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 * *
정장 차림의 노신사, 죽음의 손짓에 따라 까마귀 떼가 쇄도했다.
그리고 그에 맞서 옛 어둠의 어머니, 슈브가 드레스 자락 밑으로 칠흑의 촉수를 뿜어냈다.
죽음, 어둠, 그리고 모신(母神).
각종 신화나 전설의 모태가 되는 태고의 상징이자,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벗어날 수 없는 사상.
데일과 흑색공, 두 마법사가 저마다의 심장에 새겨넣고 있는 사상의 그릇이 충돌했다.
‘옛 어둠의 어머니…….’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갖는 상징은 결국 그들의 삶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죽음을 피해갈 수 있는 존재가 어디에도 없듯이, 마찬가지로 사람이 생명을 얻는 것은 어머니의 축복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삶과 죽음, 죽음과 어머니. 이 전부가 마치 동전의 두 얼굴처럼 느껴졌다.
─ 왜 그러느냐, 인간의 아이야.
어느새 어엿한 숙녀로 성장해 있는 슈브가, 기품 있는 미소와 함께 웃었다. 어머니처럼 자애와 기품이 넘치는 미소였다.
촤아악!
동시에 하늘을 가득 메우고 쇄도하는 죽음의 까마귀 떼에 맞서, 슈브의 촉수가 흩날렸다.
그녀는 결코 남이 아니었다. 데일의 심장에 융합하고 일부로 존재하고 있는 마도서의 화신이었으니까.
데일의 앞에 있는 정장 차림의 노신사가 그러하듯이.
그렇다고 해서 손을 놓고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었으나.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까마귀 떼를 슈브의 촉수가 저지하는 사이, 데일이 입을 열었다. 흑색공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암혈의 갑주가 데일의 육체를 휘감았다.
비록 전력이라고 말을 해도, 흑색공의 앞에서 용사의 아바타를 전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당장 데일이 목표로 삼는 것은 흑색공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다.
그가 가진 죽음의 진실에 다가가는 것.
8서클의 마법사이자 죽음의 대가로서,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가 쌓아 올린 경지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암혈의 갑주를 휘감고 데일이 쇄도했다. 종말의 냉기가 흩뿌려졌고, 그대로 검을 뽑았다.
평화의 중재자가 아니라, 칠흑의 검신을 가진 마검 ‘기아(Hunger)’였다.
마법을 집어삼키는 검.
그 검을 쥐고 데일이 땅을 박찼고, 동시에 흑색공의 발밑에서 칠흑의 마력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때와 다르다.’
어린 시절의 과거, 데일이 전력을 다해 아버지와 맞섰을 때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전력을 다해 발버둥쳐도, 그가 펼치는 마법의 실체조차 오롯이 이해하지 못할 정도의 압도적 격차.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마법사로서 성장했고, 이계의 용사로서 쌓아 올린 전생의 힘마저 손에 넣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림자 심장을 통해 새겨넣고 있는 『차가운 재의 서』가 있었으니까.
잿더미의 군주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 모습을 보고 흑색공의 표정에 비로소 감정이 사라졌다.
옛 어둠의 어머니와 마왕을 거느리고 있는 그림자 군주가 그의 전력을 내뿜었다.
흑색공을 향해 소멸의 재가 휘몰아쳤고, 동시에 그의 발밑에서 칠흑의 마력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더 이상 가르침을 얻겠다거나 하는 알량하기 그지없는 마음으로 맞서는 상대가 아니다. 전력을 다해 이 남자를 쓰러뜨릴 정도의 마음가짐을 갖지 않고서는, 결코 닿을 수 없으리라.
그렇기에 데일의 서클과 오러 하트가 폭발하듯 휘몰아쳤고, 동시에 딛고 있는 ‘사상의 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태고의 어둠과 종말의 냉기가 깃들어 있는 칠흑의 성채.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에 맞서 비로소 데일이 그의 세계를 펼쳤다.
냉기와 어둠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어두운 세계를 보고, 그의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할까.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당장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그랬어야 했다.
