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 * *
흑색의 붕대를 눈동자에 감고 있는 어린 소녀가 있었다. 그러나 그 여자아이의 육체에 깃들어 있는 것은 결코 아이가 아니었다. 불사공의 여동생, 그리고 작센의 어머니.
“레이디 페르세포네.”
“기어코 이곳까지 올라왔느냐.”
“그대와 쓸데없는 다툼을 벌이고 싶지 않습니다. 물러나십시오.”
그 말에 페르세포네가 조용히 웃음을 터뜨렸다.
“어찌하여 나의 아들을 살려주었지?”
“저는 그림자를 몰살시키고자 이곳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대들이 섬겨야 할 군주의 자격을 증명하고자 왔을 따름이지요. 자비를 베풀 생각은 없으나, 잔학을 수행할 뜻도 없습니다.”
“그림자 제국의 제위를 손에 넣고, 그 왕위를 손에 넣어 무엇을 수행할 것이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수행하겠지요.”
페르세포네는 대답하지 않았다.
─ 비켜렴, 나의 사랑스러운 여동생아.
바로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버니.”
페르세포네가 일순 망설였고, 주저하는 것은 길지 않았다.
“가거라.”
침묵 끝에 페르세포네가 말했다.
“너의 말마따나, 왕의 자격은 오로지 왕의 자격을 가진 이에게 허락되는 자격일지니.”
페르세포네가 물러났고, 데일이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몸에 흐르고 있는 피의 시조, 또 하나의 그림자 군주를 칭왕하는 자.
불사공 프레데릭에게 도전하기 위해서.
* * *
어린 남자아이가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가 눈동자에 두르고 있는 흑색 붕대를 풀어헤치자,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는 어둠이 드러났다.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어린 작센의 아이야.”
“우리의 시조를 다시금 뵙겠습니다.”
남자아이, 불사공 프레데릭이 웃었다.
일전의 뼈저린 패배를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전투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어서 오거라, 사랑스러운 나의 딸아.”
불사공의 말에 데일의 심장을 옥죄고 있는 촉수가 꿈틀거렸다.
“이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 부모로서 아이가 우리의 손을 떠나가는 것에 대하여 말이다.”
“그녀를 산 제물로 바친 것은 당신이었습니다. 자기 손으로 아이를 죽여놓고서, 참으로 염치도 없네요.”
마도서를 집필하기 위해 불사공은 그의 어린 딸을 바쳤다. 공교롭게도 리제의 이름을 가진 딸아이였다.
“내가 아이를 죽였다고?”
데일의 조소에 불사공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
“그럼 『검은 산양의 서』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내 딸아이, 리제는 영겁의 세월에 걸쳐 내 심장 속에서 함께할 수 있었다. 그들이, 그리고 이제는 네놈이 그것을 나에게서 빼앗아갔지.”
불사공이 차갑게 중얼거렸다. 목소리 밑에 깃들어 있는 시린 증오가 느껴졌다. 그 증오에 데일이 어이가 없어 대답했다.
“슈브가 딸아이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다고 해서, 그녀가 당신의 딸이 되지는 않습니다. 슈브는 슈브입니다.”
“그래, 그것이 진실이겠지. 그리고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그림자 군주의 의무일지니.”
프레데릭이 말했다.
“그렇기에 이 아비를 용서해다오, 리제. 더 이상 내 심장에 너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일찍이 딸을 바쳐 집필한 『검은 산양의 서』는 마땅히 불사공의 심장에 존재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불사공은 깨달았다. 더 이상 그녀가 자신의 심장에 돌아오지 않으리란 사실을.
그렇기에, 마법사로서 수행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였다.
“『종말의 거품(Bubble of End)』.”
불사공이 입을 열었다. 동시에 무엇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일대에 색색의 진주처럼 빛나고 있는 거품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거품들 속에는 저마다의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나아가 어느덧 불사공이 딛고 있는 일대의 대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살아 있는 촉수로 이루어진 대지였고, 바로 그 촉수들이 끝없이 거품을 뿜어내고 있었다.
