 세계를 멸망으로 몰아넣는 종말의 병기가 될 수도 있지.”

“…….”

“그럼에도 너는 힘을 얻기 위해, 기꺼이 세상을 멸망으로 몰아넣는 종말의 힘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날, 우주의 겨울에 도달하고 네가 손에 넣은 종말의 냉기, 그것이 그 증거다. 그리고 너의 행동이지.”

“제국을 쓰러뜨리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는 게 ‘우리’의 결정 아니었나?”

“우리의 고향을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는 것 역시 우리의 결정이었지.”

용사가 말했다.

“우리의 고향은 이미 멸망했다. 딛고 있는 대지가 같다고 해서, 이곳이 우리의 고향이 될 수는 없지.”

데일이 싸늘하게 일축했다. 그 말을 듣고 용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꼭 이 세계의 사람처럼 말하네.”

“…….”

“말하지 않았나, 우리의 진실을 증명하는 것은 오로지 행동이라고.”

이계의 용사가 말했다.

“우리의 고향은 멸망했다. 그것이 진실이지. 그러나 이 세계를, 대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 나노머신들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들이 이 대지를 집어삼키기 전의 세계를. 그리고 마나가 펼칠 수 있는 진짜 힘을 우리는 알고 있지.”

“설마…….”

“그게 내 행동이다.”

용사가 말했고, 그 말에 데일은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진실을 거부하고 마지막까지 그의 거짓을 관철하는 황금의 군주가 있었다.

“……이 빌어먹을 세계를 무너뜨리고, 우리가 진짜로 지켜야 할 세계를 되찾는 거지.”

“미친 새끼.”

그야말로 신세계의 신(神)이 되겠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나더러 세계의 멸망을 긍정하니 어쩌느니 하더니, 진짜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것은 네 쪽이었군.”

“말하지 않았나. 우리가 구하지 못한 세계를 구하겠다고.”

데일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놔둘 수는 없다.”

“그래, 너에게는 이 세계가 그렇게도 소중하겠지. 이제 어느 쪽이 ‘진짜 용사’일지 대충 감이 오지?”

“하나의 세계를 구하기 위해,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는 행위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나?”

“어차피 너는 이 세계의 멸망을 긍정하고 있지 않나? 그럼 피차 손해 볼 것 없는 거래지.”

“그렇다고 그게 내일 당장 세상이 무너지는 꼴을 손가락이나 빨며 구경하겠다는 뜻은 아니라서.”

그림자 군주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의 앞에 있는 것은 또 하나의 자신이다. 어떻게 또 하나의 자신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당장에 순백과 칠흑의 오렐리아가 그러했듯,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데일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데일을 마주하는 용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세계의 가족 놀이가 썩 마음에 들었나 보지?”

용사가 싸늘하게 조롱했다.

“솔직히 말해서 너나 나나, 어느 쪽이 진짜이고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나는 그날 희고 어두운 겨울밤에 죽었다. 그게 바로 엊그제의 일처럼 생생하지. 나에게 있어 우리가 죽은 그날은 바로 어제의 일이고, 이 세계의 진실을 깨달은 것은 오늘의 일이다. 내가 이 지옥 같은 세계를 부수고 우리의 세계를 되찾는 걸 망설여야 할 이유가 있나?”

작센 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성장하며 이곳에 이르렀다.

그러나 데일의 앞에 있는 용사는 그렇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그는 혼자였다.

“……너를 동정하고 있다. 나 역시, 우리가 겪은 고통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데일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나 결코 네 뜻대로 그렇게 놔둘 수는 없다.”

“처음부터 네놈의 양해 따위는 바라지 않았다.”

용사가 말했다.

“너에게 시스티나가 보여준 지구의 풍경은 이제 아득한 과거의 추억에 불과하겠지. 그러나 나에게 있어 그것은 불과 엊그제의 일처럼 생생하다. 내가 지키지 못하고 구하지 못한 사람들, 사랑하는 이들. 그것을 되찾기 위해 누구의 허락 따위도 필요하지 않다.”

“……설령 마나의 힘으로 우리의 옛 세계를 되찾는다고 해도, 그 전부가 결국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나?”

“그게 어쨌다는 거지?”

거짓의 군주가 말했다.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데일이 종말의 냉기를 흩뿌렸고, 그에 맞서 이계의 용사가 말없이 팔을 뻗었다.

─ 데이터베이스 등록 1등급 사용자, 한성의 나노머신 사상 감응률을 9700%로 증폭시킵니다.

동시에 인조의 여신 ‘시스티나’가 용사의 이름을 불렀고, 일대에 마나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데일의 앞에 있는 용사 한성은 이 세계의 그 어느 마법사보다도 ‘마나의 극의’를 이해하고 있는 존재임을.

이 대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 나노머신을 자유자재로 조작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현실을 조작할 수 있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말 그대로 신세계의 신처럼.

하늘을 그림자가 뒤덮었다. 철갑을 두르고 있는 용, 그러나 이곳에 있는 두 사람 모두 그 정체를 알고 있었다.