“어째서 전력을 다하지 않느냐.”
바로 그때, 흑색공이 되물었다.
동시에 그림자 군주가 가진 진실의 눈이, 무의식적으로 아버지의 그림자를 향했다.
그림자 속에 숨기고 있는 흑색공의 비밀이 그곳에 있었다.
──전력을 다해 쇄도해야 할 데일의 움직임이 그대로 정지했다.
“……왜 그러느냐.”
아버지 흑색공이 되물었다.
데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숨이 막혔다.
“네가 가진 전력을 다해 나와 맞서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흑색공이 다시금 입을 열었고, 데일이 숨을 삼켰다.
“아버지…….”
그 세 글자를 입에 담고 나서, 데일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엇을 그렇게 놀라는 것이냐.”
흑색공이 덤덤하게 되물었다. 그야말로 놀랄 것 따위는 하나도 없다는 듯이.
“용사의 아바타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냐?”
“…….”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데일의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평정을 지키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동시에 흑색공의 그림자 속에서, 아이처럼 흐느끼고 있는 남자의 진실이 비치고 있었다.
같은 남자였다.
엘레나, 청색 마탑주의 말이 맞았다. 흑색공은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진실을 깨달았을 때, 절대 당황하지 않을 것 같은 이 남자는 처음으로 무릎을 꿇고 나약함을 드러냈다.
아무도 없는 공방의 그림자 속에서, 그저 홀로.
“……어째서 침묵하고 계셨습니까?”
그렇기에 데일이 되물었다.
“처음부터 청색 마탑주는 목적을 갖고 당신에게 다가갔습니다.”
“말을 조심하거라.”
그러나 그때, 지금까지와 비할 수 없는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아들을 꾸짖는 아버지처럼.
“그녀는 나의 아내이고, 동시에 너의 어머니다.”
“어째서…….”
데일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어째서 알고도 모르는 척을 하신 겁니까?”
배신감에 치를 떨었어도 이상하지 않고, 그 증오를 쏟아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깨닫고 며칠을 흐느끼고 나서, 그의 아들과 아내를 대하는 흑색공의 태도는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그림자 속에서, 데일과 엘레나의 모습이 비쳤다.
‘믿어주세요, 제가 아버지의 아들임을.’
‘늘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두 사람 역시 달라지지 않았다.
“그제야 비로소 엘레나가 내 앞에서 보여주는 괴로움을 이해할 수 있었다. 너 역시 마찬가지였지.”
“저는…….”
“그렇기에 침묵했다.”
작센 공작이 말했다.
“너희의 거짓이, 진실보다 더욱 진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 말을 듣고 데일이 침묵을 지켰다.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저 너희의 진심을 믿고 있을 따름이다.”
거짓이 없는 마음. 그 말을 듣고 데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저는…….”
침묵 끝에 데일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여전히 당신의 아들입니다.”
“그것으로 되었다.”
흑색공이 고개를 끄덕였고, 데일은 망설이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오러 하트가 폭발하듯 휘몰아쳤고, 용사의 아바타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작센 가의 밤까마귀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칠흑의 기사였다.
작센의 껍질을 쓰고 있는 이계의 용사.
사기꾼. 레이 유리스는 데일을 일컬어 그렇게 말했다. 참으로 그의 말대로였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고도 흑색공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말을 이을 따름이다.
“지금부터 네가 가진 ‘그림자 심장’에 마나 서클을 새겨넣을 것이다.”
“……!”
그 말의 의미를 헤아리고 데일이 숨을 삼켰다.
“그림자 심장에 서클을……”
“그림자 군주로서 네가 가진 진짜 힘을 끌어내는 작업이 되겠지.”
비로소 데일을 다음 경지로 이끌어주기 위한 스승으로서, 흑색공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그 말을 듣고 데일은 주저하지 않았다. 어째서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 발상을 듣고 헛웃음조차 나오지 못했다.
