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 * *
작센 공작 부부의 침실.
밤이 깊었고, 부스럭거리는 기척 소리에 작센 공작이 고개를 돌렸다. 아내 엘레나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잠이 오지 않소?”
“어머, 제가 깨워버렸나요?”
엘레나의 말에 작센 공작이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는 엘레나를 보며, 작센 공작이 덤덤히 침묵을 지켰다.
침묵 끝에 말없이 팔을 뻗어, 등 뒤에서 포옹하듯 그녀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엘레나가 나직이 숨을 삼켰다.
“앨런…….”
엘레나가 나직이 남자의 이름을 불렀고, 작센 공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 없다오.”
그 말에 엘레나가 조용히 숨을 삼켰다. 희미하게 떨리는 어깨를 뒤로하고, 작센 공작의 손을 마주 잡았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가운 손이다. 그럼에도 흑색공의 손에는 엘레나가 결코 잊을 수 없는 따스함이 깃들어 있었다.
“죄송해요, 당신.”
“무엇이 말이오.”
흑색공이 일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레나가 잠시 침묵했고, 침묵 끝에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저는 좋은 아내가 되지 못한 것 같아서요.”
“그렇지 않소.”
엘레나가 중얼거렸고, 작센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이유조차 물어보지 않고, 그저 그녀의 목덜미에 정성스럽게 입맞춤하며.
“그대는 그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내 아내니까.”
* * *
설령 제국의 고위 귀족이라 하더라도 전쟁에서는 누구나 죽을 수 있다. 아무리 그들의 몸에 흐르는 피의 무게가 값지다고 해도, 이 세상에 죽음을 피해갈 수 있는 존재는 없으니까.
레이 유리스, 유리스 후작 가의 장남이자 적색 마탑의 후계자가 전사했다. 바로 그 검은 공자의 손에.
나아가 랭커스터 대공의 자리마저 검은 공자의 아내, 샬롯의 손에 넘어갔다. 제국을 통틀어 가장 비옥하고 강대하다 일컬어지는 영지가 돌고 돌아 작센의 영향력 아래 떨어진 것이다.
시시각각 바뀌는 전세 속에서 힘의 질서가 바뀌고 있었다. 다가올 새로운 시대의 격랑 속에서, 일찌감치 데일이 뿌린 씨앗들이 비로소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후의 전쟁에 앞서, 아직 검은 공자에게는 수행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었다.
일찍이 이계의 용사마저 손에 넣지 못한 마왕령 너머의 대지, 마계.
그곳에 깃들어 있는 작센의 가주들, 불사공 프레데릭과 《엘드리치》들이 쌓아 올린 ‘그림자 마탑’을 복속시키는 것.
엘드리치 전체를 적으로 돌려 승리할 필요는 없다. 승리해야 하는 상대는 오직 하나, 불사공 프레데릭을 무릎 꿇리는 것으로 족할 테니까.
그러나 그날, 불사공 프레데릭이 보여준 터무니없을 정도의 힘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저항다운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패배해버린 그 전투를.
용사의 힘을 손에 넣고, 『차가운 재의 서』를 가진 지금의 자신이 어디까지 그와 맞설 수 있을까. 그가 거느리고 있는 작센의 옛 가주들은 어느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을까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작센 가가 황금의 제국과 맞서 최후의 일전을 치를 경우, 마계와 그림자 마탑을 남겨 두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으리라.
작센이 쌓아 올린 고대의 어둠을 매듭짓지 못하는 이상, 전쟁에서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
‘그러나 여유가 많지 않다.’
아버지 흑색공조차 일방적으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강적.
동시에 흑색의 대행자, 에리스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영겁의 세월을 사는 그들 작센의 가주 《엘드리치》 모두를 통틀어도, 고작 불혹의 나이를 가진 흑색공을 상대로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이들은 불사공을 포함해 고작 세 명 남짓.
인간이기에 갖는 힘이 있고, 그들이 인간을 포기하는 시점에서 그 힘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인간의 힘이란 것이 무엇이지?
그 깨달음이야말로 불사공을 쓰러뜨릴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것은 결코 사색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차가운 재의 서』.”
그저 지금의 데일이 할 수 있는 일을 수행할 따름이었다.
