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39화 (239/301)

239화

* * *

공작성의 옥좌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작센 공작 가의 가주이자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 나아가 흑색 마탑의 정점에 서는 자로서.

칠흑공의 이름을 가진 남자였다.

그리고 작센 공작의 앞에서, 공작 가를 섬기는 가신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밤까마귀 기사장 헬무트 블랙베어! 삼가 새로운 작센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쿠웅!

헬무트 경을 필두로 밤까마귀 기사들이 일제히 그들의 검을 세로로 내리꽂았다.

“흑색 마탑주님을 뵙습니다.”

나아가 흑색 마탑의 새로운 정점을 맞이하는 흑마법사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허허, 시펄. 이래서 사람은 모름지기 대가리를 잘 박아야 하는 법이여.”

무덤을 걷는 자들의 수장, 마스터 바로가 남의 일처럼 중얼거렸다.

밤까마귀 기사, 흑색 마탑의 장로들과 전투에서의 활약을 목적으로 양성하고 있는 흑마법사들, 끝으로 철저하게 어둠 속에서 암약하는 《그레이브 워커》들까지.

새로운 질서와 체제가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공작성의 옥좌에서, 작센 공작이 말없이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 * *

일찍이 데일의 아버지가 그러했듯, 데일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흑색 마탑의 정점을 꺾음으로써 자신을 증명하고, 직접 그 자리에 올라 작센 공작의 이름을 계승하는 것.

그날 밤.

자신의 자리를 내어준 아버지, 일찍이 흑색공의 이름을 가진 작센의 앨런이 침실에 있었다. 말없이 공작성의 창가를 내려다보며.

“앨런.”

등 뒤에서 아내 엘레나가 그의 이름을 불렀고, 앨런이 고개를 돌렸다.

“아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준 것이 섭섭하신가요?”

“그럴 리가 있겠소.”

엘레나의 물음에 앨런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일이었지. 오히려 나는 내 아들이 무척이나 자랑스럽다오.”

“그럼 어째서 그렇게 씁쓸하게 웃는 거죠?”

“글쎄, 나도 잘 모르겠소. 그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무어라 말을 이으려는 앨런의 말을 가로막는 것은 엘레나였다.

“여전히 이곳은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이에요.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없어지지는 않는걸요.”

엘레나가 여느 때처럼 다정하게 속삭였고, 그 말에 앨런이 말없이 미소 지었다. 참으로 그 말대로였다. 일찍이 그가 아내와 아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바쳤듯, 그것은 작센 공작의 자리를 계승하는 아들도 예외일 수 없으리라.

“내 아들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워준 게 아닐까 싶소.”

“당신에게는 그것이 무거운 짐이었나요?”

“그럴 리가 있겠소. 마땅히 감내해야 할 것이라오.”

“필시 우리 아들도 그럴 거예요.”

엘레나가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앨런이 무엇을 깨달은 듯 침묵을 지켰다.

* * *

제국 의회.

제국의 제후들이 하나의 자리에 집결하는 것은 좀처럼 쉬이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제국 의회가 열린 것은 제국이 통일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직후의 일이었고, 그 이전에 열린 제국 의회는 바로 그 통일 전쟁을 공식으로 발표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리고 그 의회가 다시금 소집되어, 제국 각지의 제후들을 불렀다는 것.

나아가 제국 의회를 앞두고 작센 가에서 벌어진 계승식은, 요동치기 시작하는 힘의 질서에 쐐기를 박는 일이었다.

칠흑공의 이명을 자처하는 새 작센 공작.

일찍이 제국 제일의 천재로서 명성을 떨친 검은 공자였고, 그의 아내 역시 제국의 3대 공작 중 하나를 차지하는 랭커스터 여대공이다. 그것도 천검의 검위를 가진 검객으로서.

두 공작 가가 부부로서 맺어져 있고, 익사공 바르바로사는 사해 군도의 독립과 더불어 제국으로부터의 이탈을 결의하고 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들 3대 공작 가가 힘을 합치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고, 그 사실을 모를 제국의 귀족들이 아니다.

