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45화 (245/301)

245화

* * *

하늘을 찢고 내려오는 칠흑의 촉수들이, 세계를 짓밟고 있었다.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과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그림자 군주가 걸음을 옮겼다.

대학살의 밤이 펼쳐졌다.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는 제국의 병정들을 향해 촉수가 휘몰아쳤고, 휘몰아칠 때마다 갑주가 뭉개지고 창자와 육골이 터져나가며 피와 뇌수가 흩뿌려졌다.

세계의 종말이 그곳에 있었다.

이계의 신들이 지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다크 영(Dark Young).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신이었고, 마치 개미 떼를 학살하는 아이처럼 잔혹하기 그지없는 순수로 가득 차 있는 신들이었다.

곳곳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촉수가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대지를 짓밟는 이계의 촉수, 그 촉수에 매달린 제국군들이 하나둘씩 천공의 틈새를 향해 빨려 들어갔다.

곳곳에서 병사들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혹은 광기로 미쳐버린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설령 지옥의 업화를 흩뿌리는 적마법사나, 중갑으로 무장하고 있는 기사들이라 할지라도 다르지 않았다.

갑주가 그대로 우그러지며 살점이 터지고, 뼈와 내장이 뒤틀리며 종잇장처럼 힘없이 찌부러졌다.

그나마 압사되어 죽는 것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개중에는 가느다란 촉수가 두개골을 찢고 뇌까지 파고들어, 뿌리를 내린 자들도 있었다. 이목구비로 울컥울컥 흑색의 피를 쏟아내며, 몸 전체가 수천 마리의 지렁이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부풀어 있다.

몸에 뚫려 있는 온갖 구멍에서, 콜타르처럼 검고 탁해진 암혈이 줄줄 쏟아져 나왔다.

어느덧 칠흑공의 앞을 가로막는 제국의 군대가 홍해처럼 덧없이 갈라졌고, 아무것도 없는 공백의 대지를 말없이 나아갔다.

휘몰아치는 화염이나 백색 마탑의 찬가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덤덤하게 나아갈 따름이다.

딱히 전열(戰列)을 돌파하겠다는 그럴싸한 전술이나 전략 따위가 아니라, 그저 맞서야 할 상대와 맞서기 위해.

적색 마탑의 몇몇 정화자들과 템플러가 그림자 군주를 노리고 쇄도했으나, 그들 역시 하늘에서 솟아나는 촉수의 먹잇감이 되어 승천할 따름이었다. 촉수에 뇌를 유린당하며 그림자의 꼭두각시가 되거나.

비로소 어느 누구도 데일의 앞을 가로막지 못하게 되었을 즈음.

그가 마주하고 있는 저 너머에,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의 갑주를 두르고 있는 남자였다.

제국의 정점에 서는 자, 황금과 거짓의 군주.

아서 대제.

마땅히 그를 지켜야 할 황실 친위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천공을 찢고 대지를 짓밟는 촉수의 지옥에서, 그들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다.

제국군의 부대 전체를 짓밟고 파쇄하는 이계의 폭력.

그 폭력 속에서 데일이 고개를 들었다.

“이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이제는 기억도 나지가 않네.”

황금의 군주를 앞에 두고, 그림자 군주가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어느덧 스멀스멀 휘감기는 촉수가 그림자 군주의 육신을 휘감으며, 암혈의 갑주로 거듭났다.

일찍이 불사공 프레데릭과 황금의 군주가 맞설 때를 기억하고 있다.

“또다시 이 어리석은 투쟁을 거듭하려는 것이냐.”

아서 대제가 입을 열었다. 사방에서 천공을 찢고 휘몰아치는 촉수 따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네놈을 쓰러뜨리는 것으로 이 지긋지긋한 싸움도 끝날 것이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그림자 군주여.”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라도 있나?”

“나를 죽여도 황금의 혈통은 끊어지지 않는다. 아니, 나의 죽음을 통해 비로소 황금의 제국은 이 대지에 빛을 흩뿌리겠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아무래도 좋았다.

“네놈의 헛소리를 들어줄 여유 따위는 없다.”

