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 * *
제국 의회에서의 일이 대륙 전체로 퍼져나가는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앞서, 랭커스터 대공령에 하나의 세력이 집결해 있었다.
의회에서 당시 ‘칠흑공’의 뒤를 따라 제국의 힘을 의심하고 맞서기로 결의한 자들.
랭커스터 공작성의 그레이트 홀.
그림자 진영의 수장으로서, 데일이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옥좌에 앉아 있는 랭커스터 여대공, 샬롯의 곁에서. 어느덧 제국 제일의 대제후로서 그 자리를 손에 넣고 있는 부부.
나아가 그곳에 모여 있는 그림자의 기수들과 더불어, 요동치는 힘의 질서 속에서 제국을 이탈하기로 결의하는 자들까지.
냉정하게 자신이 가진 체스 말을 계산하고, 데일이 덤덤히 고개를 들었다.
“이곳에 계시는 공들께서는, 그날 통일 전쟁 당시 제국이 보여준 힘을 똑똑히 기억하실 테지요.”
공식적으로 작센의 데일은 대륙의 통일 전쟁이 끝나고 나서 태어났다. 그러나 데일은 결코 그 전쟁의 외부자가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도 제국의 최전선에서, 기꺼이 그들의 야망을 집행하는 기수였으니까.
“그 힘을 알고 있음에도, 기꺼이 저와 함께 해주신 공들의 용기에 깊은 감사를 표하겠습니다.”
데일이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우리의 목표는 오직 하나입니다.”
제국을 무너뜨리는 것.
“그 후, 무너진 제국의 폐허 위에서 그대들이 내릴 결정에 대해 저는 결코 개입하지 않을 겁니다.”
데일이 덤덤하게 말했고, 다시금 제후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불과 빛의 제국을 무너뜨리고 그림자의 제국을 세우는 것. 그러나 그 제국은 결코 ‘데일의 제국’이 아니었다.
“우리의 전쟁은 오로지 평화를 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행해야 할 일은 무척이나 명확했다.
손에 들려 있는 체스 말을 뒤로하고, 비로소 게임을 시작할 때였다.
* * *
그날 밤.
“다시 이렇게 보게 됐네.”
랭커스터 여대공, 동시에 작센의 샬롯이 미소 지으며 웃었다. 두 부부를 위한 침실에서.
“그래.”
“네가 새로운 작센 공작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엄청 놀랐어.”
“글쎄, 천하의 랭커스터 여대공이 할 말 같지는 않네.”
“바보.”
샬롯이 웃음을 터뜨리고 나서, 덤덤히 말을 이었다.
“내가 너의 검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줘.”
천검의 무위를 가진 여기사. 지금의 샬롯은 더 이상 데일이 일방적으로 지켜주어야 할 레이디가 아니었다.
“다가올 전쟁에서도 달라질 것은 없어.”
“…….”
그 말에, 데일이 일순 침묵을 지켰다.
“우리 모두, 결국 이날이 오게 될 거라고 각오하고 있었어. 그렇지?”
샬롯이 짐짐 덤덤하게 말했고, 데일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벌어질 수밖에 없는 전쟁이다. 그리고 불사공 프레데릭을 쓰러뜨리고 진정으로 그림자 군주의 이름을 계승했을 때, 전쟁은 이미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 남자, 성검사가 죽어도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았어.”
“그 남자는 마지막까지 장기 말에 불과했으니까.”
“내 아버지와 조국을 쓰러뜨린 제국이 사라질 때까지, 아마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을 거야.”
샬롯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랭커스터 대공 각하를 위해서라도…….”
두 명의 아버지를 제국의 손에 잃었다. 그렇기에 샬롯은 주저하지 않았다. 데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목숨을 바치라고 말하지는 않을게.”
그렇기에 데일이 입을 열었다. 샬롯의 금빛 머리카락 사이로 슬며시 팔을 뻗으며. 데일의 손길에 샬롯이 일순 숨을 삼켰다.