그렇기에 금회(今回)에 열리게 될 제국 의회는 그 무엇보다 막중한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새롭게 요동치는 힘의 질서, 나아가 그 저울추가 어디로 기울어질지. 바로 이 자리에서 결정지어질 테니까.

──제국 의회장.

엄숙하게 내려앉은 정적 속에서 실내를 가득 메우고 있는 의석에는, 저마다 지위 고하에 따라 엄격하게 자리가 배정되었다.

제국의 세속 제후들, 성속 제후들, 제국 도시의 대표자들.

말 그대로 제국의 총의를 결정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리.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높이 솟아 있는 자리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진정으로 이 제국의 정점에 서는 자.

황금의 군주, 아서 대제.

황금의 혈통을 잇고 있는 13명의 황자와 황녀들 역시 그곳에 있었다.

“작센 공작, 삼가 제국의 황제 폐하를 뵙겠습니다.”

그리고 우뚝 솟아 있는 황금의 옥좌를 올려다보며, 데일이 입을 열었다.

데일의 아내이자 랭커스터 여대공, 샬롯 역시 바로 곁에서 묵묵히 예를 표하고 있다.

물에 젖은 생쥐꼴의 남자, 익사공 바르바로사 역시 그곳에 있었다. 사해 군도의 독립을 주장하는 군주로서.

그것은 교회의 수장이자 백색 마탑주, 천상공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설령 그가 주장하는 교국의 독립이 어디까지나 데일과 그림자 진영을 속이기 위한 거짓 공작에 불과할지라도.

그들 외에도, 저마다 제국에 맞서 독립국을 주장하는 제후들의 숫자는 결코 적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이 자리는 결코 일방적으로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사지(死地)가 아니다. 오히려 진짜 문제는 이들이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때 발생할 테니까.

그 사실을 이해하고 있기에, 독립을 주장하는 제후들 역시 기꺼이 소집에 응할 수 있었으리라.

그저 위태롭기 짝이 없는 공기 속에서, 비로소 황금의 대제가 데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작센의 데일’로서 처음 황제를 마주하는 데일에게, 이상하게도 증오의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기에는 너무나 많은 세월이 흘렀으니까.

지금의 데일에게 있어 저 남자, 황금의 군주를 쓰러뜨리는 것은 그저 마땅해 수행해야 할 일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황금의 군주와 그의 제국을 쓰러뜨리는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칠흑공.”

아서 대제가 입을 열었다. 육중하게 내려앉은 저음이 데일의 이름을 불렀고, 데일이 고개를 숙였다.

“말씀하십시오, 폐하.”

“짐이 이 자리에서 당장 네놈의 목을 치지 말아야 할 이유를, 하나라도 대볼 수 있나?”

일순 주위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러나 데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답했다.

“어째서 제 목을 치지 않으십니까?”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제 목 하나로 이 사태가 수습될 경우, 제 목을 치는 것을 주저하실 까닭이 없지요.”

“…….”

데일의 물음에 아서 대제가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이 자리에서 공작 각하의 몫을 치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의 이유입니다.”

침묵을 깨트린 것은 핏빛공, 유리스 후작의 몫이었다.

“폐하께서 추구하는 제국의 가치는 비열하기 짝이 없는 속임수나 모략이 아니라, 진정 정당하며 의심할 여지가 없는 ‘힘의 정의’ 속에서 이루어지는 까닭이시지요.”

황금의 대제가 쌓아 올린 제국이 지금까지 존속할 수 있는 것은, 그 누구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압도적 힘을 보여준 까닭이다.

거짓의 군주, 거짓의 제국.

무엇보다도 유리스 후작의 말이 크게 틀린 것도 아니었다.

제국의 황제가 의회를 핑계로 공작을 불러내 목을 치는 것은, 지금껏 제국이 쌓아 올린 힘의 정의 그 자체를 깨트리는 행위니까.

“폐하를 대신하여, 이 자리에서 제국과 폐하에게 거스르고자 하는 그대들에게 고하겠습니다.”