그림자 군주로서, 나아가 이계의 용사로서 존재하는 또 하나의 심장. 바로 그것이야말로 그림자 군주의 이름에 걸맞은 진정한 힘의 정수였다는 사실을.
* * *
그날 밤.
작센 공작이 공작 부부의 침실로 들어왔을 때, 엘레나가 그곳에 있었다.
여느 때처럼 사랑스러운 아내가 아니라,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청색의 흑막으로서.
“엘레나.”
“아직도 그 이름으로 저를 부르시나요?”
“여덟 살 데일이 생일에 무엇을 바랐는지 기억하고 있소?”
흑색공이 되물었다. 그 말에 엘레나가 숨을 삼켰다.
“여동생을 갖고 싶다고 말했었지.”
“…….”
“그 덕에, 그날 이후 그대와의 잠자리가 참으로 부담스러웠다오.”
흑색공이 농담하듯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 덕에, 우리는 사랑스러운 딸아이를 가지게 되었지.”
엘레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랑스러운 듯 미소 짓는 리제의 미소를 떠올리며.
“리제의 존재마저도 나와 데일의 마음을 사기 위한 거짓이었소? 여동생을 바라는 데일의 바람 역시 우리들을 속이기 위한 거짓말이었다고 생각하오?”
“앨런, 저는…….”
“그대가 우리의 아들을 꼭두각시로 삼아 ‘그림자 군주’로서의 길을 걷게 했고, 그 아들이 이제는 진실의 군주가 되어 우리의 거짓을 헤아리고 있소. 그리고 자기 의지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지. 나는 그것이…… 참으로 기쁘다오.”
뜻밖의 말에 엘레나가 숨을 삼켰다.
“여전히 그 아이는 작센의 후계자로서 자기 의무를 무엇보다 깊이 헤아리고 있소. 그대가 작센 공작의 아내로, 나와 아들을 위해 그대의 전부를 바치고 있듯이.”
“설령 그것이 거짓과 모략의 결과물이라 해도, 개의치 않나요?”
“무엇을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구려.”
작센 공작이 말했다.
“그대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다지 능숙한 거짓말쟁이가 아니라오.”
“……!”
“나 역시, 처음에는 청색 마탑주로서 나에게 다가오는 당신에게 이용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었을 따름이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 엘레나가 숨을 삼켰다.
“데일의 일에 대해서는, 솔직히 말해 배신감을 느끼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
“저를 용서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러나 나는 지금도 내 아들이 자랑스럽소. 당신 역시 마찬가지라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바보 같은 사람이네요.”
“그대가 알고 있듯, 나 역시 그렇게 착하게 살아온 사람은 아니니까.”
흑색공이 말했다. 엘레나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 대륙 전체에 흩뿌리고 있는 청색의 거미줄을 통해, 이 남자의 악업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였으니까.
“…….”
“나를 위해 사랑스러운 아내를 가장할 필요는 없소. 그러나 데일과 리제를 보며 미소 짓는 당신의 모습을…… 나 역시 잃는 것이 두렵다오.”
흑색공이 말했고, 엘레나가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침묵 끝에 힘없이 무릎을 꿇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센 공작은 여느 때처럼 말없이 그녀의 어깨를 휘감았다.
달라질 것은 없었다.
* * *
『검은 산양의 서』와 융합하고 있는 심장, 그 심장에 휘감겨 있는 여섯 개의 마나 서클.
그리고 그 심장의 그림자에, 서클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서클의 개수로 따졌을 때 총 열두 개의 서클.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결코 오색 마탑주의 8서클과 같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 수행이 성공할 경우, 비로소 그들에 버금가는 체급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흑색공이 떠나고 홀로 남겨진 데일이, 희고 어두운 겨울밤의 성채에서 조용히 의식을 다잡았다.
흑금(黑金)의 옥좌 위에 앉아, 그의 곁에 있는 슈브가 사랑스러운 듯 팔을 뻗었다.
─ 각오는 되었겠지, 인간의 아이야.
숙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옛 어둠의 어머니가 말했다.
데일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