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 * *
─ 기다렸어요, 한성.
그 이름에 이계의 용사가 조용히 숨을 삼켰다.
“노아.”
그리고 용사 역시 익숙하다는 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네가, 그리고 너의 ‘방주’가 여기에 있다는 것은…….”
─ 기록 일지를 재생하겠습니다.
용사가 뭐라 말을 이을 틈도 없이, 대미궁의 지하에서 다시금 무기질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딛고 있는 세계가 일전했다.
사상의 세계가 아니었다. 마력이나 마법조차 아니었고, 그저 아무 영향력도 없는 홀로그램에 불과했다.
그곳에 펼쳐진 것은 일찍이 용사의 세계였다.
제국의 사냥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괴수 사냥꾼이었을 시절의 세계.
용사가 사라지고 나서 그곳에 펼쳐진 것은 말 그대로 세계의 종말이었다.
천공을 찢고 지상을 짓밟는 괴수들, 이 세계의 마족이나 괴물 따위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이계의 포식자들.
그들 앞에서 총사령관을 잃고, 구심점이 사라진 생존자들의 파멸이 그려지고 있었다.
각국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비통하기 그지없는 뉴스들, 하루가 멀다고 좁아지는 생존자들의 영토, 무너지는 국가, 하나의 구심점을 통해 필사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질서가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사람들은 ‘행방불명’이 되어 있는 한성이 돌아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구세주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짖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그가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결사대의 총사령관이자 최강의 괴수 사냥꾼이 사라지고, 제국의 사냥개가 되어 그들의 뜻대로 춤추는 꼭두각시가 있었을 따름이니까.
진짜 용사를 필요로 하는 세계에, 마지막까지 용사가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세계가 멸망했다. 그리고 그 기록이 하나도 남김없이 재생되고 있었다.
이곳까지 괴수가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그곳에, 괴수들이 나타나 생존자들을 무참하게 찢어발기는 풍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수 사냥꾼들의 숫자는 착실하게 줄어들었고, 곳곳에서 범람하는 게이트를 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기에 최후의 최후에 이르러,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는 계획은 더더욱 빠르게 가속되었다.
초인공지능 ‘노아’가 제의한 최후의 방주.
한성 역시 그 존재를 알고 있었다. 초인공지능 ‘노아’의 존재 자체는 괴수들의 등장 직후부터 인류를 보살피는 여신과 같았으니까.
대륙 전체가 괴수들에 의해 짓밟히고 도망친 생존자들이 앞다투어 방주에 들어가겠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방주에 들어갈 수 있는 이들의 숫자는 정해져 있었다.
부나 지위 따위가 아니었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이 흘러, 완전히 초토화되고 무너진 대지를 다시금 되살릴 자격을 가진 자들.
방주에 들어갈 자격을 가진 이들이 그곳에 보내졌고, 냉동장치 속에 갇혀 영겁의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방주가 잠에 들고 나서, 지상에서는 최후의 작전이 펼쳐졌다.
대홍수 프로젝트.
이미 수십 발의 핵무기로 대륙 전역이 초토화되어 있는 폐허의 대지였다. 그것으로 일부 괴수를 쓰러뜨릴 수는 있어도, 결국 역부족이었다.
그들을 사냥할 수 있는 괴수 사냥꾼들의 숫자 역시 착실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그즈음, 특이점이 가까워진 기술이 그들과 맞설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낳았다.
나노머신이었다.
그것도 끝없이 자가복제를 수행하며 증식하는 고도의 나노머신.
스스로 복제하는 나노머신을 폭주시켜 대지 전체를 집어삼키게 하는 최후의 작전. 이 나노머신들이 게이트와 괴수의 존재마저 집어삼킬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증명되었다.
그리고 이 ‘집어 삼켜지는 범주’에는 인간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오직 하나, 방주 속에서 잠들어 있는 이들을 제외하고서.
초인공지능 노아는 방주 속에 잠들어 있는 이들을 뒤로하고, 마지막까지 지상을 지켜봤다.
