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 * *
죽음 앞에서 덧없어지는 것들, 그것은 너무나도 많아서 일일이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조차 덧없어지지 않는 것들은 그렇지 않았다.
내일 당장 죽음이 찾아온다고 했을 때, 우리는 무엇을 수행해야 할까? 찬란하게 빛나는 부와 명예조차 죽음의 앞에서는 덧없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여섯 장의 흑색 날개를 가진 죽음의 신이, 죽음과 함께 그의 힘을 흩뿌렸다.
까악, 까악!
휘몰아치는 까마귀 떼가 옛 작센의 가주들을 쪼아먹고 있었다.
그 어느 마법이나 저항으로도 막을 수 없는 까마귀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며 엘드리치들의 로브와 그 밑에 숨겨진 어둠을 향해 부리를 쪼아댔다.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비명이 울려 퍼졌고, 그 속에서 흑색공이 묵묵히 침묵을 지킬 따름이었다.
무심코 생각했다. 흑색공이 굳이 마도서 『심장의 저울』을 손에 넣고 ‘죽음’과 함께하는 것은, 바로 이날을 대비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저들 엘드리치와 데일이 정정당당하게 맞설 때를 헤아렸다. 아무리 흑색공에 비할 바 아니라고 하나, 지금처럼 일방적으로 쓰러뜨릴 적수조차 아니었다.
그러나 데일의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천적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리라.
죽음을 알지 못하고 영겁의 세월을 살아가야 할 불사의 존재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까마귀 떼 앞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치기 바빴다.
히치콕의 영화 『새』에 등장하는 희생자들처럼 비참하고 처절하게.
“시험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그러나 흑색공의 모습에 방심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앞길을 가로막는 엘드리치들을 제압하며, 덤덤히 걸음을 내디딜 따름이다.
탑의 꼭대기, 불사공 프레데릭과 작센의 어머니가 기다리는 그곳을 향해서.
* * *
“아, 앨런. 기다리고 있었다.”
탑의 상층에 이르렀을 즈음, 그곳에 있는 것은 오직 하나의 엘드리치였다.
“어찌하여 진리를 망각하고 일족과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났느냐, 부끄러운 나의 아들아.”
“……아버지.”
“아직 늦지 않았다.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거라. 이 아비와 네 어미는 기꺼이 너를 용서해줄 준비가 되어 있으니.”
지금까지 흑색공의 앞을 가로막은 옛 가주들과 달리, 무척이나 또렷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말에 데일은 말을 잇지 못하고 침묵을 지킬 따름이었다.
대대로 불사의 삶을 택하고 그림자 마탑의 꼭두각시로 전락하는 작센의 가주들. 그것은 흑색공의 아버지 역시 예외일 수 없었으므로.
“저는 이미 가족의 품에 있습니다.”
흑색공이 대답했다. 후드 밑으로 무척이나 불길하기 그지없는 어둠이 꿈틀거렸다.
“청색에 홀려 네 어미와 내 아내의 아들들, 너의 동생들마저 도륙하는 패악을 저지르겠다는 것이냐.”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 의지입니다.”
“그럼 네 의지로 이 아비마저 주저하지 않고 쓰러뜨릴 셈이냐?”
“비켜주십시오, 아버지.”
“그럴 수는 없다, 아들아.”
“그럼 저 역시 어쩔 수 없지요.”
흑색공이 말했다.
“데일, 이 앞으로 나아가거라. 내가 너를 이끌어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놔둘 수는 없다.”
데일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흑색공의 아버지가 팔을 뻗었다.
후우웅!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기어코 네가, 이 아비와 네 어미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구나.”
지금까지의 엘드리치들과 감히 비할 바 없는 어둠이 휘몰아쳤다. 그러나 그것을 가로막는 것은 흑색공의 몫이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상대로 일말의 주저도 없이, 여섯 장의 흑색 날개가 펼쳐졌다.
“기다려주세요, 아버지.”
그 모습을 뒤로하고 데일 역시 망설이지 않았다.
