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35화 (235/301)

235화

* * *

우주의 겨울, 종말의 냉기가 휘몰아치는 세계였다.

바로 그 세계를 덧씌우며 그림자 군주가 고개를 들었다.

불사공 프레데릭을 중심으로 떠올라 있는 거품들이, 하나둘씩 냉기 속에 집어 삼켜지고 있었다. 어느덧 불사공의 마도서 『종말의 거품』이 내포하고 있는 거품들 속에는 오로지 하나의 풍경밖에 남지 않았다.

얼음으로 끝나버린 우주였다.

“세상은 얼음으로 끝나리라. 아아, 참으로 그 말대로구나.”

그 모습을 보며 불사공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것은 결코 방금까지 보여준 당혹이 아니었다.

“나를 용서해다오, 그림자 군주를 칭왕하는 아이야.”

“무엇을 말입니까.”

“네가 내가 가진 것들을 빼앗고 그림자 군주를 자청했을 때, 나는 그저 네가 일개 찬탈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

“그러나 너에게는 자격이 있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림자의 왕위를 놓고 맞설 군주의 자격이 말이지.”

항복을 말하려는 것일까. 그러나 아니었다.

“전력을 다해 쓰러뜨려야 할 적수로서, 너에게 진정으로 경의를 표하마.”

다시금 불사공의 발밑에서 촉수들이 꿈틀거렸고, 그 위로 거품들이 보글보글 떠올랐다.

『종말의 거품』이라는 이름처럼, 하나하나의 거품들 속에는 종말 이후 스러진 세계의 풍경이 담겨 있었다.

무엇 하나 예외 없이, 우주의 겨울을 맞아 얼음으로 끝나버린 세계들이었다.

펑!

동시에 거품들이 터지고 그 속에 담겨 있는 ‘세계의 종말’이 흘러나왔다. 종말의 냉기가 데일의 존재를 수몰시키기 위해 홍수처럼 쏟아졌고, 그에 맞서 데일이 팔을 뻗었다.

그림자 심장과 서클이 가속하며 태고의 어둠이 흩뿌려졌다.

“아직도 덧없음의 진리를 부정하려 하느냐.”

불사공이 되물었다.

“이 세계가 얼음으로 끝나고 다시금 어둠 속에 집어 삼켜질 때, 그 속에서 우리의 발버둥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말했듯이 저에게 있어 세상의 종말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것입니다.”

“진실로부터 고개를 돌리려는 것이냐?”

끝없이 솟아나는 거품들이 터지며, 끝없이 그 속에 담겨 있는 ‘세계의 종말’이 흘러나왔다. 휘몰아치는 냉기의 파도였다.

그러나 종말의 냉기에 맞서 데일이 태고의 어둠을 흩뿌렸고, 홍수처럼 쏟아지는 냉기가 모조리 어둠 속에 삼켜졌다.

“제 아버지께서는, 죽음 앞에서 덧없어지지 않는 것들을 생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 앞에서 덧없어지지 않는 것 따위는 없다. 사람이 죽고, 별이 죽고, 종국에는 이 우주조차 죽음을 맞이하게 될 테니까. 보아라, 지금 너와 내가 펼치고 있는 우주의 겨울을. 그것이 진실이다.”

그 말대로였다. 데일이 펼치고 있는 사상의 세계, 나아가 불사공이 종말의 거품들 속에 가둬두고 있는 세계는 모두 하나의 풍경을 가리키고 있었다.

얼음으로 끝나버린 세계.

사람이 죽고, 별이 죽고, 우주가 죽고, 세계가 죽는다.

그림자 군주를 자청하는 두 명의 위대한 마법사 모두 결코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결말을 놓고, 두 마법사는 서로에게 어긋나는 해답을 내놓고 있었다.

“즐거운 일이 끝나는 이유를 아십니까?”

그렇기에 데일이 되물었다. 너무나도 뜻밖의 물음에 불사공이 일순 고개를 갸웃거렸다.

“슬프고 괴로운 일들 역시 끝내기 위해서입니다.”

즐거운 일이 끝나는 것은 슬프거나 괴로운 일도 끝내기 위해서다.

“이 세상의 끝 역시 그러한 이유겠지요. 그리고 그 끝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덧없지도 않습니다.”

