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 * *
마왕령 너머의 대지, 미궁도시 라비린토스. 작센 자작성이 있는 곳이자 대전쟁을 피해 엘레나와 리제가 피신해 있는 곳.
바로 그 대지가 요동치기 무섭게, 작센의 두 부자는 망설이지 않았다.
흑색공이 팔을 뻗었고, 딛고 있는 대지가 갈라졌다. 세상이 찢어지고 그 밑바닥에서 뼈로 이루어진 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타거라, 데일.”
“알겠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데일이 곧장 사룡의 위에 올라탔고, 용이 뼈밖에 없는 날개를 펼치며 비상하기 시작했다.
희고 어두운 밤하늘을 따라 용이 비상했고, 그 밑으로 펼쳐진 산맥과 마왕령 일대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설마 마왕령의 대미궁이……!”
“동요하지 말아라, 데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침착했다. 그야말로 작센 자작의 이름에 걸맞은 침착함을 갖고서.
“네 어미와 여동생 리제를, 무방비하게 작센 자작성에 데려다 놓은 것이 아니지 않으냐.”
“……그렇겠지요.”
그 말대로다. 당장 두 사람을 지켜주고 있는 엘프 마법사 세피아 역시 예외가 아니리라.
“황금의 군주를 쓰러뜨리고, 전쟁이 끝이 났습니다.”
데일이 덤덤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무엇 하나 끝났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황금의 군주가 사라진다고 해서, 황금을 향하는 필멸자들의 탐욕과 집착이 사라질 것 같다 생각하느냐?”
“…….”
“너는 그저 전쟁에서 승리하고, 이 대륙의 새로운 패자가 되었을 따름이다. 무엇 하나 달라질 것은 없지.”
아버지 작센 공작이 덤덤하게 말했다. 황금과 그림자 따위의 맹신에 휘둘리지 않고, 그저 여느 때처럼 데일을 이끌어주는 아버지의 지혜와 함께.
“사람들은 이제 황금의 군주가 아니라, 그림자 군주로서 너를 두려워하고 경외할 것이다. 일찍이 제국의 헤아릴 수 없는 이들이 황금의 군주 앞에서 경외하고 무릎을 조아렸듯이 말이다.”
“……제가 바라는 것은 제국이나 제위(帝位)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그럼 이 전쟁의 승리를 통해 무엇을 바라고자 하느냐?”
제국은 무너졌다. 무너진 제국의 폐허 위에서, 데일이 바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폐허 그 자체였다.
“작센 가의 가주로서, 너는 기꺼이 황금의 대제를 쓰러뜨리고 자신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 증명은 네가 바라고 바라지 않고를 떠나, 꼬리표처럼 네 존재를 옭아매겠지.”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데일이 되물었고, 앨런이 대답했다.
“승리자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가지거라.”
“…….”
앨런의 말에 데일이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하늘을 비상하고 있는 사룡이, 어느덧 미궁도시 라비린토스를 향해 빠르게 하강하기 시작했다.
요동과 별개로 멀리서 보이는 도시의 풍경 자체는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그대로 용 위에서 뛰어내린 데일이, 그림자 망령이 되어 질주했다.
──그리고 그 남자는 그곳에 있었다.
작센 자작성의 대회당에서, 마치 처음부터 데일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례하게도 영주를 위해 존재하는 옥좌 위에 앉아, 태평하게 데일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리고 남자를 보자마자, 데일이 그대로 숨을 삼켰다.
“어떻게…….”
“내 얼굴을 알고 있나? 천하의 그림자 군주가 사냥개의 얼굴을 기억해줄 줄이야.”
그리고 남자의 곁을 지키는 존재 역시,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충성과 신념의 군주, 일찍이 신검의 이름을 가진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기사가 그곳에 있었다.
이계의 용사와 신검 바델 경.
“너는 누구지?”
데일이 되물었다.
“여러 이름이 있었다. 이계의 용사, 제국의 사냥개, 피도 눈물도 없는 도살자…….”
이계의 용사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최강의 괴수 사냥꾼’이란 이름이었지.”