이 그림자 마탑의 끝자락까지 다다르며, 흑색공이 보여준 어둠의 힘과 마법. 비로소 흑색 마탑주가 그의 후계자를 향하는 수업이 끝을 맺었다.
이 앞부터는 오로지 데일이 홀로 수행해야 할 싸움이다.
그렇기에 지금으로서는 그저 나아갈 때였고, 이 위에 있는 그림자 제국의 제위(帝位)를 손에 넣어야 할 때였다.
그림자 마탑의 정점, 작센의 어머니와 불사공이 기다리고 있는 그곳으로.
* * *
“네가 동생의 아들이구나.”
흑색공이 그의 아버지와 맞서고 있는 다음 층계, 그러나 여전히 불사공과 레이디 페르세포네는 그곳에 없었다.
그곳에 있는 것은 또 하나의 엘드리치였다.
“동생……?”
“우리 작센의 일족은, 모두가 하나의 어머니를 두고 있는 형제들이지. 다를 것이 뭐가 있겠느냐?”
엘드리치가 말했고, 그 말에 데일이 어이가 없어 생각했다.
‘아주 그냥 개족보가 따로 없네.’
“그림자 군주를 참칭(僭稱)하는 찬탈자야. 너를 내 아내이자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보낼 수는 없다.”
아내이자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그 말뜻을 헤아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정말이지 꼬일 대로 꼬여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엄두조차 나지 않는 족보였다.
불사공 프레데릭과 레이디 페르세포네의 아들, 동시에 그녀는 아들의 아내를 자청함으로써 작센의 피와 순수성을 보존했다. 대에 대를 이어, 바로 데일의 아버지 흑색공의 대(代)에 이르기까지.
“저에게는 마땅히 자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격에 따라 정당하게 시험을 수행하는 중이지요.”
“내가 이곳에서 네놈을 쓰러뜨리는 것 역시, 정당한 시험의 일부일 테지.”
“그 말대로입니다.”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의 심장에 새겨진 서클이 가속하기 시작했다.
6서클의 경지, 거기에 더해 청색의 흑막이 아들에게 남겨준 하나의 서클.
도합 일곱 개의 서클이 가속했고, 나아가 그 서클의 그림자들 역시 가속하기 시작했다.
열네 개의 서클이 가속하며, 발밑을 중심으로 일대의 세계를 집어삼켰다.
이전에 불사공 앞에서 무력하게 패배할 때의 데일이 아니다. 나아가 하루가 멀다고 성장하는 데일조차, 지금의 자기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어느 의미에서는 진짜 승부를 앞두고, 역량을 시험하기 위해 최적의 상대라 말할 수도 있으리라.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 암혈의 갑주가 데일의 육체를 휘감았다.
그림자 심장을 휘감고 있는 슈브의 서클이, 끝없이 어둠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전능감이 데일의 의식을 집어삼켰다.
가속하는 서클을 따라 끝없이 생성되는 태고의 어둠이, 마치 아이들이 주물럭거리는 점토처럼 느껴졌다.
시험 삼아 그림자를 응축시켜, 하나의 형상을 빚어냈다.
무기를 들고 있는 병사였다.
동시에 어둠으로 이루어져 있는 피조물에 생명이 깃들었다.
“아버지에게 네놈 따위의 찬탈자를 가게 할 것 같으냐……!”
병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이 휘둘러졌고, 불사공의 아들이 소리쳤다.
카앙!
엘드리치의 발밑에서 촉수들이 솟았고, 그림자 병사를 무참히 집어삼켰다.
“겨우 이 정도냐.”
데일의 그림자 피조물을 집어삼키며 불사공의 아들이 조롱했다. 그러나 데일은 덤덤히 침묵을 지킬 따름이었다.
그저, 다시금 팔을 뻗었다.
그림자 심장을 따라 가속하는 서클이 태고의 어둠을 뿜어냈고, 데일이 그 어둠을 빚기 시작했다.
또다시 병사들이었다.
‘이것들은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 그러나 어째서 검병(劍兵)을 창조했지?’
그럴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는데.
자기에게 되묻고 나서, 팔을 휘젓는다. 병사들이 쥐고 있는 무기의 형태가 바뀌었다.
