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32화 (232/301)

232화

* * *

시스티나 교국, 그리고 사해 군도의 독립 포고.

일찍이 제국 앞에서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려야 할 백색 마탑이 봉기를 일으켰다.

지금까지 하나의 제국을 천명하고 있는 질서가 무너졌고, 뇌관(雷管)들이 비로소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잇달아 터지고 있는 폭발을 통제하는 것은, 세상의 끝에서 그림자 제국의 황위를 손에 넣고자 시험을 치르고 있는 ‘검은 공자’였다.

일찍이 그의 어머니이자 청색 마탑주가 물려준 유산을 통해서.

그날, 청색의 흑막이 데일에게 넘겨준 것들을 받고 나서 이해할 수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 속에서 청색 마탑이 침묵을 지켜야 할 이유는 오직 하나, 바로 이날을 위해서였다는 것을.

그리고 설령 그 동기가 황금과 그림자의 대립에서 시작된 일이라 할지라도, 어느 시점 이후부터 청색 마탑주에게 그것은 고대로부터 이어진 맹신(盲信)을 위한 싸움이 아니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지키기 위한 어머니로서 그녀는 청색의 거미줄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나아가 청색 마탑이 가진 비밀이 모조리 데일의 손에 들어왔을 때, 청색을 지배하는 아라크네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엘레나가 아니었다.

─ 브리타니아 섬에서 그대의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청색의 나비가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 속삭임을 듣고 나서 칠흑의 오렐리아는 망설이지 않았다.

데일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 그녀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그러나 여전히 그녀가 있는 곳은 데일의 그림자 속이었다.

청색 마탑주의 힘을 계승한 데일은 이제, 대륙 전체에 걸쳐 그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으니까.

브리타니아 섬으로 향하고 있는 어느 배 위에서, 로브를 둘러쓴 오렐리아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 당신의 조국을 되찾기 위해 죽여야 할 자들의 목록입니다.

그 후, 이름들이 흘러나왔다. 일찍이 ‘검은 공자’에 의해 신생 브리타니아 왕국이 몰락하고 그 자리를 지배하고 있는 제국의 총독. 그리고 그들과 협력하고 있는 조국의 배신자들. 칠흑의 성처녀로서 수행해야 할 살생부.

불사공이 그의 눈동자를 잃고 그 너머의 것들을 보게 되었듯, 청색을 계승한 데일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데일에게는 진실을 볼 수 있는 두 개의 눈동자가 여전히 존재했고, 그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아들을 위해 옛 작센의 조상들과 맞서기를 기꺼이 주저하지 않는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

“역시 너무나도 아깝구나.”

레이디 페르세포네가 입을 열었다. 흑색 붕대로 눈동자를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야 할 그녀가, 정말이지 참을 수 없다는 듯 미소 지으며.

“앨런, 너처럼 재능 넘치는 아이가 청색의 요녀에게 홀려 진리의 구도자가 되기를 저버릴 줄이야.”

“말했듯이 그것은 오롯이 저의 결정입니다.”

흑색공이 대답했다.

“저는 살아 있는 작센 유일의 가주(家主)이며, 그렇기에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제 결정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제국 제일의 대제후이자 흑마법사로서, 그에 걸맞은 냉정함을 가지고.

동시에 그의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 방패를 자처하며.

“그대를 보고 있자니, 에리스가 그녀의 임무를 지나치게 훌륭하게 수행했나 보구나.”

“그녀는 미숙한 저를 보좌하며 참으로 많은 것들을 가르쳤고, 이끌어주었지요.”

흑색의 대행자, 에리스. 그녀가 흑색을 대행하고 있다는 말의 의미는 결코 흑색 마탑주 하나를 일컫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이곳, 고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망친 그림자의 잔당이자 흑색파(The Black)를 위해 산 자들의 땅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대리자였으니까.

마탑주가 되는 것은 결코 일대의 수행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대에 대를 거듭해 작센의 가주들이 쌓아 올린 지식을 축적하고 계승하는 것.

고작 불혹에 지나지 않는 흑색공이 손에 넣은 것은 대에 대를 거듭해 이어진 어둠의 지식이었다.

“그러나 그대가 제 발로 그림자의 폐허를 찾아왔듯, 우리 흑색의 침묵은 여기까지다. 황금의 제국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비로소 그림자가 일어날 때가 되었지.”