“아버지, 어머니와 리제를 데리고 이곳 마왕령을 벗어나 주십시오.”
용사를 보며 데일이 말했다. 그 말에 흑색공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여기는 자신이 끼어들 무대가 아니란 듯이.
멀어지는 흑색공을 뒤로하고 데일이 물었다.
“어째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지?”
“이곳 마왕령의 대미궁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곳에서 무엇을 봤지?”
“이 세계의 진실.”
“나 역시 진실을 알고 있다.”
데일이 대답했고, 용사가 웃었다.
“아니, 너는 아무것도 알지 못해.”
“그럴 리가.”
데일이 싸늘하게 대답하며 체내의 오러 하트를 폭발시켰다. 밤까마귀 기사의 갑주를 휘감고 있는 용사의 아바타가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흑색의 투구를 벗고 그 너머에 있는 얼굴을 드러냈다.
“그날, 죽음을 앞두고 ‘전생의 돌’이 무사히 기능을 수행했지. 용사의 의식은 그대로 작센 가의 장남에게 이식되었다. 바로 이 몸, 작센의 데일에게.”
“그래서 네가 진짜고 나는 가짜라고?
“그렇게 말하는 너야말로 자기를 진짜라고 주장하는 까닭이 있나?”
“무엇을 통해 존재의 진실과 거짓을 증명하고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나?”
데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행동이다.”
용사가 말했다. 일말의 주저도 없이.
“진실이란 오로지 행동으로써 증명되는 것이지.”
동시에, 그의 곁에서 청색의 홀로그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모습을 데일 역시 모를 리가 없으리라.
“노아……?”
데일이 말했고, 청색의 홀로그램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명령자입니다.
마찬가지로 용사의 아바타를 갖추고 있음에도, 그야말로 타자(他者)를 바라보는 것처럼 싸늘하게.
─ 그리고 저는 그 이름을 버렸습니다. 제 이름은……
노아가 말을 이으려 할 바로 그때였다.
데일의 심장을 움켜쥐고 있는 촉수가, 비로소 요동치기 시작했다.
─ 시스티나……!
옛 어둠의 어머니가 증오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에 데일이 그대로 숨을 삼켰다.
자매와 자애의 여신이 그곳에 있었다.
“우리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오로지 행동이다. 그리고 너의 행동이 무엇을 증명했지?”
“제국을 무너뜨리겠다는 우리의 사명을 증명했지.”
“우리라고 했나?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그 말에 용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폐허 위에서, 너는 그림자 군주로서 이 세계에 다가올 종말을 긍정했다. 마지막까지 종말에 맞서 싸우기를 포기하고 끝을 받아들였지. 그것이 너의 행동이고 너의 진실이지.”
“알지도 못하는 세계에 끌려와서 평생을 개처럼 부려 먹혔다. 정말로 그들이 주장하는, 기약조차 없는 억겁의 미래 뒤에나 찾아올 종말 따위를 일일이 신경 쓰고 있나?”
“알지도 못하는 세계에, 기약조차 없는 억겁의 미래라고?”
용사가 웃음을 터뜨린다.
“시스티나, 영상을 재생해줘.”
─ 기록 일지를 재생하겠습니다.
동시에 일대의 풍경이 덧씌워지기 시작했다. 마법이 아니었다. 무척이나 낯이 익은 전생의 기술, 홀로그램이다.
그리고 진짜 진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사라지고 나서 지구에 벌어진 일들, 그리고 억겁의 세월이 지나 ‘이 세계’에 벌어진 일들이.
대홍수와 방주, 자가복제를 거듭하는 나노머신에 의해 집어 삼켜진 세계.
나아가 방주의 생존자 무리를 통솔하는 황금의 군주, 아서 대제까지.
“여기는 알지도 못하는 세계가 아니고, 하물며 네가 말하는 종말은 더 이상 기약조차 할 수 없는 억겁의 미래가 아니다.”
용사가 말했다.
“이미 기약조차 할 수 없는 억겁의 세월이 지나버렸으니까.”
“…….”
“그리고 너는 여전히 그림자 군주로서, 너는 이 행성에 다가올 종말을 긍정하고 있지. 네가 가져올 그림자의 제국이 그 증거고.”