거품이 그리고 있는 풍경들을 보았다.
일찍이 데일이 알고 있는 풍경들이었다.
대지가 멸망하고 폐허가 되어 스러진 풍경,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종말의 세계, 나아가 끝없이 휘몰아치는 냉기와 겨울이 담겨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세계의 끝이 보글보글 떠오르는 거품 속에 비치고 있었다.
“영겁의 세월에 걸쳐 진리를 추구해왔지. 삶의 의미 따위를 진실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네 아비처럼 어리석은 자들을 수없이 보아왔다. 그러나 아, 진리라는 것은 좀처럼 우리 인간들을 배려하는 법이 없느니라.”
“이것이 당신이 추구하는 진리입니까?”
“보아라, 이 잔혹한 진실을.”
불사공이 웃었다.
“우리의 세계는, 시공의 도화지에 끝없이 떠오르고 사라지는 찰나의 거품과 같다.”
“…….”
“과거의 나는 자신에게 불사의 이름을 하사했으나, 결국 영겁의 세월 속에서는 나의 존재조차 하루살이의 발버둥에 지나지 않겠지.”
불사공이 웃었다.
“이 덧없음이야말로, 바로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는 진리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비어 있는 눈동자가, 즐거운 듯이 광희하고 있었다.
“진리의 사도이자 진실의 군주로서, 나에게는 불과 빛의 제국을 이 그림자로 뒤덮을 의무가 있다.”
“유감스럽게도 저는 진리에 대해 별 흥미가 없습니다.”
데일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림자 군주로서의 의무 역시 마찬가지이지요.”
동시에 암혈의 갑주가 그의 육체를 휘감았고, 진실의 눈이 그를 주시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진실조차 결국 하나의 형태가 아니란 것을.
불사공에게 있어서는 결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실이, 데일의 아버지에게는 그렇지 않으리라. 그 역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하나의 진실 같은 것은 없다. 하나의 사상(事象)을 보고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시야로 진실을 헤아린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저는 당신의 진실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림자 군주가 조용히 웃었다. 동시에 덧없이 떠오르고 있는 거품들이, 일제히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거품 속에 담겨 있는 세계들이 차례차례 무너져 내렸다.
무너지는 세계가, 데일과 불사공이 딛고 있는 대지를 뒤덮었다.
“진실은 우리를 배려하지 않는다, 아이야.”
불사공이 개의치 않고 웃었다.
동시에 거품들이 터지고, 거품 속에 담겨 있는 세계의 종말이 홍수처럼 데일과 불사공의 세계를 뒤덮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운석이 떨어져 멸망하는 세계도 있었고, 핵무기가 대지를 뒤덮고 행성이 황폐화되는 세계도 있었다. 데일조차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병기가 행성 하나를 통째로 부서뜨리거나, 행성 전체를 유리화(琉璃化)하는 풍경도 있었다.
헤아릴 수조차 없는 행성과 세계, 영장들의 세계가 무너지는 종말의 형태.
바로 그 형태가, 일제히 두 사람의 세계를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운석이 떨어지고, 핵이 폭발하고, 알 수 없는 미지의 병기가 내리꽂혔다.
불사공 프레데릭이 보여주는 것은, 지상에 존재하는 온갖 종말의 형태를 펼치고 있는 파괴의 신 그 자체였다.
“지금도 이 세계에는 헤아릴 수조차 없는 숫자의 별들이 파멸하고 사라지지. 물 위의 거품이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불사공이 기록하는 것은 바로 그 파멸의 과정이었다.
말 그대로 천벌의 신이었다.
“참으로 덧없고 허무하지 않느냐.”
“그것이 당신이 이 세계에 가져올 진실입니까?”