“진실을 뛰어넘고자 하는 거짓의 의지를 얕보지 마라.”

황금의 대제가 말했고, 동시에 그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검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금빛의 검이었다.

“아직도 진실이니 거짓이니 따위의 헛소리에 정신이 팔렸나?”

그 말을 듣고 데일이 차갑게 조롱했다.

“내가 진실을 하나 말해주지, 황금의 군주여.”

조롱 끝에 그의 검을 뽑아 들었다. 용사의 애검, 피스메이커.

“그날, 제국의 사냥개는 죽지 않았다. 기가 막히게도 죽지 않고 살아서 여기까지 왔지. 네놈들, 제국과 황금의 대제를 쓰러뜨리기 위해서. 바로 이날을 위해 내 전부를 바쳤고, 네놈을 쓰러뜨리는 것이 내 유일의 목적이다. 이게 진실이지.”

“그럼 나를 쓰러뜨리고 나서, 어쩔 셈이지? 이계의 용사, 그리고 그림자와 진실의 군주여.”

황금의 대제가 되물었다.

“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악신(惡神)의 충성스러운 꼭두각시를 자처하며, 훗날 이 대륙을 집어삼킬 우주의 겨울을 웃으며 맞이할 셈이었나? 이 세계가 얼음으로 끝나리라는 것이, 네놈에게는 일말의 감흥조차 없는 남의 일에 지나지 않나?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 세상을 팔아넘기는 것조차 주저하지 않았나?”

그 말을 듣고 데일이 웃음을 터뜨렸다. 불사공 프레데릭 역시 그렇게 말했었다. 진실과 거짓의 군주들은 하나같이 이 세계의 끝에 다가올 허무와 무의미를 역설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했다.

“그래서, 기약조차 할 수 없는 미래의 종말을 막기 위해 네놈들의 행위를 합리화할 수 있나?”

“그렇다.”

황금의 군주가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대답했다.

“기약조차 할 수 없는 미래에 이 대지가 맞이할 죽음을 저지하기 위해, 내가 가진 전부를 바쳤다. 통일 전쟁을 통해 흘린 피로 ‘진리의 세계’에서 해답을 찾고자 했다. 그마저 실패했지.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광기로 가득 차서.

“아직 우리에게는 시간이 있다. 그리고 그때가 찾아오기 전에, 이 제국에 남아 있는 그림자의 피라미를 모조리 쓸어버리고 제국 전체를 바쳐 해답을 찾아낼 것이다.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몇 차례고 피를 흘리는 것조차 개의치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제국이 존재하는 의미다.”

“이래서 문돌이 새끼들은.”

데일이 남의 일처럼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 이상의 대화 같은 것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피스메이커를 고쳐 잡고, 그림자 군주가 비로소 땅을 박찼다.

* * *

“후후, 악의에 불타고 있는 여자의 집념이란.”

레이디 스칼렛이 싸늘하게 조롱했고, 샬롯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매화의 기사가 말없이 땅을 박차며 칼날의 꽃잎을 흩뿌렸다.

휘몰아치는 칼날의 세례 속에서 레이디 스칼렛이 손가락을 튕겼고, 일대를 머금고 있는 피가 타올랐다.

지금도 저 하늘을 찢고 지상을 짓밟는 촉수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종말 속에서 유유히 미소 지으며.

“참으로 지옥 같은 풍경이지요. 그렇지 않으신가요, 레이디 샬롯?”

샬롯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하는 것은 기사의 역할이 아니니까. 그저 데일이 검을 자처하며, 그녀의 적과 맞설 따름이다.

“그림자 군주가 이 세상에 가져올 결말이란, 결국 이 세계를 악신들의 유흥거리로 팔아넘기는 짓에 불과하니까요.”

“……제국의 헛소리 따위를 들어줄 거라고 생각해?”

샬롯이 조소하며 되물었다.

“너희들이 내 가족과 나의 조국에 무슨 짓을 저질렀고, 랭커스터 대공에게 무엇을 저질렀는지.”

“그것이 이 세상에 그림자 군주가 가져올 지옥을 합리화할 수 있나요?”

