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 * *
각지의 전선에 흩어져 있는 병력들이 집결하고, 비로소 침묵하고 있는 황금의 군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북부의 대제후, 작센 공작 가의 동토를 향해서.
통일 전쟁 당시의 그것에 버금가는 대군세였고, 그 군세에 헤아릴 수 없는 강자들이 함께하고 있다.
더 이상 지도를 내려다보며 서로의 체스 기물을 잡아먹는 싸움은 끝이 났다.
힘 대 힘, 강자와 강자들이 격돌하며 황금의 대제가 부르짖는 ‘힘의 정의’를 증명할 때였다.
그 시각, 작센 공작성의 일실.
“허허, 시펄. 아주 그냥 지랄도 이런 지랄이 없어요, 아주.”
작센 공작 직속의 암행대 《그레이브 워커》를 이끄는 살검, 마스터 바로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적색 마탑과 백색 마탑주, 나아가 두 마탑의 고위 마법사 전부가 참전하고 있다는 보고라오.”
움직이고 있는 적의 군세를 헤아리고 그 정보를 보고하자, 데일이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센 공작을 필두로 작센 가, 나아가 그에 협력하고 있는 제후파의 거두들이 모여 있었다.
황제가 진격하고 있는 경로가 그려진 지도를 내려다보며.
“두 마탑주가 있는 이상, 요새의 종심 방어 전략은 의미가 없을 겁니다.”
“하물며 그것이 적색 마탑의 정점에 서는 자이니, 말할 것도 없겠지요.”
작센의 검을 통솔하는 헬무트 블랙베어 경이 말했고,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성의 신이라 일컬어지는 그들 적색 마탑의 위력을 모르는 데일이 아니기에.
“어설프게 적 부대의 진격을 가로막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희생을 각오하고 회전으로 맞서야 할 겁니다.”
“전례 없는 규모의 대전투가 되겠네요.”
“우리 모두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습니다.”
데일의 말을 받는 것은 그의 아내, 동시에 천검 랭커스터 여대공의 이름을 가진 ‘작센의 샬롯’이었다.
“랭커스터와 장미십자 기사들은, 기꺼이 이 전투에서 피를 흘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겁니다.”
데일의 검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샬롯이 말했고, 데일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흘려도 함께 흘리는 피입니다. 누구 하나에게 희생을 떠넘기는 것은 좋은 결정이 아니지요.”
“어머나, 칠흑공의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상냥함이네요.”
그 말에 마찬가지로 그림자의 기수를 자처하는 요크 가의 수장, 미스트리스 티타니아가 웃었다.
나아가 그녀를 필두로 청색의 로브를 둘러쓰고 있는 마법사들이 있었다.
의식의 결속을 통해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명백하게 그들의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소서리스들.
일찍이 그림자를 위해 충성했고, 바로 그 전쟁의 기수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청색의 장로들이.
“양측의 강자들이 가진 저울추는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붙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겠지요.”
미스트리스 티타니아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감히 말하는데, 규격 외의 강자를 자청하는 이들의 숫자는 제국 측의 압도적 우세일 겁니다.”
꼭 그 이름을 대륙 전역에 떨칠 필요는 없다. 적색 마탑의 고위 정화자 부대, 백색 마탑의 백마법사와 마스터 템플러들.
“그러나 진정으로 규격 외 강자들 중에서도 ‘규격 외의 강자’를 꼽을 경우…… 그들의 숫자는 아마도 이쪽의 우세가 아닐까 하네요.”
“…….”
칠흑공과 흑색공, 일찍이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로 명성을 떨친 두 부자가 있었다. 나아가 데일이 거느린 칠검을 비롯해 압도적 강자들 사이의 저울추는 결코 뒤지지 않으리라.
무엇보다, 이곳은 작센 가의 영지였다.
설령 그 상대가 황금의 대제와 적흑의 마탑주라 할지라도 이기지 못할 싸움이 아니다.
