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 * *
데일의 심장을 움켜쥐고 있는 슈브의 촉수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데일의 심장이 드리우고 있는 그늘, 그림자 심장을 향해 스멀스멀 촉수를 뻗기 시작했다.
슈브의 촉수 하나가 그림자 심장을 고리 형태로 휘감았다.
촤아악!
“커헉……!”
동시에 숨이 멎을 것 같은 압박감과 함께, 입에서 피가 토해졌다. 피가 칠흑처럼 검고 어두웠다.
6개의 서클을 가진 데일의 심장이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 그림자 역시 여섯 개의 서클을 가져야 마땅할 것이다.
도합 열두 개의 서클.
어둠의 심장을 따라 슈브의 촉수들이 일제히 휘감기기 시작했다.
여섯 개의 촉수가 그림자 심장을 휘감았고, 생체 서클들이 비로소 가속하며 마력을 생성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데일이 알고 있는 알기 쉬운 형태의 마력이 아니었다.
칠흑의 마력…… 아니, 마력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었다. 그저 순수한 어둠과 그림자가 끝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검은 산양의 서』가 머금고 있는 태고의 어둠.
─ 세상은 어둠에서 시작되고, 얼음으로 끝나는 법이지.
옛 어둠의 어머니, 슈브가 즐거운 듯이 미소 지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어둠 속에서 빛이 태어났고, 불의 시대가 끝나며 얼음이 세상의 끝을 장식하리라.
─ 어둠 속에서 무엇이 보이느냐, 세상의 시작과 끝을 품고 있는 아이야.
슈브가 사랑스러운 듯 팔을 뻗어 데일의 뺨을 쓰다듬었다. 데일이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팔을 뻗었다.
또 하나의 심장을 타고 생성되는 그림자와 어둠이, 손가락 끝을 타고 뻗어 나왔다.
“이것은…….”
무척이나 감각이 익숙했다.
하나의 그릇에 빛과 그림자처럼 공존하고 있는 두 개의 심장과 사상.
비로소 ‘그림자 군주’의 이름에 걸맞은 힘이 데일의 체내에서 꿈틀대기 시작했다.
심장의 고통을 뒤로하고 팔을 뻗었다. 그림자 심장을 따라 휘몰아치는 어둠이 데일의 코앞에서 비로소 형상을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그림자 피조물(Shadow Creature).
마치 아이가 점토를 빚어 공예품을 제작하듯, 데일이 그림자를 자유자재로 주무르며 피조물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그저 알기 쉬운 암 속성의 크리쳐 따위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데일이 보여준 그림자 피조물과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는 존재였다.
데일의 손에서 춤추고 있는 어둠과 그림자는, 말 그대로 무엇이라도 될 수 있었다.
세상은 어둠에서 시작되고 얼음으로 끝나리라.
비로소 데일은 그가 가진 힘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창조의 힘.
창조자의 위업(偉業).
비로소 그림자 군주의 이름에 걸맞은 힘이 손에 들어온 것 같았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무궁무진함으로 가득 차 있는 가능성과 잠재력.
깨달음을 손에 넣기 무섭게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이 사방을 향해 뻗어 나갔다.
그야말로 신의 전능함을 손에 넣은 것 같은 아득함이 의식을 집어삼켰다.
“고마워, 슈브.”
그러나 데일은 냉정함을 잃지 않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 말에 슈브가 말없이 미소 지으며 웃었다.
* * *
그림자 군주가 그의 세계를 깨트리고 바깥으로 나왔을 때, 그를 마주하는 것은 어머니 엘레나였다.
“……데일.”
엘레나가 나지막이 데일의 이름을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데일이 짐짓 덤덤하게 대답했고, 엘레나가 침묵을 지켰다.
“말했듯이, 우리 청색은 너를 위해 우리가 가진 전부를 바칠 것이란다.”
“마땅히 그래야 할 것입니다.”
청색 마탑주의 말에, 데일이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진실의 군주 앞에서, 이 이상 우스꽝스러운 흑막(黑幕)의 존재는 필요하지 않겠지.”
“…….”
“그이의 곁을 지키는 것 역시 마찬가지고.”
데일이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고, 엘레나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렇기에 청색 마탑주로서, 내가 가진 전부를 너에게 넘겨주고 싶구나.”
그 말에 데일이 일순 숨을 삼켰다.
“저로서 달리 거부할 이유는 없겠지요.”
“그래.”
데일의 대답에 엘레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대로 엘레나가 데일을 향해 팔을 뻗었고, 바로 그때 데일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결코 이 가족의 형태를 깨트리며 손에 넣을 가치는 없습니다.”
“…….”
“아버지와 리제를 위해서라도, 당신이 필요하니까요.”
“그렇게 말해주니 정말 고맙구나.”
데일의 말에 청색 마탑주가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말렴, 나 역시 이 가족의 형태를 깨트리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러나…….”
무척이나 씁쓸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으며.
“이 가족의 곁에 있어야 할 어머니와 아내는 내가 아니라, 엘레나의 몫이 될 테니까.”
“그게 대체…….”
“그러니 부디 믿어주렴, 그녀 역시 나의 일부였음을.”
데일이 미처 말을 이을 틈조차 없었다. 청색 마탑주가 데일의 이마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나를 필요로 해준다는 내 아들의 말이, 너무나도 고맙다는 것을.”
끝없는 청색의 속삭임들이, 의식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마치 공상과학 영화 속에서 목덜미에 코드를 꽂아 뇌에 직접 정보를 주입하는 것처럼.
대륙의 역사 속에서 청색이 쌓아 올린 거짓과 모략, 그리고 그들의 거미줄이.
나아가 청색 마탑의 정점에 서는 자로서 쌓아 올린 마도의 비경(祕境)이.
