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 * *
천지가 요동치는 것 같은 용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포효를 내뿜고 있는 자는 여전히 사람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
제국의 정점에 서는 자, 아서 대제의 포효에 의회장 곳곳에서 공포와 경악이 울려 퍼졌다.
“좋다, 작센의 애송아! 기꺼이 네놈의 도전을 받아들이마!”
황금의 군주가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높였다.
“제국의 황제로서, 제후들 모두에게 고하노라! ──전쟁을 시작할 것이다! 짐과 제국을 의심하는 이들 전부를 쓸어버리고 잿더미로 불태울 대전쟁을 시작할 것이다!”
그저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려야 할 것 같은 압박감.
“그렇기에 신중하게 결정하라! 신중하게 의심하라! 짐과 제국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 그리고 짐은 기꺼이 그대들의 의심을 증명해줄 것이니라!”
제국 전체의 제후들이 모여 있는 바로 이곳에서, 비로소 전쟁을 알리는 막이 올랐다.
“무기를 들어라, 그리고 그날을 기억하라. 짐의 제국과 군대가 이 대륙의 영토를 짓밟고 불태운 통일 전쟁을 기억하라!”
황제 휘하에 있는 열세 명의 황자와 황녀들이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의회의 의장이자 핏빛공 유리스 후작이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황제의 위압감에 압도되며 의회에 모여 있는 제후들이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평정을 지키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의 남자, 랭커스터 여대공, 요크 후작 가의 미스트리스 티타니아, 그 외에도 헤아릴 수 없는 그림자의 기수들이.
그리고 그들의 정점에 서 있는 그림자 군주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좋습니다. 전쟁을 시작하지요.”
칠흑공 데일이 입을 열었다. 황금의 포효 앞에서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그 어느 때보다 덤덤하게 평정을 유지하며.
“저는 기꺼이, 폐하와 제국 앞에서 그 무엇보다 정당하며 의심할 수 없는 힘을 증명할 것입니다. 일찍이 폐하와 제국의 방식대로 말이지요.”
제국과 적색 마탑의 시대정신, 힘의 정의. 의회장의 공기가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러나 일촉즉발의 대치 속에서 당겨진 공기가 폭발하는 일은 없었다.
전쟁은 결코 하루아침에 시작되지 않는다. 하물며 대륙 전체를 전화에 휩싸이게 할 규모의 대전쟁은 더더욱 그러하리라.
“그림자의 침묵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럼에도 이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기정사실이다.
황금의 제국에 맞서 그림자가 침묵을 깨트렸고, 그곳에 있는 것은 바로 그 그림자 군주였다.
“좋다, 애송아. 기꺼이 네놈의 의심과 도전을 받아들이마.”
아서 대제가 다시금 광소했고, 그 웃음을 뒤로하고 그림자 군주가 몸을 돌렸다. 그대로 멀어지는 그를 따라서, 랭커스터 여대공 역시 몸을 일으켰다.
다음으로 익사공 바르바로사까지.
제국에 맞서 제국의 3대 공작 가를 이루고 있는 가주(家主)들이 그대로 등을 돌렸고, 그 모습을 보며 제후들 사이에서 다시금 동요가 감돌았다.
다음으로 요크 후작 가의 미스트리스 티타니아가 그림자 군주의 뒤를 따랐다. 마찬가지로 그림자의 기수를 자처하는 제후들 역시, 하나둘씩 잇달아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림자 군주를 따라 제국 의회를 빠져나가는 행렬.
그 행위가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그 와중에도 제후들의 머릿속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요동치고 있는 힘의 질서를 헤아리기 위해서.
머지않아 그림자의 기수가 아니라, 그저 순수하게 제국의 뜻에 저항하고자 하는 제후들 몇몇이 몸을 일으켰다. 많지 않다. 그러나 결코 적지도 않았다.
우뚝.
바로 그때, 덤덤히 나아가고 있는 그림자 군주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대로 고개를 돌린다.
“천상공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십니까?”