마왕의 존재가 데일의 그림자 심장에 깃들어 있고, 그 존재를 지금 이상으로 체화시키는 것.
잿더미가 흩날리며 마도서의 화신이자, 옛 숙적이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불사공 프레데릭에게 패해 어둠의 땅으로부터 도망친 잿더미의 군주.
“기다리고 있었다.”
마왕의 말에 데일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센의 시조, 불사공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그 남자를 보았나?”
“그래.”
데일이 말했다.
“지금의 내가 그 존재와 맞서 어느 정도의 승산을 가질 수 있지?”
“승산이라고 했나.”
그 말을 듣고 마왕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 존재는 지금의 네놈 따위가 범접할 수 없는 괴물이다.”
“…….”
데일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 그렇지 않아.
데일의 심장을 휘감고 있는 촉수가 꿈틀거리며,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길 수 있어.
“슈브……?”
─ 오빠가 인간으로 남아 있기를 자처하는 이상, 아빠를 쓰러뜨릴 가능성은 늘 존재해.
“……그래.”
─ 나는 오빠를 믿고 있으니까.
슈브가 말했고, 데일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달라질 것은 없었다.
“마왕 발로르.”
데일이 고개를 들고, 체내의 마력을 회전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 존재의 발끝에라도 닿을 때까지 어울려줘야겠다.”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어리석은 놈이구나.”
마왕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조소했다. 동시에 그의 주위를 따라 소멸의 재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데일의 그림자 심장에 공생하며 하나로 거듭나 있는 옛 숙적.
체내의 오러가 폭발하듯 휘몰아치며, 이계의 용사가 땅을 박찼다.
* * *
그로부터 몇 개월 후.
열여덟 살 생일을 맞은 데일이었으나, 느긋하게 생일을 기뻐할 여유 같은 것은 없었다.
그날 이후, 불사공에 닿고자 하는 힘을 손에 넣기 위한 수행에 수행이 거듭되었다. 6서클을 막 각성하고 나서 손에 넣은 힘들, 그러나 아직 이것으로는 부족했다.
서클의 개수가 꼭 승패의 절대적 여부를 결정 짓지는 않는다. 그러나 체급이란 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6서클을 손에 넣은 것은 물 흐르듯 흘러가는 덧없는 깨달음이었다. 그 직후 힘에 대해 집착하기 시작한 데일이 다음 경지를 바라는 것은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과욕이리라.
그럼에도 데일은 개의치 않았다.
“전력을 다해서 덤비도록 하세요.”
데일의 말에, 광검 헬무트 블랙베어 경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타앗!
동시에 기척조차 없이 등 뒤에서 휘둘러지는 살기는 마스터 바로의 것이었다.
카앙!
휘둘러지는 그 일격을 쳐내기 무섭게, 방랑검이 쇄도했다. 동시에 방랑검의 검이 데일의 피스메이커와 맞부딪치기 무섭게, 포효하는 괴수의 일격이 데일을 향해 내리꽂혔다.
세 명의 칠검을 상대로 검을 맞받아치는 무(武)의 수행.
아바타 없이, 그러나 결코 가감 없는 전력으로 그들의 검을 맞받아치며 데일이 의식을 집중했다.
대륙 제일의 강자들과 맞서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두르는 것.
그림자처럼 흩뿌려지는 칼날들이 춤추었고, 그때마다 데일이 의식을 집중하며 그들의 검을 받아쳤다.
해가 뜨고, 저녁노을이 스러지며 새벽녘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검을 휘두를 때마다 고요해지는 마음의 평정에 의식을 집중했다.
검을 통해 깨달음을 추구하는 마법사. 얼핏 보기에는 우스꽝스러운 아이러니였으나, 데일에게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사방에서 살기를 담고 칼날이 휘둘러지고 있었다. 그 검에 깃들어 있는 죽음을 음미하고, 그것을 받아치는 감각을 되새겼다.
검이란 사람을 죽이는 무기다. 그리고 기사의 일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공격을 맞받아칠 때마다, 거기에 깃들어 있는 죽음과 삶의 실감을 되새기는 작업이었다.
죽음의 감각.