레이디 페르세포네가 말했다.

“그리고 이 자리는 그림자의 정점에 서는 자를 가리기 위한 성스러운 장이다.”

옛 작센의 가주들, 흑색파, 그림자 마탑, 그리고 살아 있는 작센 가의 두 부자.

“그리고 그대에게는 자격이 있노라, 앨런.”

페르세포네가 말했다. 그야말로 애걸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이제라도 돌아온 탕아(蕩兒)가 되어, 다시 흑색이 추구하는 진리의 구도자로 거듭나줄 수 없겠느냐?”

“유감스럽게도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옛 어둠의 어머니께서는 그녀의 의지로 기꺼이 제 아들을 택하셨지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느냐?”

페르세포네가 되물었다.

“지금 당장 저 아이의 심장을 뽑아, 거기에 있는 『검은 산양의 서』를 적출할 수도 있지. 잊지 말아라, 우리 옛 어둠의 어머니가 앞서 임하신 것은 그 아이가 아니라 그대였다는 것을.”

“……!”

데일이 일순 숨을 삼켰다. 동시에 여섯 장의 흑익을 펼치고 있는 흑색공이, 데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차갑고 낯설기 그지없는 표정이었다.

“그 힘을 손에 넣어라. 내 오라버니는 말할 것도 없고, 이 대륙의 누구도 대적하지 못할 힘을 손에 넣을 것이다.”

“…….”

“이렇게 부탁하마. 나의 사랑스러운 아들아. 부디 탕아의 삶을 마치고 이 어미의 곁으로 돌아와다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

레이디 페르세포네가 말했고 흑색공이 고개를 저었다. 그 말에 일순 데일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어머니……?”

“아, 정말이지 저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구나.”

페르세포네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동시에 그녀의 그림자 속에서 비치기 시작하는 진실이, 그녀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왔다.

“우리 작센의 혈족이 어떻게 이어졌고, 어떻게 그 위대한 피의 어둠과 순수성이 보존되었는지.”

“…….”

“바로 이 몸이다.”

레이디 페르세포네가 말을 잇는다.

“내가 바로 여기 있는 아이들의 어머니이자, 아내이니라. 오직 저 아이, 거기 있는 저 청색의 핏줄로 더럽혀진 혈통의 아이를 제외하고 말이지.”

흑색의 붕대로 눈동자를 가리고 있는 어린 소녀가 말했다. 그곳에 있는 ‘검은 공자’를 가리키며.

나아가 그녀의 피를 잇고 있는 부군이자 아들들로 이루어진 엘드리치들이 그곳에 있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뒤로하고, 데일이 숨을 삼켰다.

작센의 혈족 중에서 유일하게 ‘그녀’의 몸에서 잉태되지 않은 아이. 그것이 바로 데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데일의 몸에 흐르고 있는 것은 흑색공과 어머니 엘레나의 피였으니까.

그러나 그 윗대, 적어도 흑색공의 아버지가 되는 조부(祖父)의 대부터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 작센의 가주들에게 허락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의 아내이자 어머니였으니까.

작센의 어머니가 그곳에 있었다.

“사랑하는 나의 앨런, 아직 이 잘못을 돌이킬 기회가 남아 있느니라.”

짤막하게 정적이 내려앉았다.

유리스의 일족, 그리고 작센의 일족. 다를 것은 없었다. 아무리 사람의 탈을 쓰고 있어도 그 실체는 결국 추악하기 그지없는 괴물에 불과했다.

제국을 지배하는 사람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들, 그것은 작센 공작 가조차 예외일 수 없었다.

그리고 데일의 아버지, 흑색공은 그 업(業)을 잇기를 거부했다.

옛 가주들 모두가 그러했듯 자신의 어머니를 아내로 받아들이지 않고, 청색 마탑주와 손을 잡아 데일과 리제를 낳았으니까.

지금까지 알지 못하는 싸움을 계속하는 것은 데일 하나의 몫이 아니었다. 흑색공 역시 마찬가지였다.

“말씀드렸듯이, 저는 제 아들을 위해 정당하게 그림자의 왕위를 물려주기 위한 기수에 불과합니다.”

“……정녕 이 어미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것이냐.”