“…….”

“그러나 영겁의 삶 속에서, 불사공께서는 필시 즐거운 일도 슬프고 괴로운 일도 영영 끝나지 않겠지요. 아직도 세상의 끝이 그렇게나 덧없고 끔찍하기 그지없는 진실처럼 느껴지십니까?”

데일이 되물었다. 일순, 불사공이 침묵을 지켰다.

그저, 어린 남자아이가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어린아이는, 데일에게 어째서 이 세상에 끝이 존재하는지 묻고 있었다.

결국 전부 끝이 나게 될 이 세계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묻고 있었다.

“그저 즐거운 일이 끝나는 것처럼, 끝이 존재하기에 슬프고 괴로운 일도 끝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십시오.”

어린아이 앞에서 데일이 말을 이었다.

“오히려 정말로 덧없고 허무한 것은 끝이 없는 것이지요. 불사공, 그대의 삶처럼 말입니다.”

“참으로 우습구나.”

“설령 당신이 이곳에서 끝을 맺어도, 달라질 것은 없을 겁니다. 아직 저에게는 끝내야 할 즐거운 일이 남아 있으니까요.”

“그게 무엇이지?”

“불과 빛의 제국을 무너뜨리고, 복수의 끝을 보는 것.”

데일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말했듯이, 끝이 있는 것은 그렇게 덧없고 허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끝없는 복수처럼 끔찍하고 덧없는 일도 없겠지요.”

“…….”

어린아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동시에 그가 딛고 있는 일대에서 끝없는 거품들이 떠올랐다.

세계의 끝을 내포하고 있는 종말의 거품들.

그 거품들이, 또다시 끝을 비추고 있었다.

──그림자 군주의 앞에서 패배하고 쓰러진 불사공의 최후였다.

그 모습을 보고 불사공이 쓴웃음을 터뜨렸다.

“그랬나, 네가 나의 죽음이었나.”

비로소 이해했다는 듯이.

자신의 끝을 목도하고, 어린아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웃기고 웃겨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오거라, 나의 죽음이여.”

촤아악!

그와 동시에, 불사공의 발밑 일대에 꿈틀거리는 촉수들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직전까지 바로 코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은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끝없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고작 몇 미터의 거리가 수십 미터, 수백, 수천 미터로.

그리고 그 수 킬로미터의 거리 바깥에서도 볼 수 있는 거대 촉수들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촉수들로 휘감겨져 있는 거신(巨身)이, 비로소 몸을 일으켰다.

소유주를 지키기 위해, 마도서 『종말의 거품』이 화신의 형태로 강림한 것이다.

쿠웅, 쿵!

촉수들의 무리가 데일을 짓이기기 위해 내리꽂혔고, 동시에 데일의 체내에 있는 오러 하트가 폭발했다.

밤까마귀 기사의 갑주를 두르고 있는 이계의 용사가, 땅을 박찼다.

그 와중에도 끝없이 벌어지고 있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비로소 좁혀지기 시작했다.

쿠웅, 쿵!

촉수들이 끝없이 쇄도하며 내리꽂혔고, 용사가 그의 애검을 뽑아들었다.

피스메이커가 찬란하게 빛을 내뿜었고, 촉수 하나가 형태조차 남지 않고 갈가리 찢겼다.

바로 곁에서 슈브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데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질주했다.

거리가 좁혀졌고, 촉수 무리가 쇄도했다. 피스메이커가 휘둘러졌다.

째깍.

움직이는 시곗바늘이 정지했다.

그리고 바로 그 일각(一刻) 속에서, 이계의 용사가 땅을 박찼다.

자신을 향해 휘둘러지는 촉수 위로 올라가, 그대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멈춰 있는 초침이 다시 움직였고, 촉수 위로 다시금 거품들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거품과 촉수들이 데일을 향해 내리꽂혔고, 바로 그때였다.

데일이 딛고 있는 발밑을 중심으로 잿더미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차가운 재의 서』에 깃들어 있는 소멸의 재.

잿더미의 군주가 데일의 곁을 지켰고, 나아가 슈브 역시 참전하며 그녀의 촉수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촉수의 거신이 귀를 찢을 것 같은 포효를 내뿜었다.

