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38화 (238/301)

238화

* * *

얼마나 이날을 기다렸을까. 아니, 실감조차 나지 않았다. 자기 앞에 있는 이 남자를 쓰러뜨려야 할 때가 찾아올 거란 사실이.

그러나 그 남자는 그곳에 있었다.

데일의 아버지, 작센 공작, 흑색 마탑의 정점이자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

흑색공의 칭호를 가진 남자였다.

데일이 가진 두 개의 심장이 가속했다. 일곱 개의 서클과 그 서클이 드리우고 있는 그림자 서클들이.

그에 맞서 남자가 여덟 개의 서클을 가속했다.

두 사람의 발밑을 따라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어둠이 소용돌이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죽음과 옛 어둠의 어머니가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더 이상 숨기고 있는 진실 같은 것은 없었다. 그렇기에 데일 역시 망설이지 않았다.

마법사로서의 서클과 더불어 오러 하트가 폭발했고, 데일의 육신을 밤까마귀 기사의 갑주가 덧씌웠다.

갑주 밑으로 숨어 있는 용사가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이 갑주 역시 자신의 일부임을. 밤까마귀 기사들이 작센 가를 위해 기꺼이 그들의 목숨을 바치듯, 데일이 투영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밤까마귀 기사들의 충성심 그 자체임을.

“네가 가진 전력을 다하거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남자가 말했고, 그러나 데일이 고개를 저었다.

“여유를 부리는 것이냐.”

“저는 어디까지나 ‘흑색 마탑주’의 자리를 얻기 위해 아버지와 맞서는 것입니다.”

데일이 대답했다. 동시에 그의 육체를 휘감고 있는 용사의 아바타가 사라지고, 암혈의 갑주가 데일을 뒤덮었다.

“아버지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아버지를 뛰어넘어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임을 증명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지요.”

“…….”

데일의 말에 흑색공이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폭발하는 오러 하트가 침묵을 지켰고, 그러나 그의 심장과 그림자는 가속에 가속을 거듭했다.

“그래, 그렇겠지.”

데일이 말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는 헤아릴 수 없는 뼈 무덤과 병기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두 시체가, 저마다 칼자루를 쥐고 쇄도하는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카앙!

데일과 흑색공이 조종하는 해골병이 검을 쥐고 맞부딪쳤다. 마치 두 흑마법사의 대전사(Champion)를 자처하듯.

“제가 아버지를 쓰러뜨리고 이 탑의 정점에 설 경우, 아버지께서는 그 뒤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벌써 이 탑의 정점에 서기라도 했느냐.”

흑색공이 조용히 웃으며 되물었다. 그러나 덤덤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들과 별개로, 두 흑마법사가 조종하고 있는 망자들의 싸움은 그렇지 않았다.

콰직!

데일이 조종하는 해골이, 흑색의 오러를 깃들게 하며 흑색공의 해골을 무너뜨렸다.

그와 동시에, 두 흑마법사의 세계가 흑색 마탑의 일실을 뒤덮었다.

흑백의 겨울밤, 그리고 저물녘의 어스름으로 가득 차 있는 대지였다.

어느덧 흑색공의 곁에 서 있는 ‘죽음’이 지팡이를 내려찍었다.

스러지는 저녁노을을 가득 뒤덮으며, 까마귀 무리가 쇄도했다.

죽음을 머금고 있는 새들.

그에 맞서 데일의 그림자 서클이 회전했고 어둠이 흩뿌려졌다. 흩뿌려지는 어둠의 장막을 찢고, 깃털을 흩뿌리며 새들이 날아올랐다.

까마귀였다.

그러나 눈처럼 새하얗게 물들어 있는 흰 까마귀였다.

흰 까마귀 떼가, 흑색공이 펼치는 밤까마귀 무리와 맞서고 있었다.

상공을 가득 메우고 있는 새들의 다툼 속에서 데일이 고개를 내렸다.

어느덧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멀어지는 아버지를 뒤로하고, 두 부자의 사이를 가득 메우는 것은 죽음의 군세였다.

사상으로 세워 올린 불사의 병정들.

망자들의 대전선(大戰線)이 격돌했다.