고개를 돌리며 데일이 물었다. 그 자리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는 백색 마탑의 정점, 나아가 제국에 맞서 ‘교국의 독립’을 주장하고 있는 천상공이 말없이 미소 지었다.
“데일 공자님, 아니…… 작센 공작 각하께서는 처음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무엇을 말이지요.”
“우리 교국의 독립이, 그저 그림자를 속이기 위한 함정에 불과했다는 것을.”
데일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것 참. 내심 그럴 거라고 짐작하기는 했으나, 역시 그랬군요.”
천상공이 즐거운 듯 웃었다.
“제국 제일의 천재, 천하의 검은 공자께서 이 정도의 계략에 넘어갈 리가 없겠지요.”
“…….”
“그러나 이제 아이들의 놀음은 끝났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저는 더 이상 ‘검은 공자’가 아닙니다.”
데일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저는 천상공과 핏빛공이 그러하듯, 흑색의 수장 ‘칠흑공’으로서 그대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대륙의 다섯 마법사 중 하나로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
나아가 황금과 그림자의 대립 속에서 그림자의 수장을 자처하는 군주.
“우리의 여신께서는, 아직 우리 교회가 제국과 함께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침, 교회의 심장에 침투해 있는 그대의 첩자를 색출해냈지요.”
“…….”
천상공이 말하는 ‘데일의 첩자’가 누구일지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순백과 거짓의 오렐리아. 마지막까지 자신의 신념과 이상을 믿어 의심치 않은 성처녀. 그러나 그녀는 결코 데일의 첩자가 아니었다.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성처녀의 이름을 사칭하는 마녀는 그날, 작센의 동토에서 불타 죽지 않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부디 뜻대로 생각하시길.”
데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웅성거림 속에서 그림자 군주와 그의 기수들이 행렬을 이루었다.
황금의 군주를 의심하고, 제국의 힘을 의심하는 자들.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적색 마탑의 지하.
어둠이 내리깔려 있는 지하의 일실을, 남자가 가로지르고 있었다.
핏빛공 유리스 후작의 주위를 따라 불꽃이 아스라하게 일렁였고, 그의 뒤를 따르는 것은 제국의 제2황자 갤러해드였다.
“대전쟁에 앞서 저에게 맡길 중책이라 하셨습니까?”
“그렇답니다.”
핏빛공이 조용히 미소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그들이 도착한 곳은 고도의 결계로 꽁꽁 묶여 있는 비밀스러운 일실이었다.
“오로지 갤러해드 황자님이 아니고서야 수행할 수 없는 중책이지요.”
“하오나 그것은 랜슬롯 형님이……”
“아, 랜슬롯 황자님 역시 그 나름의 임무를 수행하실 겁니다. 그러나 갤러해드 황자님에 비할 바는 아니지요. 폐하께서는 이것을 오로지 갤러해드 황자님께서 맡길 바라고 계십니다.”
“아버님이 직접 저를……?”
자신에 비할 바가 아니다. 평생에 걸쳐 가장 완벽에 가까운 황자로 이름을 떨친 랜슬롯보다도, 자신을 택했다. 그 사실에 제2황자 갤러해드가 숨을 삼켰다.
“도대체 그 중책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끼익.
방이 열렸고, 휘몰아치는 마력의 폭풍이 그들을 집어삼켰다. 그러나 핏빛공은 어렵지 않게 팔을 휘둘러 그것을 저지했다.
빛 하나 들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핏빛공이 망설임 없이 그 일실을 향해 들어섰다.
쩔그렁.
사슬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쇄도했다. 너무나도 빨라서 도저히 쫓을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푸욱!
그대로, 그림자가 무엇을 꿰뚫는 소리가 났다.
제2황자 갤러해드의 가슴팍을 찢어발기며, 칼날이 튀어나와 있었다.
“어, 아……?”
갤러해드가 일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이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촤아악!
그대로 검이 뽑혔고, 갤러해드의 육체가 무너져 내렸다.
