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 * *
아들이 그의 아버지를 앞에 두고 있었다.
“흑색 마탑에서, 네가 나를 꺾고 탑주의 자리에 올랐을 때를 기억하고 있다.”
“…….”
그 말에 아들, 흑색공이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일찍이 또 하나의 작센 공작이자 아버지를 바라보며.
“참으로 자랑스러웠지. 내 아내이자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듯, 너에게는 작센의 그 누구와도 비할 바 없는 재능과 자격이 있었다.”
“그렇습니까.”
“그래, 그랬었지.”
흑색공의 아버지가 덧없게 웃었다. 죽음을 알지 못하는 그 존재마저, 그러나 죽음의 신과 죽음을 상대로 속여넘길 수는 없었다.
죽음이 그의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역시 너에게는 당해낼 수가 없구나.”
“…….”
그리고 기꺼이 아버지의 죽음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아들은 그저 말없이 침묵을 지킬 따름이었다.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 * *
그림자의 제국이 새로운 왕의 앞에서 무릎 꿇고 있었다.
세계의 끝자락, 끝없는 어둠과 냉기로 뒤덮여 있는 대지 전체가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림자의 마탑, 바로 그 탑의 정점에 데일이 있었다.
“약속대로 이 대지는 너에게 넘겨줄 것이다.”
데일이 입을 열었다. 그의 심장에 깃들어 있는 『차가운 재의 서』를 향해서.
“네가 마땅히 다스려야 할 종족들을 데리고, 이 땅에 터를 잡아라.”
“…….”
콰직, 콰직!
데일의 그림자 심장과 융합하고 있는 마도서가 떨어져 나가며, 휘몰아치는 마력 속에서 형태를 드러냈다.
잿더미의 군주, 마왕 발로르가 비로소 그곳에 있었다.
이 대지에 깃들어 있는 어둠의 마력을 통해 수육(受肉)하고 있는 마의 육체. 달라질 것은 없었다.
“……정말 이걸로 끝이 났다는 것이냐.”
“그럼 끝나지 않은 것이라도 있나?”
데일이 되물었다. 마왕이 고개를 저었다.
젓고 나서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그림자 군주여, 이 탑과 대지의 어둠이 네 앞에 고개를 조아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조차 예외일 수 없겠지.”
“불사공 프레데릭은 죽었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이상, 나에게 있어 이 대지는 아무 의미도 없지.”
데일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일어나라.”
“이 땅의 마(魔)를 무릎 꿇리고 그 위에 군림하지 않는 것이냐.”
“어째서 그래야 하지?”
“불사공은 그렇게 했으니까.”
그렇기에 그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이 존재는 마족들의 왕을 자처하며 남하를 시작했다. 우스운 이야기였다.
데일이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동시에 그의 서클이 가속하며 어둠이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쿠궁.
탑의 천장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탑의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하늘에는 일말의 빛조차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 하늘 사이로, 아주 희미하게 빛줄기 하나가 쏟아져 내렸다.
“이 대지는 더 이상 죽음과 냉기로 가득 차 있는 땅이 아니다.”
데일이 팔을 뻗었고, 대지 일대에 깃들어 있는 어둠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림자 마탑이 뿌리를 내리고 대지를 잠식하고 있는 흑색 마력들. 그것이 바로 이 땅에 깃들어 있는 어둠의 정체였다.
그렇기에 데일이 탑의 정점에서 손을 휘젓자, 그 어둠이 무엇을 꽃피우기 시작했다.
빛은 어둠에서 태어났다.
이곳 역시 다를 것은 없으리라.
역설적으로 이 대지 전체를 어둠이 집어삼키고 있는 까닭에, 그림자 군주가 그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았다.
대지 구석구석까지 깃들어 있는 냉기와 죽음의 장막을 걷어내자, 어둠 속에서 가능성이 피어났다.
“……무엇으로도 보답할 수 없는 빚을 지고 말았다.”
마왕이 나지막이 말을 잇는다.
“내 제국의 일부가 되어, 너에게 이 땅을 일구고 다스릴 것은 명하마.”
“그림자 군주여, 그대가 부를 때 나는 기꺼이 그림자의 기수가 될 것을 약조하겠다.”
“그걸로 됐다.”
데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
“데일.”
어느덧 흑색공이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천장이 무너진 탑의 꼭대기에서, 아들과 함께 일대의 대지를 내려다보며.
“참으로 놀라운 풍경이구나. 이것이 너의 힘이었더냐?”
“아이러니하기 그지없는 힘이지요.”
흑색공이 말했고, 데일이 자조하듯 웃었다.
“평생에 걸쳐 죽이는 법밖에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림자 군주로서 데일의 손에 주어진 것은, 파괴가 아니라 창조의 힘이었다.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데일이 말을 이었다.
“조부께서는…….”
“마땅히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셨다.”
흑색공이 대답했고, 그 말에 데일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다.”
흑색공이 고개를 저었다.
바로 그때였다.
“모두 어둠 속으로 사라졌구나.”
마지막으로, 탑에 남겨진 작센의 일족이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디 페르세포네였다. 뻥 뚫려 있는 눈동자가 무척이나 공허했다.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아.”
“……어머니.”
“보여야 할 것들이 보이지 않고, 느껴져야 할 것들이 느껴지지 않는구나. 아이야, 너는 그곳에 있는 것이냐?”
“저는 이곳에 있습니다.”
흑색공이 나직이 대답했다. 무척이나 씁쓸하게. 그 모습을 보고 데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아, 그래도 나의 아들이 이곳에 있구나.”
레이디 페르세포네가 마치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팔을 더듬었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대로 흑색공이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래, 이제야 너를 느낄 수 있구나. 나의 아이야.”