지평의 끝자락에서 지평의 끝자락까지 이어져 있는 두 개의 전선이 격돌했고, 전쟁이 시작되었다.

팔이 잘리고 목이 잘리고, 내장이 쏟아지고, 뼈가 부러지고 육골이 조각나도 그들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결코 멈추지 않는 죽은 자들의 부대가 끝없이 맞부딪치고 또 맞부딪치며, 말 그대로 시체들의 산을 이루었다.

시산은 있었으나, 결코 혈해(血海)는 없었다.

소리조차 없었다.

전쟁에 마땅히 있어야 할, 칼날에 찔려 비명을 내지르는 이들이나 울부짖는 이들도, 고함을 내지르는 이들도 없었다.

그저 얼어붙을 것 같은 정적 속에서 철과 철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전쟁이었다.

* * *

데일이 고개를 들었다.

별빛 하나 깜빡이지 않는 밤하늘의 어둠 아래서, 죽은 자들이 아직도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곳에 살아 있는 자들은 없었다. 애국심도, 종교도, 저마다 가슴속에 품고 있는 소명을 부르짖는 자들도 없다.

살점이 떨어지고, 내장이 흘러내리고, 백골이 새하얗게 드러나 있는 죽은 자들.

침묵이 이어졌다.

소름이 끼칠 것 같은 침묵 속에서, 그저 무구들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아스라하게 울려 퍼졌다.

* * *

작센 공작이 고개를 들었다.

지평 너머로 저물녘의 어스름이 내려앉았다.

저 멀리서 스미는 꼭두서니 빛 햇살이, 결코 쉬지도 멈추지도 않는 죽은 자들의 군대를 비추었다.

그곳은 말 그대로 죽음조차 허락받지 못하는 살아 있는 지옥 그 자체였다.

어느 누구도 쉴 수 없다.

그저 그들의 왕이 이끄는 대로, 저마다 섬기고 있는 죽음의 왕을 따라 끝없이 그 무기를 휘둘러야 하는 병사들로 가득했다.

그저 세상의 종말이 올 때까지 끝없는 싸움을 계속하기 위해서.

* * *

밤과 황혼을 거느린 두 흑마법사가 격돌했고, 비로소 전쟁이 끝을 맺었다.

어둠으로 이루어진 기사들이 묵묵히 승전고를 울리며 행진하고 있었다.

병사들을 모조리 잃어버린 남자가 묵묵히 침묵을 지키며 서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남자를 포위하고 있는 어둠의 기사들이, 마치 바다가 갈라지듯 갈라지기 시작했다. 흡사 사열식을 수행하는 부대처럼.

그 사이로 그림자 군주가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의 부대를 모조리 잃어버린 패장(敗將)을 앞에 두고 승리를 손에 넣은 정복자로서.

“제 승리입니다.”

“하나의 전투에서 승리했을 따름이다.”

그 모습을 보며 흑색공이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남자가 팔을 뻗었고, 어둠이 휘몰아쳤다.

지금까지 보여준 것은 그저 병정 놀이에 지나지 않았다는 듯이.

휘몰아치는 어둠의 폭풍이 일대를 집어삼켰다.

죽음이 깃털처럼 내려앉았다.

흑색의 날개를 펼친 죽음의 신이 그곳에 있었다.

죽지 않아야 할 자들이 비로소 죽음을 맞이하고,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은 오로지 패장과 정복자 두 사람이었다.

“이 전쟁이 끝나고 나서,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데일이 물었고, 남자가 씁쓸하게 웃었다.

“생각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구나.”

“……저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데일이 말했다.

“부디 저에게, 당신이 짊어지고 있는 짐을 이어받게 해주십시오.”

“그럼 부디 가져가 보아라.”

흑색공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동시에 여섯 장의 흑색 날개가 펼쳐졌고, 칠흑의 깃털이 흩날렸다.

동시에 데일의 육체가 그대로 정지했다.

심장마비라도 걸린 사람처럼 숨을 삼키며 무너져 내렸고, 싸늘하게 식어버린 시체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러나 데일의 그림자를 찢고 솟아오르는 흰 까마귀 떼는 그렇지 않았다.