“내 검이 되어 함께 싸워줘.”
“응, 기꺼이.”
샬롯이 미소 지으며 웃었다. 데일 역시 조용히 미소 지었다. 바로 그때, 샬롯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는 데일의 손을 마주 잡았다. 느껴지는 온기를 뒤로하고, 샬롯이 고개를 가까이했다.
입맞춤 소리가 아스라하게 울려 퍼졌다.
* * *
황제파와 제후파, 황금과 그림자. 나눠진 두 세력을 지칭하는 여러 이름을 뒤로하고 대륙 전체에 걸쳐 전쟁의 준비가 시작되었다.
저마다 영지 내의 기사령에 있는 기사들을 소집하고, 병사들을 징집하고, 용병들을 고용하며 저마다의 군세들이 곳곳에서 결집하기 시작했다.
작센 공작령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공작성의 옥좌에 앉아, 칠흑공이 고개를 들었다.
헤아릴 수 없는 북부의 귀족들이 결집하며 작센 공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하나같이 풀 플레이트 아머로 무장을 마치고, 당장이라도 전쟁터에 나갈 채비를 맞춘 채였다.
“공작령 내 기사령의 소집이 모두 끝났습니다, 공작 각하!”
나아가 밤까마귀 기사들의 수장, 헬무트 블랙베어 경이 무릎을 꿇고 외쳤다. 그 말을 듣고서 데일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작센 공작 가가 자랑하는 군세의 대표자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기꺼이 그들의 주군을 위해 충성을 바치리라 맹세하며, 죽음을 상징하는 흉조(凶鳥) 밤까마귀를 기꺼이 그들의 상징으로 삼는 이들.
나아가 일찍이 작센 공작의 이름을 가진 남자 역시, 그곳에 있었다. 이제는 작센 공작의 옥좌 바로 곁에.
그날, 남자는 데일에게 패배하고 그가 짊어져야 할 많은 것을 넘겨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자가 짊어져야 할 것들이 전부 사라졌다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그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들을 짊어지고 있었다.
아들을 위하는 아버지로서, 나아가 여전히 작센과 흑색 마탑의 정신적 지주로서, 작센의 앨런이 말없이 데일을 바라보았다.
“때가 되었구나.”
“네, 아버지.”
앨런의 말에 데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직후, 두 부자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일찍이 흑색공을 위해 존재하는 공작성 지하의 공방을 향해서.
데일과 앨런이 바로 그 지하의 어둠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몇 차례고 준비를 거듭했고 비로소 그때가 다가왔기에.
작센의 직계 혈족이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결계를 지나자, 마치 핵 방공호를 떠올리게 하는 지하 공동이 그곳에 펼쳐졌다.
공동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불사의 군세였다.
작센 가를 상징하는 밤까마귀 기사의 갑주로 무장하고, 살점 하나까지 모조리 썩어 뼈밖에 남지 않은 불사의 병사들.
데스 오더, 죽은 기사들의 수도회.
“이들을 통제하는 방법에 대해, 이제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겠지.”
아버지의 말에 데일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앞에 있는 이 죽음의 병정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그것은 지금의 데일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핏빛공과 흑색공, 나아가 데일이나 천상공을 비롯해 ‘규격 외의 강자’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전장에 있어 비교를 불허하는 절댓값의 무기로서, 그들이 끼치게 될 영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데일이다.
이곳에 있는 데스 오더가, 그들의 힘을 압도하거나 봉쇄할 수준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조차 사람이다.
나아가 대륙 전체를 전선(戰線)으로 삼는 대전쟁에서, 사람 하나가 움직일 수 있는 거리는 정해져 있다. 설령 그것이 천하의 핏빛공이나 천상공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아니다.
흑마법사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지금의 데일이나 흑색공에게 시체 없이 사상으로 죽음의 군세를 쌓아 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사상으로 쌓아 올린 군세는 어디까지나 ‘마법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내에서밖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불사의 병정들은 그렇지 않다.