“그림자 군주, 데일이 가져오는 것은 어디까지나 너희 제국의 업보야.”

샬롯이 말했다. 일말의 의심조차 없이.

“나의 주군이 가져오게 될 풍경이 무엇이라고 해도, 나는 데일의 곁을 지키는 검이니까.”

“아, 참으로 아름다운 지조네요.”

레이디 스칼렛이 키득거렸다. 동시에 다시금 칼날의 꽃잎이 휘몰아쳤고, 휘몰아치는 칼날 앞에서 피의 갑주가 레이디 스칼렛을 휘감았다.

“아무래도 샬롯 양과의 여흥은 이쯤에서 끝내야 할 것 같네요.”

“여기까지 와서 꼬리를 말고 도망칠 셈이야?”

“어머나, 그럴 리가요.”

핏빛의 갑주 속에 몸을 숨기며, 레이디 스칼렛이 웃었다. 그녀의 박쥐 날개를 활짝 펼치며.

“그저 무대의 막이 올랐으니, 엑스트라의 여흥은 여기까지랍니다.”

과장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레이디 스칼렛이 날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천지를 찢는 것 같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

황금의 용이 울부짖는 포효였다.

* * *

“때가 되었네요.”

핏빛공이 싸늘하게 웃었고, 앨런이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일대에 끝없이 펼쳐지는 역사와 죽음이 격돌을 거듭했고, 저마다의 세계를 거느린 두 마법사가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황금의 군주께서, 자신의 전부를 바쳐 황금의 피로 이 대륙을 적실 때가.”

“……무엇을 바라고 있나?”

앨런이 되물었다.

“저는 그저 충성스러운 황금의 기수에 불과하답니다.”

“그런 것치고 황금의 군주에게 썩 충성스러운 것 같지는 않군.”

“사람들은 때로, 군주가 그저 짊어진 것들의 대표자라는 사실을 망각하고는 하지요.”

핏빛공이 차갑게 웃었다.

“제가 충성하고 있는 것은 오직 우리의 군주께서 짊어지고 있는 황금, 그 자체입니다.”

“어느 세월에 다가올지조차 기약할 수 없는 종말 따위가, 그토록 중요했나?”

“찰나의 세월을 살아가는 하루살이 따위가, 불멸자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려 들지 마십시오.”

핏빛공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그 말에 앨런 역시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림자 군주, 나의 아들은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지도 모르겠지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고요.”

“아버지로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대의 앞을 가로막는 일이지.”

“아, 그 점에 대해서는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금 핏빛공의 육체를 따라 피의 글씨들이 춤추기 시작했다. 역사가 펼쳐지고 있었다.

제2제국의 생존자, 헤아릴 수 없는 억겁의 세월 속에서 이 대륙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고대의 사서.

블러드 엘프들의 수장, 핏빛공이 비로소 그의 ‘기억’을 덧씌우기 시작했다.

* * *

황금의 용이 포효하고 있었다.

천공을 찢고 휘몰아치는 촉수 다발을 찢어발기며, 흩뿌려지는 암혈조차 그의 황금을 더럽힐 수 없었다.

데일이 고개를 들어 그의 존재를 올려다보았다.

“슈브.”

─ 응.

데일이 나지막이 중얼거렸고, 슈브가 기다렸다는 듯 미소 지었다.

천공을 뒤덮고 있는 다크 영들의 촉수가, 일제히 휘감기기 시작했다.

누구도 아니고 데일의 육체를 향해서.

칠흑의 촉수가 휘감기고 또 휘감기며, 황금의 용에 맞먹을 정도의 《그림자 거인》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의 용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감히 형용할 수 없는 광기와 장엄함을 갖고서.

왕들의 정점에 서는 두 명의 왕, 그림자와 황금의 군주가 그들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며 격돌했다.

어느덧 작센의 대지 일대에 내려앉은 것은 침묵이었다.

그림자와 황금의 군주가 펼치는 가공할 전투 속에서, 그곳에 있는 일개 병졸들의 싸움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비로소 전투의 끝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 전투에 종지부를 찍는 것은 일개 병졸들의 몫이 아니었다.

황금과 그림자가 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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