제국 의회의 의장으로서, 핏빛공이 몸을 일으켰다. 곳곳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부디 그리하십시오.”

“……!”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주장하고 싶으신 제후들께서는, 그렇게 하십시오. 황제 폐하에게 충성하지 않기를 바라는 공들께서도 그리하십시오. 폐하께서는 기꺼이 그대들의 결정을 존중할 것입니다.”

뜻밖의 말에 웅성거림이 일었다. 그러나 데일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다시 그대들 앞에서 증명할 것입니다.”

증명. 무엇을?

“비열하기 짝이 없는 거짓이나 속임수, 모략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납득할 수밖에 없는 진정한 힘을 증명할 겁니다.”

바로 그때였다.

핏빛공의 서클이 가속하며, 제국 의회의 풍경 일대가 덧씌워졌다.

그리고 그의 마도서 『피의 책』이, 또다시 제국의 역사를 되감고 있었다.

잿더미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일찍이 제국에 맞선 어느 이름 없는 왕국의 수도였다.

“그대들의 왕국, 도시와 성채, 백성 모두의 앞에서 남김없이 증명하시겠지요.”

절대로 거스를 수 없는 압도적 폭력. 제국과 적색 마탑이 그토록 부르짖는 힘과 폭력의 정의.

강자는 전부를 빼앗는다. 약자는 전부를 빼앗길 수밖에 없다.

“이 지상 유일의 강자(强者)가 누구이며, 그 강자 앞에 저항한 약자의 말로가 어떻게 될지.”

비명이 울려 퍼졌다. 제국군이 죄 없는 이들을 학살하고 짓밟으며, 성이 무너지고 도시가 불타는 풍경이 끝없이 이어졌다.

제국에 저항한 약자들의 말로.

의회에 모여 있는 귀족들이 겁에 질린 채 통일 전쟁의 악몽을 떠올렸다.

데일 역시 그날의 악몽을 떠올렸다.

그리고 전생의 그는 악몽을 꾸는 자가 아니었다.

악몽을 꾸게 하는 자였다.

사사로운 감정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국군이 짓밟는 약탈과 방화 속에서, 그를 구속하고 있는 목줄과 그가 가져온 악몽을 떠올렸다.

피도 눈물도 없는 제국의 사냥개. 정의의 집행자.

“의심하십시오. 폐하의 힘을, 제국의 힘을, 그리고 우리의 힘을 의심하셔도 좋습니다.”

핏빛공이 즐거운 듯이 웃었다. 그 와중에도 일대에는 제국을 의심하고 저항한 자들의 말로가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울부짖는 가족들, 목숨을 애걸하는 귀족들, 뒤늦게 항복하고 조아리는 자들, 누구도 예외가 없었다.

누구라도 납득할 수밖에 없는, 저항할 수 없는 폭력의 증명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였다.

후우웅!

피의 책이 끝없이 써 내리고 있는 역사의 풍경이, 그대로 정지했다.

“폐하의 방식에 따르겠습니다.”

휘몰아치는 칠흑의 마력을 뒤로하고 데일이 입을 열었다.

“폐하와 제국이 주장하는 힘의 정의, 강자가 모두를 가지고 약자는 전부를 빼앗길 수밖에 없다는 정의를.”

“호오.”

데일이 말했고, 곳곳에서 독립을 주장하는 제후들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그리고 저는 폐하의 방식대로 증명할 것입니다.”

“……!”

동시에 핏빛공의 표정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황금 옥좌에 앉아 있는 아서 대제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무엇을 말이냐?”

비로소, 침묵 끝에 황금의 군주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진실을 말이지요.”

그림자 군주가 대답했다.

“제가 당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쿠웅!

그 말을 끝으로, 핏빛공의 세계가 무너져 내렸다. 곳곳에서 경악에 차 있는 웅성거림이 일었으나, 그것은 잠시였다.

뜻밖에도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제의 웃음소리였고, 웃음은 머지않아 광소에서, 그리고 포효로 바뀌었다.

우두머리 용(Pendragon)의 이름을 가진 자.

황금의 용이 포효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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