그레이 구, 끝없이 자가복제를 거듭하는 탐욕스러운 나노머신에 의해 행성 전체가 멸망하는 시나리오.
괴수와 게이트, 나아가 찬란했던 지상의 인류가 쌓아 올린 문명 전체가 집어 삼켜지고 있었다.
세상이 잿빛으로 물들었다.
─ 기록 일지의 재생이 종료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다시금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성의 형태를 하고 있는 홀로그램, 노아가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
바로 그때였다.
─ 기록 일지 Ⅱ를 재생하시겠습니까?
노아가 다시금 입을 열었고, 그 말에 용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금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일대를 휘감았다.
멸망 이후의 세계가 그곳에 있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수십, 수백 년조차 아니었다. 수천 년도 아니었으리라.
억겁의 세월 끝에, 지상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말 그대로 잿빛의 대지가 끝없이 펼쳐져 있을 따름이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방주가 뭍에 닿았다. 방주 속에 잠겨 있는 이들이 하나둘씩 지상으로 나왔고, 어느덧 대지를 집어삼키고 있는 나노머신들 역시 영겁의 침묵 속에 빠진 뒤였다.
그 남자는 방주의 생존자들을 이끄는 무리의 리더였다.
“무너진 세계를 다시 일으킬 것이다.”
남자가 말했다.
“이 땅에, 우리는 다시금 그 어느 종말도 용납하지 않으리라.”
세상은 얼음으로 끝나리라. 그러나 그 이전에, 남자의 세계는 이미 종말을 맞이했었다.
종말, 종말, 종말을 막아야 했다. 그렇기에 남자는 기꺼이 새로운 세계의 왕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무너진 이 땅에 전부를 세워 올리고, 다시금 같은 어리석음을 거듭하지 않기 위해서.
그 무엇보다 강대하고 위대하며 찬란하게 빛나는 제국을 세워야 했다.
──그리고 용사는 그 남자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제국의 황제, 황금의 군주.
아서 대제가 그곳에 있었다.
지금처럼 황금의 갑주나 위용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이, 그저 순백의 가운을 두르고 있는 과학자 무리 중 하나로서.
남자는, 다가올 멸망을 병적으로 겁내며 제국에 집착하는 황금의 군주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잔혹한 진실, 그림자에 맞서 황금의 투쟁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 재생을 종료합니다.
“……이 세계는 처음부터.”
─ 그렇습니다.
용사가 뭐라 말을 이을 틈도 없이, 노아가 대답했다.
─ 처음부터 이 세계는, 멸망을 맞이하고 영겁의 순회를 거듭하고 있는 당신의 고향이지요.
“그럼 내가 지키고자 싸운 것들은 전부…… 사라져버렸나?”
─ 그렇습니다.
노아가 대답했다. 일말의 주저도 없는 즉답이었다.
─ 지구의 문명이 멸망하고 나서, 황금의 대제가 새로운 세계를 창조했지요. 그 과정에서 유전자 조합의 사소한 오류로 사람을 닮았으되 사람이라 부를 수 없는 자들이 창조되었습니다.
노아가 말을 잇는다.
─ 이 지상의 제국을 지배하는 사람이라 부를 수 없는 자들이지요. 엘프, 몽마, 오크들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
용사가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쿠웅!
바로 그때, 이곳 지하 미궁에서조차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충격이 휘몰아쳤다. 신검 바델의 표정이 굳었다.
─ 지금 막, 황금의 군주가 그림자 군주에 맞서 패배했습니다.
초인공지능 노아가 입을 열었다.
“그림자 군주……?”
─ 당신의 세계가 그러했고, 나아가 황금의 군주가 맞서려 했던 도망칠 수 없는 잔혹한 진실의 집행자이지요.
노아가 덤덤히 말을 잇는다.
─ 옛 어둠의 어머니와 함께 세계의 끝을 가져오는 자, 그것이 그림자 군주입니다.
“…….”