“……참 오래도 걸렸다, 이 빌어먹을 새끼야.”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갤러해드의 육체에 칼날을 박아넣은 그림자의 목소리였다.
“부디 용서해 주시지요.”
핏빛공 유리스 후작이 조용히 웃었다.
“당신의 존재를 폐하께서 알았다가는, 우리의 계획 전체가 어그러질 테니 말입니다.”
“…….”
“부디 저를 용서해 주시지요, 신세계의 신이시여.”
핏빛공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리고 실루엣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는 그에게, 황금의 군주를 향하는 충성심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더러 어쩌란 거지?”
“황금의 피를 잇는 제2황자 갤러해드의 껍데기를 두르십시오.”
“제1황자가 아니고?”
“아, 랜슬롯 경께서는 이미 ‘신검 바델 경’의 의식에 잠식되어 있습니다.”
“바델이 죽지 않고 살아 있었나. 그립네.”
“엄밀히 말해 신검 바델 경의 자아와 융합하고 있는 무엇이라 보는 것이 옳겠지요.”
그림자는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침묵 끝에, 힘없이 쓰러진 제2황자 갤러해드의 육체를 낚아채 올렸다.
동시에 어둠 속에서 비로소 그림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계의 용사가, 그곳에 있었다.
제국에 배신당하고 버려진 사냥개. 제국의 황제는 목적이 사라진 그를 버렸고, 성검사는 그 명령을 집행하며 용사의 등에 칼날을 꽂아 넣었다. 모두가 이계의 용사가 죽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심지어 용사 자신조차도.
그러나 용사의 죽음이 그저 일시적 가사(假死)에 불과했으며, 그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자는 이 대륙에 오직 하나였다.
핏빛공 유리스 후작.
그 후, 용사의 가사 상태에 빠진 육체를 거둔 핏빛공은 바로 이날을 기다려왔다.
황금이나 그림자 따위가 아니라, 진정으로 이 세계를 진리로 이끌어줄 ‘폭력의 군주’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적기를.
그날, 핏빛공이 기억하고 있는 진리의 세계를 떠올렸다.
외계의 거신들조차 능히 굴복시키는 불과 강철의 제국. 그리고 이 남자는 바로 그 제국의 군주였다. 그렇기에 황금과 그림자 모두를 배신하고, 핏빛공 유리스 후작은 기꺼이 ‘신세계의 신’을 위해 충성하기로 맹세했다.
이 남자가 가지고 올 불과 강철의 업화를 떠올리며.
“때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오래도 기다렸지요.”
“그래, 거지 같이 오래 기다렸지.”
이계의 용사는 어느덧 제2황자 갤러해드의 육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황금과 그림자의 군주들을 쓰러뜨리고, 부디 불과 철의 제국을 이 땅에 가져와 주십시오.”
핏빛공이 용사를 향해 무릎 꿇고 말했다. 어느덧 제2황자 갤러해드의 육체를 뒤집어쓴 용사가 덤덤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황금과 그림자, 진실과 거짓, 그 전부를 압도하는 폭력의 제국을 위해서.
“내 복수를 도와준다는 데 마다할 이유는 없지.”
그리고 여전히 이계의 용사는 복수를 바라고 있었다.
“내 등에 칼 찔러넣은 새끼들을 잊은 적이 없으니까.”
“무엇을 바라고 계십니까?”
“내 손으로 제국을 무너뜨리는 것.”
이계의 용사가 말했다. 그 말에 핏빛공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 나의 제국을 세우는 것.”
“부디 당신이 바라는 것을 수행하십시오.”
어둠속에서, 갤러해드의 가죽을 뒤집어쓴 이계의 용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 전에, 당장 대륙을 집어삼키고 있는 전쟁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지요.”
“나더러 또 사냥개 노릇을 하라고?”
“아, 그럴 리가요.”
핏빛공이 즐겁다는 듯 웃었다.
“저는 바로 지금의 혼란이야말로, 그대의 제국을 세울 때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