“옛 어둠의 어머니께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탑의 시험은 고대의 절차에 따라 정당하게 치러지겠다고, 어머니 역시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사방에서 살기와 어둠을 내뿜고 있는 엘드리치들을 뒤로하고, 흑색공이 말했다.

데일과 더불어, 이 자리에 남아 있는 유이(唯二)의 인간으로서.

“그 정당한 시험 속에서 패하고 스러지는 것조차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레이디 페르세포네, 작센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흑색공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아들들을 지나 올라오거라. 나와 나의 오라버니가, 높은 곳에서 기꺼이 그림자 군주의 이름을 칭왕하는 저 아이를 기다릴 터이니.”

페르세포네의 육골이 어둠 속으로 녹아들며 사라졌고, 남아 있는 엘드리치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시험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들에 맞서 서클을 가속하려는 데일을 저지하며, 흑색공이 말했다.

“저들과 맞서는 것은 너의 역할이 아니다.”

“그러나…….”

“이 탑의 높은 곳에서, 작센의 시조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지. 불사공과 레이디 페르세포네 앞에서 왕의 자격을 증명하는 것이야말로 네가 수행해야 할 역할이다.”

그 말을 듣고 데일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에 보고 배우거라.”

나아가 흑색공이 여섯 장의 흑색 날개를 펼치며 말했다.

“이것이 내가 너에게 가르치게 될 마지막 수업이 될 테니.”

“그럴 리가요.”

그 말을 듣고 데일이 씁쓸하게 웃었다.

“설령 제가 불사공을 쓰러뜨리고 이 탑의 정점에 올라도, 여전히 아버지에게 배워야 할 것들이 남아 있습니다.”

데일이 말했다. 동시에 엘드리치들이 그들의 서클을 가속하며 저마다의 세계를 펼치기 시작했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공허로 가득 차 있는 세계가, 흑색공과 데일을 집어삼켰다.

동시에 저물녘의 어스름으로 가득 차 있는 황무지가 흑색공의 발밑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 아, 여기 죽음 없는 삶들이 가득하구나.

빅토리아풍 정장 차림의 신사, 죽음(Death)이 그곳에 있었다.

─ 그리고 죽음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서는 아무 가치도 의미도 찾아볼 수 없구나.

“많은 이들이 나를 일컬어 ‘진리를 찾는 일’을 포기했다고 손가락질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깨달은 것,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의 진리와 진실이란 오직 하나였다.”

흑색공이 말했다.

“죽음이다.”

데일이 말없이 침묵을 지켰고, 흑색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죽음 앞에서 덧없어지는 것들을 생각해보아라. 동시에 죽음 앞에서조차 덧없어지지 않는 것들을 생각해보아라. 오늘이 너에게 있어 세상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럼에도 여전히 빛바래지 않고, 오히려 더더욱 찬란히 빛나는 일들을 생각해라.”

“…….”

“삶의 끝자락에서, 죽음을 앞두고 해야 하는 일들을 생각해라. 누구도 죽음을 바라지 않으니, 따라서 죽음이란 도망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렇기에 피할 수 없는 숙명이 다가오기 전까지 네가 수행해야 할 사명을 떠올려라.”

그 말을 듣고 데일이 조용히 숨을 삼켰다.

“이것이 내가 너에게 주고자 하는 마지막 가르침이다.”

“그럼 아버지께서는…… 죽음 앞에서 무엇을 수행하고자 하십니까?”

“너의 어머니와 같은 것을 바라고 있다.”

아들을 위하는 어머니로서 청색 마탑주가 결정을 내렸듯, 그것은 흑색 마탑주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영겁의 망집 속에서 의미와 진정한 가치마저 망각하고, 황금과 그림자로 이루어진 고대의 맹신에 묶여 있는 이들을 보아라. 이것이 죽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말로다.”

그 말을 듣고, 데일이 조용히 웃었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이야기하는 흑색공의 말에도 불구하고, 당황할 것은 없었다.

죽음을 알지 못하는 저들이, 데일의 아버지에게 상처 입히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에.

이것은 그저 수업이었다.

그리고 데일의 말마따나, 이곳에서 쓰러지기에 그의 아버지는 너무나도 정정했다.

탁!

‘죽음’이 비로소 그의 지팡이를 내리쳤다.

푸드덕!

어느덧 불타고 있는 저물녘 하늘을, 칠흑의 까마귀 떼가 가득 메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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