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31화 (231/301)

231화

* * *

어둠 속에서 며칠이 지났을까.

황금의 제국 앞에서 패배하고 스러진 그림자 제국의 폐허, 바로 그곳에 두 부자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 군주를 칭왕하는 이들의 시험, 나아가 이 그림자 제국을 다스릴 황제의 자격을 손에 넣기 위한 ‘시험’이 치러지는 그곳에.

로브를 두르고 있는 불사자들이 있었다.

불사공 프레데릭 앞에서, 대에 대를 거듭해 충성을 맹세하는 작센의 가주이자 후손들이었다.

후드 밑으로 휘몰아치는 어둠이 무척이나 불길했다. 그 속에 꿈틀거리고 있는 그림자의 실체를 파악하는 일마저 두려울 정도로.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들 사이에서 어린 여자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불사공과 마찬가지로, 흑색의 붕대로 눈동자를 가리고 있는 소녀였다.

“그림자 군주의 이름을 칭왕하는 자여.”

“…….”

데일이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부디 들어오시지요.”

그대로 여자아이가 팔을 뻗었고, 작센의 옛 가주들이 데일과 흑색공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대를 위해,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한 시험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와 어둠 속에서, 두 부자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황금이나 그림자 같은 고대의 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마땅히 그들이 지켜야 할 것들을 손에 넣기 위해서.

* * *

그것은 흑색 마탑과 다를 바 없는 탑의 시험이었다.

그마저 고작 ‘열두 개의 층계’로 이루어져 있는 우스울 정도로 초라하기 그지없는 탑이었다.

그러나 그림자 마탑의 이름을 가진 이 탑에서, 그 층수 하나하나가 의미하는 것은 결코 가볍지 않으리라.

“당대 작센의 가주, 흑색공. 그대 역시 그림자 군주의 이름을 넣기 위해 이곳에 오셨습니까?”

흑색 붕대를 쓴 여자아이가 물었다. 그 말에 작센 공작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저, 제가 섬기는 군주의 기수(旗手)를 자처해 이곳에 왔을 따름입니다. 이곳에 계시는 저의 조상들께서 불사공의 기수를 자처하듯 말이지요.”

그 말에, 로브 차림의 《엘드리치》들 사이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소리가 이어졌다.

“그대들이 불사공을 위해 제 아들의 길을 가로막듯, 저 역시 아들을 위해 그대들이 가로막고 있는 층을 앞서 통과하고자 합니다.”

“아버지……!”

그 말의 의미를 헤아리고 데일이 숨을 삼켰다.

“아무리 고대의 전통에 따라 치러지는 시험이라 해도, 너 홀로 이 탑의 마지막까지 올라갈 수는 없다.”

흑색공이 말했고, 데일이 침묵을 지켰다.

“걱정하지 말아라, 데일.”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그 말을 듣고 흑색 붕대의 소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작센의 앨런, 인간으로 남기를 자처한 작센의 자랑스러운 아이야.”

“……레이디 페르세포네.”

“나는 네가 불사의 삶을 손에 넣고, 나아가 이 탑의 정점에 앉기를 바랐다.”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저에게 어울리는 자리가 아닙니다.”

“너에게는 ‘그림자 군주’의 이름에 그 누구보다 어울리는 재능과 자격이 있었다. 나의 오라버니, 불사공보다도 말이지.”

“말했듯이, 저에게 있어서는 인간을 포기하며 얻을 가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흑색공이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는 일말의 의심조차 없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그럼 너의 곁에 있는 아이는 어떠하느냐?”

레이디 페르세포네가 데일을 향했다.

“너는 인간을 포기하며 이 그림자 제국의 정점에 앉기를 바라느냐?”

“저는 이미 많은 것을 포기했습니다.”

데일이 대답했다. 태고의 어둠과 종말의 냉기를 품고 있는 시작과 끝의 대리자로서.

“그러나 저의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셨듯, 저 역시 인간을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네 육체를 보아라, 작센의 가장 어린 아이야.”

레이디 페르세포네가 웃었다.

“그 피부 속에서 돌고 있는 피의 색깔, 네 심장에 드리워져 있는 그림자, 어느 누가 너를 보고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겠느냐?”

암혈의 육체와 그림자 심장. 그 기괴하기 그지없는 육체의 형태는, 그녀의 말마따나 도무지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괴물의 초상이었다.

─ 아, 바로 이 몸이니라.

바로 그때였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와 동시에 일대의 공기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 아아……!”

레이디 페르세포네의 표정이 일순 얼어붙었다.

“어머니, 우리 옛 어둠의 어머니시여……!”

데일의 곁에서 기품 있는 숙녀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 형상은 데일 이외의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 이 아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이기를 포기한 너희 앞에서, 그림자로 가득 차 있는 몰락한 제국의 옥좌에 앉기를 바라고 있지.

페르세포네를 비롯해 작센의 옛 가주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고대의 전통에 따라, 그림자의 왕을 결정하는 시험은 정당하게 치러질 것입니다.”

─ 암, 그렇고말고. 이 몸 역시 지켜보고 있을 것이니라.

슈브가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데일이 묵묵히 침묵을 지켰고, 머지않아 페르세포네와 작센의 가주들이 고개를 들었다.

“흑색공.”

“말씀하십시오, 레이디 페르세포네.”

“나의 오라버니, 불사공께서는 이 탑의 꼭대기에 기거하고 계시다. 그리고 작센의 옛 가주들이 그대와 그림자 군주를 칭왕하는 아들의 앞을 가로막겠지.”

“그 점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대 역시 그대가 섬기는 군주의 기수를 자처하며, 앞을 가로막는 자들을 돌파할 자격이 주어질 것이다.”

“그것으로 족합니다.”