“그리고 저는 그림자 군주의 지혜를 믿고 있답니다.”
“……영지 전체에 대피령을 내리십시오.”
미스트리스 티타니아의 말을 뒤로하고, 작센 공작이자 칠흑공이 입을 열었다.
“제국군을 우리 작센 공작 가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끌어들이고, 바로 그곳에서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일전을 치를 것입니다.”
“하, 하오나 공작 각하!”
그 말의 의미를 헤아린 헬무트 블랙베어 경이 일순 숨을 삼켰다.
“끄, 끌어들일 수 있는 가장 깊숙한 곳이라는 것은…….”
“바로 이곳이지요.”
데일이 일말의 주저도 없이 대답했다.
작센 공작성. 말 그대로 작센 공작 가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바로 이곳을, 데일이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적색 마탑이 함께하는 이상, 작센시를 요새로 삼아 싸울 생각은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이 도시 일대가 초토화될 테니까요. 그저 그들이 이곳까지 올 때까지 우리는 기다릴 것이고, 그들이 도착했을 때 앞서서 나가 그들을 맞이할 것입니다.”
양측의 세력이 가진 병력 전체가 맞붙는 유례 없는 규모의 대회전.
“황제의 말마따나, 이곳에서 저는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힘의 정의를 증명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그곳에서 패배할 경우, 다가올 후폭풍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것이냐?”
바로 그때, 침묵하고 있는 데일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설령 작센 공작성 앞에서 우리가 패배할 경우, 도망쳐 후일을 기약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말 그대로 전투 하나에 이 전쟁의 승패 그 자체가 결정되겠지.”
“그럴 것입니다. 이 전투에서 패배했다가는 말 그대로 전부를 잃게 되겠지요.”
데일이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살아서 도망칠 수 있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의미 없는 저항을 계속하며 목숨을 이어나갈 따름이지요.”
“……그야말로 배수진이구나.”
“죽을 각오로 싸우지 않고서는 이길 수 없는 상대입니다.”
“그래, 네 말이 옳겠지.”
데일의 말에 앨런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전쟁은 하루아침에 시작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피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 * *
그 끝을 알 수 없는 군세가 순백의 대지 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일찍이 통일 전쟁을 시작했을 때조차, 이 정도 규모의 병력이 하나의 부대를 이루지는 않았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이 갖는 의미는 그때와 비교를 불허하는 것이었다.
황금과 그림자, 고대부터 이어진 맹신과 대립에 또 하나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세상은 어둠으로부터 태어났다.
그리고 어둠이 최초로 이 세상에 낳은 것은 황금이었다.
황금의 군주, 아서 대제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머니’의 모습을 뒤로하고,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어둠을 바라보며.
희고 어두운 겨울밤의 지평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척후병들이 말하길, 작센 공작성으로 이어지는 요새 전부가 비어 있다는 보고입니다.”
바로 그때, 사라진 제1황자를 대신해 철십자 기사들의 수장을 맡고 있는 귀검 세필리아가 보고를 올렸다.
“공작성 앞에서 배수진을 치고 맞설 셈이겠지요.”
그 말을 듣고 핏빛공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어차피 어느 쪽이나 이 전투에서 패배하고 다음을 기약할 가능성 따위는 없습니다. 어느 의미에서는 합리적 결정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
핏빛공의 말에 세필리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두 황자가 사라졌다. 그것도 철십자 기사의 수장, 나아가 첫째와 둘째를 가리는 두 황자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는, 나아가 황금의 군주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있다.
그 사태의 중대함을 모를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필리아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생각하는 것은 기사의 역할이 아니었다.
그저 마지막까지 주군을 위해 싸울 따름이다.
그러나 그녀가 목숨을 바쳐 충성해야 할 진짜 주군, 호수의 검 랜슬롯이 없는 이상…… 그녀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 검을 휘둘러야 하는 것일까?
* * *
폭풍전야의 고요 속에서, 데일이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공작성의 유리창 너머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병사들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데일.”