보통 사람으로서는 그 정보의 조각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미쳐버릴 정도의 것들이, 쉼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데일에게 있어 그것은 결코 감당할 수 없는 힘이 아니었다.
청색 마탑주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리라.
비로소 청색의 후계자에게, 어머니로서 전부를 물려줄 때가 왔다는 것을.
일대가 얼어붙을 것 같은 청색 마력의 폭풍 속에 뒤덮였고, 비로소 폭풍이 멎었다.
“어머니…….”
데일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어머니 엘레나가 데일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왜 그러니? 데일.”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어머니의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데일이 무어라 말을 이으려다 말고, 이내 입을 다물었다. 가슴속에서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 울컥 솟아 나왔다.
마지막까지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들이 되어서.
그저 힘없이 엘레나를 포옹하며, 그녀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고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어머니.”
“어머, 무엇이 말이니?”
그러나 느닷없이 흐느끼는 데일을 보며, 엘레나가 당혹스러운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여느 때의 믿음직하고 자랑스러운 아들이 갑작스레 아이처럼 흐느끼는 이 상황을, 그녀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우리 아들이 이렇게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은 처음이구나.”
그러나 나약함을 드러내는 아들 앞에서, 어머니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였다.
엘레나가 말없이 데일을 품으며 미소 지었다.
달라질 것은 없었다. 데일의 앞에는 여전히 그가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고 기댈 수 있는 어머니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녀 못지않게 아들을 사랑했으며, 청색의 거미줄을 펼치고 ‘그림자 군주’를 지켜준 또 하나의 어머니는, 더 이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데일의 심장에 새겨진 일곱 개째의 서클과 그 그림자가, 그녀의 공백을 말없이 말해주고 있을 따름이었다.
마지막까지 자식을 걱정하는 어머니로서, 데일에게 남겨준 청색 마탑주의 유산이.
* * *
사람은 기억에 의해 정의되는 생물이다. 설령 그 기억이 환상과 동의어라 할지라도.
* * *
엘레나의 일을 듣고 나서, 흑색공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묵묵히 침묵할 따름이었다.
“제 잘못입니다.”
“자책하지 말아라.”
데일의 말에 흑색공이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그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엘레나일 것이다.”
“그러나 결코 우리가 알고 있는 청색의 흑막은 아니겠죠.”
“우리로서 어느 쪽이 진짜 그녀였는지는 알 수 없겠지. 아마 양쪽 모두였을 것이다.”
흑색공이 말했다.
“나는 그저, 마지막까지 그녀의 결정을 존중할 것이다.”
“…….”
데일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였다. 그것은 결코 데일의 몇 마디로 달라질 일이 아니었으니까.
“마계로 향할 준비가 모두 끝이 났습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수행할 따름이었다.
불사공 프레데릭, 작센의 시조이자 《엘드리치》들의 수장. 나아가 그림자 마탑의 정점에 서는 자.
또 하나의 그림자 군주를 칭왕하고 있는 거짓의 왕과 맞서는 일.
“……나 역시 너와 함께 그곳으로 향할 것이다.”
흑색공의 말에 데일이 나직이 숨을 삼켰다.
“그곳에 있는 작센의 어둠을 청산하는 일은, 나 역시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흑색공의 말에 데일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흑색 마탑의 정점에 서는 대륙의 다섯 마법사 중 하나. 그리고 청색 마탑의 정점에 서는 청색의 흑막이, 데일에게 남겨준 것들.
더 이상 이것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이 아니었다. 그리고 데일이 마땅히 손에 넣어야 할 것들이기도 했다.
그 시절, 불사공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하고 쓰러진 데일이 아니었으니까.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일까. 데일이 일순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대답은 어렵지 않았다.
마땅히 지켜야 할 것들을 위해서.
설령 그것이 거짓으로 가득 차 있는 것들이라 해도 이제는 개의치 않았다. 진실과 거짓, 황금과 그림자, 지금의 데일이 싸우는 것은 결코 그러한 고대의 맹신이나 신념 따위를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기억해 주세요, 아버지.”
결의를 마친 데일이 말했다.
“제가 당신의 아들이란 사실을.”
“그래.”
그 말을 듣고 흑색공이 덤덤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이 아비가, 네 곁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다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두 부자의 대화였으나, 그 무게는 절대로 같지 않았다.
동시에 아버지의 그림자 속에는 아내를 잃고 흐느끼는 남자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결코 데일의 앞에서 보여주지 않는 아버지의 나약함.
암혈의 갑주에 휘감기지 않고도, 이제 데일의 시야에는 온갖 그림자 너머의 것들이 비치고 있었다.
* * *
그곳은 시린 냉기가 휘몰아치는 어둠의 대지였다.
척박하기 그지없는 동토 속에, 홀로 우뚝 솟은 칠흑의 탑이 있었다.
그림자 마탑.
일찍이 황금과 그림자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도망친 그림자 군주, 불사공 프레데릭은 그곳에 있었다.
바로 그 탑의 정점에 서는 자로서, 동시에 불사를 손에 넣기 위해 그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옛 작센의 가주들 사이에서.
“아, 작센의 아이들이 오고 있구나.”
흑색의 붕대로 눈을 가린 채, 남자아이가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그 말을 듣고 《엘드리치》들이 일제히 무릎 꿇고, 그들의 그림자를 요동치기 시작했다.
“작센의 두 아이들이 도착하고 나서, 탑의 시험이 시작될 것이다.”
불사공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시험에서 탑의 옥좌에 앉은 자가, 머지않아 불과 빛의 제국을 집어삼키게 되겠지.”
대답 같은 것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작센의 두 부자는 차츰 그들의 땅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다.
최후의 시험이 막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