불사공 프레데릭이 말없이 웃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전율할 정도의 힘 앞에서, 나직이 숨을 삼키며.
데일의 터무니없는 성장조차 덧없게 느껴질 정도의 힘.
그러나 달라질 것은 없었다.
“저는 마지막까지 슈브와의 약속을 이행할 겁니다.”
데일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설령 이 세계의 그 무엇을 목도해도, 마지막까지 인간으로 남기를 관철하리란 약속을.”
“참으로 덧없구나.”
“무엇 하나 덧없지 않습니다.”
데일이 고개를 저었다.
그림자 군주가 암혈의 갑주를 휘감고, 그가 가진 열네 개의 서클들이 가속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불사공이 팔을 휘저었다.
그가 펼치고 있는 거품들, 『종말의 거품』에 담겨 있는 세계의 파멸들이 데일의 존재를 집어삼켰다.
핵이 터지고 미지의 병기가 행성을 파괴하고 알 수 없는 역병에 의해 멸망하고, 나아가 시간이 감기며 세계가 종말의 겨울 속에 얼어붙는 파멸들이.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끝’이 끝없이 데일을 집어삼켰고, 그 속에서 데일의 존재 같은 것은 그야말로 날파리에 지나지 않았다.
거품들이 담고 있는 종말을 모조리 쏟아내고, 불사공이 그곳에 있었다.
여전히 헤아릴 수조차 없이 남아 있는 거품들을 뒤로하고.
“형태조차 남지 않았구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데일이 있어야 할 곳에 덧씌워진 종말의 숫자는 어림잡아 수천 가지의 형태가 넘으리라. 저것은 결코 일개 필멸자가 감당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랬어야 했다.
“거품도 거품 나름이지.”
“……!”
아무것도 없었어야 할 그곳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사공의 표정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부수는 자가 있고, 짓는 자가 있다.
불사공이 소멸의 힘을 손에 넣었듯이 데일이 손에 넣은 것은 결코 그에 뒤지지 않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의 그림자는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
끝없는 잠재력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그림자.
“당신의 말마다나, 진실은 결코 우리를 배려하지 않습니다.”
그림자 군주가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당신을 배려하지 않는 진짜 진실입니다.”
불사공이 다시금 종말이 담겨 있는 거품들을 흩뿌렸고, 거품이 터지며 그 속에 담겨 있는 파멸이 쏟아졌다.
그러나 아무리 거품 속에 담겨 있는 종말이 흘러내려 데일의 존재를 수몰시켜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 세계는 결코 허무하지 않고, 덧없지 않다는 것을.”
“…….”
“이 세계를 부정하고 덧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당신의 패배를 합리화하고 자신을 긍정하기 위한 거짓이 아닙니까?”
그림자 군주가 말했다. 불사공의 그림자 속에 깃들어 있는 진실을 보며.
“이 세계가 덧없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당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같으니까요.”
하나의 세계가 소멸하고 파멸이 쏟아질 때마다, 하나의 세계가 태어나고 창조되고 있었다.
빛이 있으라.
처음 이 세계의 신(神)이 그 말을 했을 때, 빛은 어둠 속에서 태어났다.
“이 세계를 빚은 것은 어둠입니다.”
그렇기에 비로소 그림자 군주는 자신이 가진 어둠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옛 어둠의 어머니가 가진 말의 의미 역시도.
“그리고 당신이 생각하는 ‘종말’이란 것은 엄밀히 말해 종말조차 아닙니다.”
나아가 데일이 다시금 조소했다. 그가 보여준 세계의 끝이란 것은 우주 전체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하나의 티끌이 사라지는 것과 다르지 않을 테니까.
“당신에게 이 세계가 맞이해야 할 진짜 종말을 알려드리지요.”
그렇기에 그림자 군주가 말했다.
태고의 어둠과 종말의 냉기를 거느린 채, 시작과 끝의 사도로서.
진짜 종말이 두 사람의 세계를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