핵 전폭기(戰爆機)가 비행하며 두 사람이 딛고 있는 대지를 향해 폭격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전술 핵무기. 적색 마탑의 적마법사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종말의 불꽃이 희고 어두운 겨울밤의 세계를 집어삼켰다.

일대의 풍경이 스러지고 버섯구름이 솟아올랐으며, 이글거리는 열기와 재가 겨울밤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 폭격 속에서도 용사는 멀쩡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림자 군주, 데일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역시 이 정도로 죽일 수는 없나.”

그 모습을 보며 용사가 말했다. 데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팔을 뻗어, 그의 그림자 심장을 가속하며 태고의 어둠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마나도 없고 마력도 없고 오러도 없다. 그러나 여전히 데일에게는 ‘옛 어둠의 어머니’가 준 힘이 있었다.

태고의 어둠과 종말의 냉기, 시작과 끝의 사도로서 가진 힘.

데일이 가진 능력은 결코 이 세계를 뒤덮고 있는 나노머신 따위에서 비롯되는 과학의 산물이 아니었다.

저 하늘 너머, 사람의 지혜로 이해할 수 없는 천상의 존재들이 가진 힘.

진정으로 ‘마법’이라 부를 수 있는 영역의 것.

과학과 기술의 신에 맞서, 그림자 군주의 존재는 진정으로 유일의 마법사라 칭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태고의 어둠으로부터 피조물이 창조되었다.

그림자 피조물에 맞서, 용사 역시 나노머신을 움직여 그의 피조물을 조작했다.

괴수였다.

어둠으로 이루어진 괴수와 나노머신으로 이루어진 괴수가 충돌했다.

창조의 힘을 가진 자들의 싸움.

머지않아 슈브의 촉수들이 솟아나 데일의 육체를 휘감기 시작했다. 일찍이 아서 대제와 맞설 때 그랬듯, 끝없이 휘감기고 휘감기는 칠흑의 촉수가 점점 그림자 군주의 갑주를 거대화하고 있었다.

어느덧 신화 속에서 나올 것 같은 그림자 거신이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용사 역시, 그에 뒤지지 않는 거신(巨身)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사람의 형상을 가진 기갑 병기, 거대 메카닉이었다.

“어릴 때 이런 거대 로봇이 개발되기를 얼마나 기도했는지.”

“…….”

“이 로봇을 타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네. 그럼 그 괴수 놈들을 모조리 쓰러뜨릴 수 있었겠지.”

강철의 거신이 말했고, 그림자 거신이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그래, 아직 돌아갈 수 있어.”

“돌이킬 수 있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없다.”

침묵 끝에 그림자 군주가 싸늘하게 내뱉었다.

그저 칠흑의 촉수들이 끝없이 흩뿌려졌고, 그에 맞서 강철의 거신이 배후의 장갑(裝甲)을 개방했다.

칠흑의 촉수에 맞서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유도 미사일들이 내리꽂혔다.

동시에 강철의 거신이, 그의 팔을 따라 청색의 칼날을 생성했다. 플라즈마 커터였다.

데일 역시 알고 있었다. 그의 앞에 있는 저 강철의 거신이 가진 능력을 헤아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동심이 빚은 가공의 거대 로봇.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상상력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었다.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 무적의 로봇.

바로 그 무적의 로봇에 타고, 괴수들에 맞서 세상을 지키는 꿈을 꾸었다.

그것이 용사가 가진 사상의 궁극이었다. 설령 거대 로봇 따위가 실재하지 않아도 다를 것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비로소 그 이상이 이루어졌다.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강철의 거신이 플라즈마 커터를 휘둘렀고, 그림자 거신의 촉수로 이루어진 육체가 그대로 잘려나갔다. 흑색의 피가 흩뿌려졌고, 머지않아 다시금 칠흑의 촉수가 솟아나 용사의 로봇을 휘감았다.

헤아릴 수 없는 촉수가 강철의 거신을 포박하고 있었다.

“어째서 나를 가로막는 거지……?”

그대로, 용사가 입을 열었다.

“알지도 못하는 세계에 끌려와,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개처럼 부려졌다. 바로 이 세계가, 우리의 세계를 멸망시켰다. 너도 기억하고 있지 않나? 우리가 지켜야 할 세계, 우리가 지키지 못한 사람들을.”

“…….”

데일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네 말이 옳다.”

침묵 끝에, 데일이 입을 열었다.

“뭐가 맞는다는 거지?”

“우리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오로지 행동이란 것.”

“…….”

“내 진실은 오직 하나, 작센 가(家)의 가족과 이 세계에서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는 것이다.”

“그것이 너의 진실이냐?”

“그래.”

데일이 말했다. 비로소 자신의 그림자 속에 존재하는 진실을 긍정하며.

설령 전생의 기억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이 지금의 자신을 규정하는 토대라고 할지라도, 이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작센의 데일이니까.”

지키지 못한 세계와 과거의 주박을 뒤로하고, 가짜 용사이자 진실의 군주가 말했다.

여전히 지키지 못한 세계와 과거의 주박에 사로잡혀 있는 진짜 용사이자, 거짓의 군주에 맞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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