죽음의 개념 그 자체를 조작하는 능력.

핏빛공이 ‘역사’를 다루듯, 오색 마탑의 정점에 서는 다섯 마법사에게는 그에 걸맞은 힘이 있다.

그리고 청색 마탑주이자 엘레나가 데일에게 준 힘을 이곳에서 사용할 수는 없다.

그저 강함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흑색 마탑의 정점에 설 자격을 가리는 자리니까.

그러나 삶과 죽음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엮여 있듯, 지금의 데일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결코 불가해의 개념이 아니었다.

세상은 어둠에서 태어났고, 죽어서는 다시 어둠 속으로 돌아갈 테니까.

데일의 곁에 함께하는 것은 바로 그 옛 어둠의 어머니다.

순백의 까마귀들이 일제히 솟아올랐고, 흰 까마귀 떼의 그림자 속에서 데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체가 되어 쓰러진 자기 육체를 내려다보며.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지요.”

바닥에 쓰러진 데일이,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또 하나의 데일을 향해 녹아들었다.

“그러나 죽음과 생명의 경주에서, 생명은 늘 죽음보다 빨랐습니다.”

“호오.”

흑색공이 즐겁다는 듯 웃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저에게 닿는 것보다, 저는 더 빨리 도망칠 수 있습니다.”

다시금 흑색공의 곁에 있는 ‘죽음’이 지팡이를 내리찍었고, 그의 발밑에서 까마귀 깃털이 화살처럼 내리꽂혔다.

그러나 내리꽂히는 깃털을 집어삼키는 것은 ‘옛 어둠의 어머니’가 펼치는 어둠이었다.

그 어둠에는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잠재력과 창조의 가능성이 깃들어 있었다.

“죽음으로도 죽일 수 없는 것을 찾았구나.”

그 모습을 보며 비로소 흑색공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옛 어둠의 어머니가 내려주는 가호 속에서, 그림자 군주가 걸음을 내디뎠다.

그때마다 흑색공이 펼치는 죽음이 데일에게 내려앉았고, 그러나 더 이상 그것은 데일을 죽일 수 없었다.

그것이 그림자 군주로서, 나아가 옛 어둠의 어머니와 함께하는 자로서, 데일의 그림자에 깃들어 있는 힘이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을 죽일 수는 없으니까.

그것이 바로 창조의 가능성이었고, 바로 그것이 데일이 가진 그림자와 어둠의 실체였다.

태어나지 않았기에 죽일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 어둠에는 무엇이라도 될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이 세상에 그림자의 제국을 가져오는 것은, 결코 세계를 무(無)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었다.

“평생에 걸쳐 진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버지 흑색공이 무릎을 꿇었다.

“죽음조차 죽일 수 없는 것, 죽음 앞에서조차 덧없어지지 않는 것.”

“…….”

“바로 그것이 지금, 내 앞에 있구나.”

흑색공이 말했고, 데일이 조용히 웃었다.

“저는 이 땅에 그림자의 제국을 세울 것입니다.”

거짓의 황금이 아니다. 무엇도 아니며, 동시에 무엇이라도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세계.

“수고하셨습니다, 아버지.”

그렇게 말하며 데일이 팔을 뻗었고, 무릎 꿇고 있는 흑색공이 아들의 손을 잡았다.

“작센의 앨런.”

아들의 손을 잡고, 아버지가 말했다. 그 어느 때보다 자랑스럽고 흐뭇하며, 진중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삼가 우리 흑색 마탑의 정점, 칠흑공(漆黑公)을 뵙습니다.”

* * *

제국 의회가 소집되었고, 제국의 요청에 따라 ‘작센 공작과 공작 가의 장남’이 참여했다.

그러나 일찍이 ‘흑색공’의 이름을 가진 남자는 그의 영지를 지킬 따름이었다.

그 남자는 더 이상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도, 흑색 마탑의 정점도, 작센 공작령의 가주(家主)조차 아니었으니까.

결과적으로 황제의 칙서에 적혀 있는 내용을 어기는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작센 공작 가의 수장이자 흑색 마탑의 정점, 칠흑공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낼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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