술사와 아무리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독립적으로 술사의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불사의 군세.
하물며 청색의 거미줄을 펼치고 대륙 곳곳에 그의 눈과 귀를 가진 데일이다.
그렇기에 작금의 상황 속에서 이들 데스 오더가 갖는 전략적 가치는, 결코 그들에 뒤떨어지지 않으리라.
작센의 가주들은 동시에 대륙 제일의 사령술사이며, 나아가 사령술사는 군세 그 자체를 움직이는 자들이다.
규격 외의 강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장에서 병사의 숫자가 갖는 가치를 이해하고 있었다.
데일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기억하거라, 데일.”
바로 그때, 작센의 앨런이 입을 열었다.
“이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결코 너 하나의 몫이 아님을.”
여느 때의 흑색공을 보듯 냉정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고, 남자의 말에 데일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 * *
하나의 제국이 둘로 찢어졌다.
그리고 대륙 전체에 걸쳐 초유의 대전선(大戰線)이 형성되었고, 전선을 따라 양측의 군세들이 속속 집결하기 시작했다.
설령 전쟁이 하루아침에 시작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세월아 네월아 기다려주는 것도 아니다.
최초의 전투는 두 세력이 맞물린 전선 중 하나에서 시작되었고, 곧이어 동시다발적으로 대륙 각지에서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투 하나하나는 결코 전황 자체를 좌지우지하지 않는, 어느 의미에서는 사소하다고 할 수 있는 충돌이었다.
신경전 내지는 전초전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제국에 충성하는 어느 황제파 귀족과 그의 기사들이, 이동 도중 칠흑공이 거느린 제후파 귀족 부대와 우발적 충돌을 일으켰다. 마법사들의 참전조차 없었다.
순수하게 검과 검이 맞서는 냉병기의 전투.
철과 철이 울려 퍼졌고, 강철이 살점과 맞부딪쳤다. 피와 내장이 흘러내렸다.
상대를 포로로 잡아 몸값을 받겠다거나 하는 일말의 예절조차 없이, 협상이나 항복의 여지 따위가 없는 처절하기 그지없는 사투였다.
“죽여라, 모두 죽여라!”
“황제 폐하와 제국을 위하여!”
머지않아 전쟁터를 가득 메우는 것은 시체의 산과 피의 바다였다.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피였다.
* * *
그로부터 머지않아, 전선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격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황제파의 기수를 자처하는 것은 일찍이 제국의 제1황자로 이름을 떨친 랜슬롯이었다.
철십자 기사들의 수장이자 호수의 검.
동시에 신검 바델 경의 오러 하트와 육체를 이식받고,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기사와 하나로 거듭나 있는 존재.
그야말로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적들의 시체를 뒤로하고, 제1황자 랜슬롯이 검을 고쳐 잡았다.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대전선이라 해도 결국 요충지는 정해져 있다. 그리고 이 전쟁의 핵심은 바로 그 요충지를 놓고 벌어지는 기동전이 될 것이다.
그중에서도 제1황자 랜슬롯과 그의 철십자 기사들이 수행하는 임무는 다음과 같았다.
이대로 전선을 돌파해 랭커스터 대공령을 장악할 것.
제국 제일의 대제후이자, 대륙을 통틀어 가장 비옥하고 풍족한 영지를 가졌다 일컬어지는 대공의 영지.
제1황자와 그의 기사들이 이끄는 파죽지세의 진격은 도무지 멈출 줄을 몰랐다.
‘기다리거라, 나의 딸아.’
동시에 말의 고삐를 당기며 랜슬롯이자 신검 바델 경이 생각했다.
그곳 랭커스터 대공령을 지배하고 있는 자신의 딸, 샬롯 오르하르트의 모습을 떠올리며.
랜슬롯과 함께하고 있는 제2황자, 갤러해드가 고삐를 멈춘 것은 그와 동시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