이것은 데일이 불사공과 맞설 때를 상정하는 그 나름의 수행법이기도 했다.
에리스와 슈브가 말했듯이, 《엘드리치》란 죽음을 속이는 자다. 죽음을 거부하고 불사의 삶을 택하고, 영겁의 정체에 빠진 존재들.
그렇기에 그들과 인간을 구별 짓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죽음.
그날 이후, 데일이 필사적으로 집착하고 탐구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였다.
일격을 허용할 때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감각, 자신을 죽이기 위해 휘둘러지는 검의 악의.
죽음을 속이고 불사를 손에 넣는 자들과 정해진 수명 속에서 스러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차이.
“이곳에 있었느냐.”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대륙 전체를 통틀어 그 누구보다도 ‘죽음’에 정통해 있는 마법사의 목소리였다.
“아버지.”
“공작 각하!”
“어이쿠, 나으리.”
흑색공이 데일이 그의 검들과 수행하고 있는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 모습을 보며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요즘 들어 부쩍 수행에 힘을 쓰고 있구나.”
“평화를 준비해야 하니까요.”
데일이 짐짓 시치미를 떼며 웃었다. 그러나 그 의미를 헤아리지 못할 흑색공이 아니었다.
“검의 수행은 이 정도로 하자꾸나.”
그날 이후 수행을 시작한 데일에게, 죽음을 가르쳐주는 여러 스승이 있었다. 그러나 설령 사람을 죽이는 것을 업으로 삼는 기사들이라 할지라도, 이 앞에 있는 남자의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니리라.
“준비는 되어 있느냐, 데일.”
죽음의 대가로서, 흑색공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데일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푸드덕!
동시에 남자의 등 뒤를 따라 흑색 깃털이 흩날렸고, 까마귀 울음소리가 났다.
어느덧 두 사람이 발을 디디고 있는 곳은, 저물녘 어스름이 스러지고 있는 황무지 위였다.
황혼으로 이루어진 세계.
“네가 처음 불사공을 쓰러뜨리고 그림자 마탑을 굴복시키겠다고 말했을 때, 솔직히 말해서 터무니없는 과신(過信)이라 생각했다.”
그 세계에서 데일의 아버지가 덤덤히 말을 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납득하지 않을 수 없겠구나.”
“…….”
“너에게 우리 작센의 시조, 불사공에게 닿을 가능성을.”
“아버지께서는 어떠십니까?”
그 말을 듣고 데일이 물었다.
“아버지께서는 불사공과 맞서 어느 정도의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로서는 절대 그를 이길 수 없다.”
흑색공이 딱 잘라 대답했다.
“……그러나 너에게는 일말의 기대를 걸어볼 수도 있겠지.”
“제가 아버지보다 강해질 거란 말씀입니까?”
데일의 물음에 흑색공이 고개를 저었다.
“그를 쓰러뜨리는 것이 꼭 나보다 강해져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새 흑색공의 곁에 있는 것은 빅토리아풍 정장 차림의 노신사였다. 그의 마도서 『심장의 저울』이 가진 사상의 결정체.
“불사공께서는 자기 딸을 바쳐 『검은 산양의 서』를 집필했고, 그것은 불사공이 너에게 드러내고 있는 가장 치명적 약점이지.”
“…….”
그러나 말했듯이 그것은 순수한 체급의 차이로 손에 넣을 수 있는 승리가 아니다.
비장의 일수(一手)를 통해서밖에 손에 넣을 수 있는 승리.
영겁의 세월을 살아가는 노괴가 보기에, 전생의 삶을 합쳐도 데일의 존재는 그저 터무니없는 아이에 불과하리라.
그리고 그 노괴조차 핏덩어리라고 조소하는 핏빛공에 맞서 데일의 아버지가 승리를 쟁취했듯이.
검은 공자와 불사공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
기실, 이 세상에서 데일보다 확실하게 ‘죽음’을 체감하고 있는 자는 드물 테니까.
그것은 설령 흑색공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죽음을 기억하라.”
흑색공이 중얼거렸고, 정장 차림의 노신사가 손에 쥐고 있는 지팡이를 힘껏 바닥에 내리찍었다.
황혼녘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까마귀 떼가, 데일을 향해 일제히 쇄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