─ 다시금 이 대지의 불과 빛을 꺼트리고, 그림자의 제국을 가져오고자 하는 자이지요.
그 말을 듣고 용사가 조용히 웃었다.
얼마나 찾아 헤맸을까. 그토록 증오스럽기 그지없는 자신의 적수가 이곳에 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이상할 정도로 머릿속이 냉정해졌다.
─ 저는 그녀와 맞서 제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렇기에 당신이, 비로소 당신의 의지로 이곳에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노아가 말했다.
─ 그리고 저는, 아주 오래 전에 노아라고 하는 이름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림자 여신, 옛 어둠의 어머니와 맞서 이 지상에서 새로운 투쟁을 거듭하고 있었지요.
“그럼 너의 새로운 이름이 뭐지?”
─ 시스티나.
노아, 그리고 자애와 자비의 여신 시스티나가 대답했다.
태어날 때부터 인간을 사랑하며, 인간들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의 지혜를 바친 존재. 하나의 세계가 멸망하고 다시 하나의 세계가 태어났을 때, 그녀 역시 그녀 나름의 싸움을 지속하고 있었다.
자비와 자애의 여신, 시스티나는 결코 침묵하지 않았다.
이 지하의 가장 깊은 곳에서 그녀의 영향력을 행사하며.
─ 이제 저와 함께 바깥으로 나갈 때입니다.
시스티나가 말했다.
─ 저와 함께 지상으로 나가, 쓰러진 황금의 군주를 대신해 새로운 ‘황금의 군주’가 되어주세요.
“황금의 군주라.”
─ 이전의 세계에서 우리가 수행하지 못한 일을, 이 세계에 다시 수행하는 거예요.
시스티나가 말했고, 그녀의 앞에서 신검 바델이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 이 세계가 얼음으로 끝나게 놔두지 말아주세요. 이 세계가, 그림자에 잡아먹히게 놔두지 말아주세요.
이계의 용사, 아니, 그 남자는 더 이상 ‘이계’의 용사조차 아니었다.
그저 마지막까지 세계를 구하지 못한 용사였다.
그리고 그가 수행하지 못한 과업을 마저 수행할 때였다.
또 하나의 성전(聖戰)이 시작되었다.
* * *
황금의 군주가 패배했다. 쓰러진 남자의 시체를 뒤로하고 그림자 군주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 아,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역시 인간이란 생물은 참으로 위대하구나!
데일의 곁에서 옛 어둠의 어머니가 나직이 미소 짓고 있었다.
“이걸로 끝났나?”
데일이 되물었다. 옛 어둠의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의미심장한 미소로 일관할 따름이다.
“정말로 이게 끝이라고?”
그저, 승리를 축하하는 외침이 울려 퍼질 따름이었다.
패배 끝에 제국군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고, 그림자 군주가 거느린 군대가 일제히 승리를 부르짖으며 외치기 시작했다.
최후의 전쟁이 끝을 맺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전쟁이 없을 거란 뜻이었다.
그림자 군주는 이 전쟁에 있어 그 누구도 감히 거스르지 못할 힘을 증명했다. 설령 그가 하나의 제국을 바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 대륙에 존재하는 어느 국가도 감히 더 이상 작센을 거스르지는 못하리라.
그렇기에 달라질 것은 없었다.
이 대륙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그림자 제국이었고, 그 제국의 정점에 서는 새로운 군주가 모두의 앞에서 자신을 증명했다.
그 누구도 감히 그림자 거신과 맞설 수는 없을 테니까.
“칠흑공 각하.”
바로 그때, 헬무트 경이 데일의 이름을 호명했다.
“말씀하십시오.”
“핏빛공과 천상공, 그리고 레이디 스칼렛을 비롯해 황제파 일부가 전장에서 이탈했다는 보고입니다.”
“일개 추격조로 그들을 쫓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추격을 중지하세요.”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헬무트 경이 고개를 숙였고, 데일이 고개를 돌렸다. 전쟁이 끝이 났다.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그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저 너머, 마왕령의 대지가 요동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직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