바로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덧 샤워를 마친 샬롯이 나이트가운 차림으로 그곳에 있었다.
물기에 젖은 금발이 아스라하게 흘러내렸다.
“진짜로 얼마 남지 않았구나.”
데일이 보고 있는 유리창 곁으로 다가서며, 샬롯이 말했다.
“전투가?”
“아니.”
샬롯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잇는다.
“그날, 우리가 약속한 일들.”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약속, 함께 제국을 무너뜨리자는 맹약. 당시의 샬롯은 진지했다. 데일 역시 진지했으리라. 동시에 훗날 샬롯이 커가며 세상의 무게를 실감하고 나서, 그 약속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바로 지금, 그 어린아이는 각각 작센 공작과 랭커스터 여대공으로 거듭나 있었다. 제국 제일의 대제후로서, 이제는 제국에 맞서 서로의 존망이 걸린 전투를 앞두고 있다.
“실감이 나질 않아.”
“그러게.”
샬롯의 말에 데일이 웃었다.
“샬롯, 하나 약속해줄 수 있을까?”
“말해봐.”
“죽지 마.”
“……옛날에, 오크들하고 싸울 때도 그렇게 말했지. 여기는 네가 죽을 전장이 아니라고.”
데일의 말을 듣고 샬롯이 대답했다.
“그러나 달라. 이곳은 내가 죽을 전장이야. 주군을 위해 내 목숨 전부를 걸고, 죽을 각오를 위해 싸워야 하는 전장.”
샬롯의 말에 데일이 침묵을 지켰다. 침묵 끝에 데일이 해줄 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였다.
“죽으라고 진짜 죽지는 말고.”
“뭐야, 정말로!”
그 말을 듣고 샬롯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데일은 웃지 않았다.
* * *
“어머니, 리제.”
“오라버니!”
이튿날. 여동생 리제가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고, 어머니 엘레나가 당혹스러운 듯 동생을 달래주고 있었다.
“오라버니, 어째서 제가 떠나야 하는 거예요!”
리제의 울음은 그러나 결코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었다.
“저도 오라버니와 함께 이곳 공작성에 남고 싶어요!”
“리제…….”
전쟁이 벌어지기에 앞서, 두 모녀가 마왕령 쪽의 작센 자작성으로 몸을 피하는 것.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내리는 결정이야. 그리고 세피아 님께서 곁을 지켜줄 거고.”
데일이 말했다. 세피아는 말없이 침묵을 지켰고, 리제가 애써 울음을 참고 히끅거렸다.
“나와 아버지는 절대로 패배하지 않아. 그래도 리제가 공작성에 남아 있을 경우, 걱정돼서 제대로 싸울 수 없을 거야.”
“저는…….”
리제가 뭐라 입을 열려다 말고, 이내 고개를 내렸다. 어머니 엘레나가 말없이 리제를 끌어당기며 포옹했다.
“어머니와 리제를 부탁합니다, 세피아 님.”
“맡겨다오, 데일.”
세피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하는 세피아 역시, 리제와 마찬가지로 동요를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나 역시, 함께 싸우지 않아도 되는 것이냐?”
“세피아 님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는 중책이에요.”
데일이 말했다. 실제로 틀린 말도 아니었다. 어느 누가 어머니와 여동생을, 이런 전시(戰時)에 믿고 맡기겠나.
“그래.”
세피아 역시 그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다.
“부디 꼭 살아남아다오.”
그렇기에 그녀로서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옛 제자의 무사를 기도하는 일이었다.
* * *
지평의 끝에서 끝을 가득 메우는 군세가 그곳에 있었다.
희고 어두운 겨울밤 속에서, 비로소 제국의 마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에 맞서는 것은, 마찬가지로 지평의 끝에서 끝을 메우는 작센 가와 제후들의 병력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대한 두 부대가 대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치는 길지 않았다.
힘의 증명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