레이디 페르세포네가 사랑스러운 듯 흑색공의 뺨을 쓰다듬었다. 쓰다듬고 나서, 아들의 품에 고개를 파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마치 어린 딸아이가 아버지를 향해 칭얼거리는 것처럼. 그러나 무척이나 슬프고 덧없는 울음이었다.
하나의 제국이 몰락했고, 그 끝은 늘 그렇듯 덧없고 비참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제국이라도 예외일 수 없었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데일이 아버지와 함께 여정을 끝마치고, 다시금 작센 공작령으로 돌아왔을 즈음.
브리타니아 섬에서, 왕국을 배신하고 제국에 붙은 친(親) 제국파 출신 귀족들이 대거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것은 섬을 지배하고 있는 부르고뉴 총독과 그의 일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동시에 성처녀 오렐리아는 공식적으로 ‘시스티나 교국’을 위해 제국과 맞서 싸우기 시작했고, 나아가 제국에서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사해 군도와 바다의 지배자를 자청하는 익사공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얼핏 보기에, 아무 접점도 없이 일어나는 그 일들을 엮는 것은 하나의 거미줄이었다.
청색 마탑주가 청색의 소서리스들과 함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속삭였듯, 그러나 이제는 청색과 일말의 접점조차 없는 이들이 대거 ‘의회’에 모여 있었다.
“브리타니아 섬에서 신생 왕국이 독립을 주장하는 즉시, 제국에서는 재차 대규모 함대를 파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결속하고 있는 그림자 군주가 입을 열었다.
“그들을 요격하는 역할은 익사공, 공께서 자랑하는 사해 군도의 무적 함대가 되겠지요.”
“…….”
데일이 말했고, 물에 빠진 생쥐꼴의 남자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그곳에서 가져가야 할 전리품은 마땅히 나와 우리 군도(群島)의 것이 될 것이다.”
“익사공께서는 마땅히 그것을 가질 자격이 있습니다.”
침묵 끝에 남자가 입을 열었고, 그의 심장을 가진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상공.”
“말씀하시지요, 그림자 군주시여.”
“기꺼이 제 뜻에 동참해주신 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그대들이 우리 교국의 지위를 위해 싸워주는 이상, 동맹은 유지될 것입니다.”
일찍이 황금의 기수를 자처했으나, 자신의 국가를 손에 넣고자 등을 돌린 백색 마탑주가 미소 지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것이 황금을 배신하고 기꺼이 그림자 군주를 위해 싸우는 이유였으므로.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추후 때가 왔을 때, 의회를 소집할 것입니다.”
데일이 말했다.
“이것으로 의회를 해산하도록 하겠습니다.”
동시에 천상공의 모습이 사라졌고, 그러나 그 이외의 이들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교국의 독립을 포고하고 제국과 싸우는 것처럼 보여도, 백색 마탑주는 결코 황금을 배신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독립은 어디까지나 데일과 그림자를 속이기 위한 함정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중 첩자를 수행하고 있는 천상공조차 청색의 교활함을 이길 수는 없었다.
“백색 마탑주는 필시 제국에게, 익사공의 함대가 브리타니아 섬으로 향하는 제국 함대를 노릴 것이라 알리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데일이 천상공과 제국을 속이기 위한 거짓 정보였다. 자신을 속이는 자라 믿어 의심치 않는 이처럼 속이기 쉬운 자도 없으니까.
그것이 바로 어머니 엘레나, 나아가 청색의 흑막이 데일에게 준 청색의 지혜였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의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저는 바다 위의 전투에 대해 아무 지식이 없습니다. 이 상황에서, 제국의 허를 찌르기 위해 익사공께서는 어디로 함대를 움직일 생각입니까?”
“네놈이 백색 마탑주를 속였듯, 이것이 나를 속이기 위한 함정이 아니라고 증명할 수 있나?”
익사공이 되물었다. 하나를 속이는 것은 곧 두 명을 속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 점에 있어 익사공은 바보가 아니었다.
“대답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데일이 조용히 웃었다.
“그저 익사공께서는, 사해 군도의 독립을 위해 가장 옳다고 생각되는 결정을 내려주시는 걸로 족합니다. 그리고 저는 기꺼이 그대의 왕국을 존중할 것입니다.”
“…….”
여전히 데일의 손에는 자신의 심장이 놓여 있다. 그리고 데일은 결코 그것을 빌미로 익사공을 겁박하는 일이 없었다.
그저 존중할 따름이었다.
아무리 비바람에 꺾이지 않는 강직함을 가진 자라 해도, 햇볕 아래서 외투를 꽁꽁 싸맬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그리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로의 이해가 일치하는 행위였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진짜로 말이지요.”
동시에 그곳에 결속되고 있는 ‘동맹’이 해산되었고, 데일의 의식 역시 돌아왔다.
작센 공작성의 일실.
청색 마탑주의 상징과 같은 그 행위가 끝나고 나자,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엄습했다. 심장의 서클이 비명을 내지르며 가속하고, 가속 끝에 마모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고통, 그 이상의 격통 속에서 데일이 입술을 깨물었다.
여느 때나 평정과 여유를 가장하는 청색의 흑막이, 장막 뒤에서 느껴야 했을 고통이었다. 그리고 청색의 흑막은 아들을 위해 그 능력을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데일 역시 다를 것은 없었다.
필사적으로 장막 뒤에 고통과 나약함, 밑천을 감추고 포커페이스를 가장하는 것.
고통 속에서 비로소 평정을 되찾고 나서,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데일.”
바로 그때였다.
무척이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힘의 후유증에 의식이 팔린 데일은 그녀의 존재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엘프 마법사 세피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