그 앞에서 데일의 존재는 그야말로 일개 하루살이에 불과하리라. 그러나 달라질 것은 없었다.

모기 따위의 미물(微物)조차 때로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법이다.

거리가 좁혀졌고, 바로 코앞에서 끝없이 거신의 촉수가 내리꽂혔다.

그에 맞서 소멸의 재와 슈브의 촉수가 흩날렸고, 이계의 용사가 거신의 체내를 찢고 파고들었다.

그 와중에도 그림자 심장이 끝없이 가속하며 ‘태고의 어둠’을 흩뿌리고 있었다.

창조의 힘.

바로 그 어둠이, 이계의 병기로 화하며 거신을 향해 내리꽂혔다.

일찍이 ‘괴수 사냥꾼’으로서 지구를 위협하는 괴수들과 맞설 때처럼.

하늘을 뒤덮고 있는 철갑의 용들, 전폭기(戰爆機)가 끝없이 포화의 세례를 내리꽂았다.

지상에서는 헤아릴 수 없는 미사일이 쏘아졌고, 그것은 말 그대로 지옥의 업화가 휘몰아치는 전장이었다.

핏빛공조차 전율하며 바라마지않은 강철의 제국.

지금 데일이 이 세계에 덧씌우는 것은 바로 그 폭력의 제국이었다.

쿠웅, 쿵! 쿵!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태고의 어둠과 종말의 냉기,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소멸의 불꽃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이계의 용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대로 거신의 체내로 파고들어, 그 끔찍하기 그지없는 육골을 헤집으며 나아가고 있었다.

그 끝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불사의 괴물을 향해서.

거신의 체내에 끝없이 솟아나는 촉수 무리를 쓰러뜨리며, 데일이 걸음을 옮겼다.

비로소 성의 대회당처럼, 텅 비어 있는 고깃덩어리의 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홀의 중심에 죽음을 기다리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아아, 왔구나. 나의 죽음이여.”

그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텅 비어 있는 눈동자가 씁쓸하게 웃었다.

데일이 칼자루를 고쳐 잡고,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거리가 좁혀졌다.

어린아이는 도망치지도 않고, 저항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다가오는 데일을 받아들일 따름이다.

“어째서 조금 더 일찍 깨닫지 못했을까.”

어린아이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데일이 말없이 검을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 늦지 않았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는 산양 뿔의 소녀였다.

“아아, 리제……! 내 사랑스러운 딸아.”

슈브가, 조용히 불사공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불사공이 보기에 그것은 결코 혐오스러운 촉수의 군체가 아니었다.

“이제는 내가 어째서 그토록 그림자에 집착했는지조차 기억해낼 수가 없구나.”

불사공이 자조하듯 웃었다.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 그토록 의미가 있기에, 내 사랑스러운 딸마저 바쳐야 했는지조차.”

─ 이제 됐어, 아빠.

슈브, 동시에 불사공의 딸 리제가 웃었다.

─ 이제 모두 끝났으니까.

끝.

일찍이 종말의 거품이 보여준 그 풍경 그대로였다.

불사공의 최후.

“끝났다는 말이, 이토록 감미롭게 들리기는 처음이구나.”

그러나 그 끝을 받아들이고 있는 불사공의 표정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사랑스러운 딸이 아버지의 품을 휘감았고, 그 위로 데일이 말없이 칼끝을 내리꽂았다.

푸욱!

데일의 검이 불사공의 심장을 꿰뚫었다. 울컥울컥 피가 흩뿌려졌고, 불사공의 표정에 희미하게 미소가 감돌았다.

그대로 그의 육신이 스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후의 잿더미 하나가 사라질 때까지, 슈브는 그저 말없이 아버지의 곁을 지켰다.

비로소 마지막 재 하나가 사라지고 나서야 슈브가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어린 소녀는 그곳에 없었다.

그저 옛 어둠의 어머니가, 기품 있는 미소로 그림자 군주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시험은 끝이 났다.

그림자의 제국은 이것으로 비로소 데일의 발밑에 무릎을 꿇게 되리라.

그토록 바라마지 않은 때가 다가왔다.

불과 빛의 제국을 무너뜨리고, 황금의 군주에게 끝을 가르쳐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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