“어둠과 그림자는 결코 종말이 아니다. 꼭 내가 세상의 종말을 가져오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고 있군.”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도 하나 빠진 게 있네.”
그렇게 말하며 용사가 말했다.
“겨울이 오고 있다, 어디서 많이 들어봤지?”
데일의 육체에 깃들어 있는 태고의 어둠과 종말의 냉기. 그날, 우주의 겨울 속에서 그림자 군주는 힘을 위해 기꺼이 종말의 냉기를 받아들였다.
“이미 네 존재는 그 자체로 위험하다. 세상의 끝을 긍정하고, 동시에 그 끝에 다가올 힘을 휘두르고 있지.”
지금도 데일의 육체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은 세상의 끝을 가져오는 종말의 냉기였으니까.
“그림자 군주로서 너는 이 세계에 다가올 종말을 긍정했다. 그것이 너의 행동이지. 그렇기에 나 역시 행동해야겠지.”
“무엇을 하려는 거지?”
“우리가 끝내지 못한 사명을 끝마치는 것. 우리가 구하지 못한 세계를 구하는 것.”
이계의 용사가 말했다.
“나를 쓰러뜨린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을 것 같나?”
“저항을 포기하고 도망칠 수 없는 진실의 앞잡이가 되느니, 마지막까지 진실 앞에서 저항하는 게 나을 테니까.”
용사가 말했다. 그 말에 데일이 덤덤히 입술을 깨물었다.
희망이 없는 싸움, 이계의 침입자들 앞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결사(決死)의 의지.
그것이 전생의 자신이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그림자 군주는 더 이상 세상의 종말과 끝을 부정하지 않았다. 존재하는 것에는 끝이 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잔혹한 진실의 군주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전생의 세계에서, 희망 없는 싸움에 절망하고 저항을 포기한 이들처럼.
“…….”
그리고 데일의 앞에 있는 저 존재는, 마지막까지 싸우겠다고 결의하고 있었다.
또 하나의 ‘황금의 군주’가 그곳에 있었다.
탐욕과 집착 따위가 아니라, 그저 진실보다 아름다운 거짓을 위해 기꺼이 싸우기를 자처하는 자신이.
무엇이 옳을까. 아니,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데일이 말없이 용사의 애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일대에 휘몰아치는 마력을 정제하기 위해 서클을 가속하려 할 때였다.
“시스티나.”
용사가 입을 열었고, 홀로그램의 AI가 고개를 끄덕였다.
─ 일대 영역 내 나노머신 감응 프로토콜을 재암호화합니다.
그리고 인간을 사랑하는 인조(人造) 여신이, 비로소 그녀의 기적을 펼치기 시작했다.
“……!”
오러 하트에서 휘몰아치고 있는 오러가, 마력이, 일대의 마나가, 모조리 사라졌다.
육체에 깃들어 있는 초상의 힘이 소멸하고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보통의 육체가 그곳에 있었다.
“너는 정말로 아무것도 알지 못해.”
용사가 싸늘하게 중얼거리며 검을 뽑았다. 여전히 그의 주위에서는 오러와 마력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대기 중에 넘치고 있는 신비의 에너지. 그 정체를 이해하고 비로소 데일이 경악하며 숨을 삼켰다.
휘몰아치는 서클이 기동을 정지했다. 대기중의 마나가 호흡을 통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일의 육체를 휘감고 있는 『검은 산양의 서』는 여전히 태고의 어둠을 뿜어내고 있었다. 슈브의 촉수로 휘감겨 있는 서클이 기동했고, 그것은 그림자 심장과 그 심장을 휘감고 있는 생체 서클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마나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자 군주는 여전히 그의 힘을 갖고 있었다.
태고의 어둠과 종말의 냉기로 이루어져 있는 힘이었다.
“그것이 진짜 네 모습이다.”
오러를 사용할 수 없는 이상 용사의 아바타를 덧씌울 수는 없다. 지금, 데일은 그저 데일에 불과했다.
슈브의 촉수와 함께 암혈의 갑주가 휘감겼고,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