흑색공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폐허가 되어 있는 그림자의 제국, 그리고 그 제국의 옥좌에 앉기 위한 싸움.

도전자 데일의 곁을 지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아버지였고, 그 도전에 응시하는 것은 일찍이 작센의 시조라 불리는 불사공 프레데릭이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 헤아릴 수 없는 옛 작센의 가주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림자의 시험이 시작되었다.

* * *

첫 시험, 1계층.

불사공을 그림자 군주로 섬기며 그의 기수를 자처하는 작센의 옛 가주들이 있었다.

그들에 맞서는 것은, 왕을 섬기는 신하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아들을 위해 헌신하는 아버지의 몫이었다.

작센 공작으로서는 헤아릴 수조차 없는 조상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죽음을 속이는 자, 나아가 이 어둠의 땅을 지배하는 그림자술사들의 수장으로서.

엘드리치(Eldritch).

그들을 앞에 두고, 그러나 결코 죽음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데일의 아버지, 대륙 제일의 사령술사, 나아가 흑색 마탑의 정점에 서는 자로서.

“작센의 앨런, 우리 옛 작센의 가주를 뵙나이다.”

흑색공이 덤덤하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그리고 그를 앞에 두고 있는 엘드리치 하나가 있었다.

후드 속으로 그저 끝없는 어둠을 품고 있으며,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그저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바람 소리에 불과했다.

제 의지로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그림자의 망령.

‘…….’

그 모습을 보고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을 포기하고 죽음으로부터 도망쳐, 불사를 손에 넣은 대가.

그곳에 있는 것은 더 이상 ‘사람’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무엇이었다.

자아라고 부를 수 있는 조각조차 없이, 영겁의 세월을 대가로 그가 잃어버린 것들을 떠올렸다.

작센의 옛 가주, 엘드리치가 팔을 뻗었다. 동시에 그의 심장을 중심으로 서클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여덟 개였다.

대륙의 다섯 마법사라 일컬어지는 마탑주, 그 상징과도 같은 8개의 서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저것이 정녕 8서클의 경지라고?’

경외(敬畏)가 아니었다.

‘그럴 리가 없다.’

오히려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 그 자체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심장에서 여덟 개의 서클이 가속되는 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었다. 데일의 아버지, 흑색공과 동등하며 대륙의 다섯 마법사라 일컬어지는 그 경지.

그러나 그 엘드리치의 8서클이 휘몰아쳤고, 그것을 상대는 흑색공의 표정에는 미동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을 포기하고 불사를 손에 넣는다. 그리고 영겁의 세월에 걸쳐 마도를 갈고닦는다.

얼핏 보기에 그야말로 마법사로서 더할 나위 없는 지고의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영겁 속에서 작센의 옛 가주가 펼치는 마법은 그렇지 않았다.

인간임을 포기하고 저 망령이 손에 넣은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덧없는 것이었다.

‘어째서지?’

흑색공이 그의 서클을 가속했고, 동시에 그의 발밑에서 어둠이 휘몰아쳤다.

휘몰아치는 그 어둠에 맞서 작센의 옛 가주가 마법을 펼쳤으나, 그것은 싸움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어찌하여 이렇게 타락하셨습니까.”

흑색공이 덤덤히 입을 열었다. 데일이 품고 있는 것과 같은 물음을 입에 담으며.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씁쓸함이 가득 담겨 있는 표정을 짓고서.

“자랑스러운 작센의 옛 조상께서, 어찌하여 이토록 무력하고 덧없는 마법을 펼치시는 겁니까.”

흑색공의 조소 앞에서, 엘드리치의 후드 밑으로 다시금 어둠이 휘몰아쳤다.

파앗!

동시에 두 사람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보자마자 이해할 수 있엇다.

‘사상의 세계…….’

그러나 그들의 세계에, 데일과 그 이외의 이들이 들어갈 자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남겨진 데일이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마찬가지로 시험을 지켜보며 불길하기 그지없는 바람 소리를 내고 있는 엘드리치들과 함께.

‘……이들은 강하다. 그러나 아버지와 같은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아.’

처음으로 보는 그들 작센의 옛 가주를 두고, 데일이 생각했다. 생전 작센 가와 흑색 마탑의 정점으로 군림했을 이들이, 어째서 이토록 초라하게 쇠퇴해 있는 것일까. 이들이 포기한 ‘인간’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알아야 했다.

후우웅!

직전까지 내려앉은 침묵을 깨트리며, 일대에 마력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휘몰아치는 마력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그의 아버지, 흑색공이었다.

푸드덕!

불길하기 그지없는 여섯 장의 흑색 날개를 펼치며.

동시에 귀를 찢을 것 같은 비명이 울려 퍼졌다.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울림이었고, 엘드리치가 흑색공의 앞에서 발버둥 치고 있었다.

후드 속의 어둠이 발작적으로 뒤틀렸고, 뒤틀림 끝에 엘드리치가 힘없이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고작 이 정도입니까.”

흑색공이 싸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것이 정녕, 그대들께서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며 손에 넣을 가치가 있는 일이었습니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레이디 페르세포네가 침묵 끝에 덤덤히 입을 열 따름이었다.

“시험은 이제 시작이니라, 작센의 아이야.”

* * *

그 시각, 세상의 끝에서 시험을 치르는 작센의 부자와 별개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자들이 있었다.

황금과 그림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저마다의 신념을 위해 움직이는 자들이.

백색 마탑주 천상공이 성처녀 오렐리아의 이름을 내걸고, 제국에 맞서 ‘시스티나 교국’의 독립을 외쳤다.

동시에 제국 3대 공작의 일좌, 익사공 바르바로사 역시 그가 다스리는 사해 군도의 독립을 포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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