총기를 쥐고 있는 병사들이었다.
데일이 창조하는 어둠에는,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가능성’이 깃들어 있었다. 그렇기에 데일이 어둠을 빚으며 바라는 것을 창조했다.
자동소총을 쥐고 있는 총병들. 그들이 방아쇠를 당겼고, 총알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겨우 이 정도의 볼트 마법으로 그림자의 왕을 참칭하려는 것이냐!”
엘드리치가 노호하며 어둠속에서 촉수를 뿜어냈다. 그 말대로다. 이 존재가 보기에 이것은 그저 빠르고 살상력이 높은 볼트 마법에 불과하겠지. 적어도 고위 마법사를 상대로 쓰기에 적합하지는 않으리라.
“그렇겠지.”
다시금 그림자 군주가 팔을 뻗었다.
“──불이 있으라.”
데일이 중얼거렸다. 동시에 그의 그림자가 점토처럼 무엇을 빚었고, 엘드리치를 향해 내리꽂혔다.
비로소 어둠이 벗겨지고 그것이 실체를 드러냈다.
업화(業火)가 휘몰아쳤다.
그야말로 미사일이 내리꽂히는 것 같은 화염 속에서, 엘드리치가 발악하듯 어둠의 촉수를 내뿜었다.
타앙!
바로 그때였다.
다시금 총알이 내리꽂혔다. 그러나 그것은 일개 총알이 아니었다.
청색 마탑주가 빚은 ‘청색 불협화음’을 장전하고 있는 저격수의 일발(一發)이었다.
마력 해체 구조물.
마력의 결속 그 자체를 깨트리는 청마법사의 특기, 그리고 지금 데일이 펼치는 것은 청색 마탑의 정점에 서는 마법사와 같은 수준의 결과물이었다.
바로 그 청색 불협화음이, 데일이 빚은 그림자 병사들의 약실(藥室) 속에 넣어져 끝없이 발포되고 있었다.
엘드리치의 존재는 그 자체로 불사를 유지하기 위한 마법의 형태다. 그리고 데일이 내리꽂고 있는 청색 불협화음의 총알이 꽂힐 때마다, 그것은 존재의 결속 그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아, 아아아……!”
데일에게 있어 이것은 싸움이 아니었다. 그저 새 능력을 음미하는 시험의 장에 불과했다.
그러나 데일과 맞서는 불사공의 아들에게는 절대로 그렇지 않으리라.
그림자 군주가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그림자 병사들의 총격이 멈추었다.
비참하게 발버둥치고 있는 엘드리치가 있었다.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죽음마저 속일 수 있다는 불사의 존재를 앞두고, 데일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죽음이 두렵나?”
“네놈, 네놈이 어떻게……!”
“물러나라.”
그림자 군주가 말했다.
“그리고 시험이 끝나고 나서, 그림자 제국의 제위에 앉을 새 군주를 기다려라.”
“네놈을 절대 아버지에게 다가가게 할 수는 없다!”
엘드리치가 절규하듯 촉수를 뿜었다.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의 싸움, 아들의 싸움. 이곳에 있는 그림자 마탑과 살아 있는 작센의 두 부자는, 마치 서로의 거울처럼 비슷하며 동시에 엇갈려 있었다.
그의 마음과 결의를 이해할 수 있었다. 데일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으니까.
그렇기에 더더욱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촤아악!
어느덧 그곳에는 거미줄이 펼쳐져 있었다.
창백하게 시린 빛을 뿜어내고 있는 청색의 거미줄이었다.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거미줄이 엉키고 성키며 엘드리치의 존재를 포박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덧없고 가엾게.
청색 마탑주, 어머니가 그녀의 아들에게 준 청색의 힘과 지혜.
거미는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을 동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코 거미줄에 걸리는 족족 먹잇감을 포식할 정도로 게걸스럽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데일이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탑의 시험에 끝을 맺고, 그림자 제국의 제위를 손에 넣기 위해서.
불과 빛의 제국, 황금과 거짓의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한 자격을 손에 넣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