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 * *
“어머니.”
데일이 나직이 입을 열었고, 어머니 엘레나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말하렴, 데일.”
“…….”
데일이 침묵을 지키며, 흘끗 엘레나의 곁에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어디까지 그녀의 진실을 알고 있을까? 처음부터 그 역시 공범이었나?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진실의 눈’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를 전개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지금의 흑색공 앞에서 당당히 보여줄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내 집무실에서 이야기하자꾸나.”
그렇기에 데일이 입을 열었고, 여느 때처럼 아버지 작센 공작이 대답했다.
“네, 아버지.”
무어라 말을 정정하려다 말고서, 데일이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3차 장미 전쟁이 끝났고, 적색 마탑의 후계자가 검은 공자의 손에 쓰러졌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전쟁이었다.
* * *
작센 공작의 집무실에서, 데일은 제3차 장미 전쟁에서 손에 넣은 것들을 이야기했다. 그의 아내, 샬롯이 랭커스터 대공이 되고 나아가 그림자 심장을 통해 『차가운 재의 서』를 손에 넣었다.
“지금까지와 비할 바 없는 전쟁이 시작될 겁니다.”
“그렇겠지.”
데일의 말에, 작센 공작은 의외로 덤덤하게 대답했다.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놀라지 않으십니까?”
“네가 그림자 군주의 이름을 칭왕(稱王)한 이상, 결국 늦고 이르고의 일이었을 따름이다.”
“…….”
“어릴 적의 너는 제국의 정의가 그릇되었다고 말했지. 그러나 처음부터 우리 중 누구도 정의로운 자는 없었다. 그저 힘을 손에 넣기 위해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생존의 투쟁일 따름이니까.”
흑색공이 말했다. 그의 앞에 있는 것은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그렇기에 더 이상 아버지로서 배려해주어야 할 진실 따위는 없었다.
“승리하는 자는 살아남을 것이고, 패배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어릴 적 너의 말이 옳았다. 투쟁은 피할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이상 우리는 처음부터 싸움을 준비해야 했다.”
“아버지…….”
“그저 나는 네가 이 사실 하나를 기억하길 바랄 따름이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네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
작센 공작이 말했다.
“그림자 군주로서, 이 땅에 불과 빛의 제국을 몰아내겠다는 신념을 위해 싸울 필요는 없다.”
“저는 어디까지나 제가 지켜야 할 것들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데일이 대답했다. 작센 공작 가의 후계자로서.
“동시에 아버지가 지켜야 할 것들이기도 하지요.”
“부디 마지막까지 그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다오.”
“명심하겠습니다.”
데일이 묵묵히 고개를 숙였고, 그대로 등을 돌렸다. 멀어지는 아들의 등을 바라보며 작센 공작이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무척이나 복잡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는 침묵이었다.
* * *
“오라버니!”
집무실을 나오자, 어린 리제가 활짝 웃으며 데일을 마중하고 있었다. 데일이 미소 지으며 리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고 나오는 길이니?”
동시에 리제의 곁에 있는 여성이 말했고, 데일이 조용히 숨을 삼켰다.
리제는 세상모르고 웃으며, 재잘재잘 그녀가 배운 청색 마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스승 세피아가 가르쳐준 마법들. 어린 여동생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경청하며 데일이 정성스럽게 칭찬해주었다.
달라질 것은 없었다. 제국을 무너뜨리겠다는 목표는 바뀌지 않는다.
“리제, 슬슬 세피아 님이 기다리시겠다.”
“네, 어머니!”
그때, 데일의 어머니 엘레나가 말했다. 리제는 그제야 깨달은 듯 황급히 세피아가 기다리고 있는 중정을 향해 멀어졌다.
비로소 데일의 표정에서 감정이 사라졌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고 나서 말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데일 역시 묵묵히 침묵하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아버지와 여동생을 뒤로하고 멀어졌을 즈음, 앞서 걷고 있는 엘레나가 입을 열었다.
“그것이 우리 청색 마탑의 존재란다.”
“아버지께서는 어디까지 진실을 알고 계십니까?”
“글쎄다.”
엘레나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그이는 지혜롭고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지. 아마 알 수도 있고, 알지 못할 수도 있지. 나는 그저 내가 그이를 능숙하게 속여넘겼길 바랄 따름이구나.”
“무엇을 목적으로 아버지에게 다가가셨습니까?”
“참으로 여러 가지 목적이 있었지.”
엘레나가 대답했다.
“그러나 그 목적을 위해 행동하는 사이, 명확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은 많은 것들이 흐려지는 법이더구나.”
“이제 와서 가족의 정이라도 들으신 겁니까?”
“꼭 남의 일처럼 말을 하고 있구나.”
엘레나, 청색 마탑주가 생긋 미소 지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데일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딛고 있는 발밑이 덜컥 무너지는 것 같은 공허함이 엄습했다.
청색 마탑주에게는 정신을 자유자재로 조작할 힘이 있다. 소서리스들의 정신을 하나의 자리에 결집시키고, 사람의 기억과 진실을 조작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청색의 꼭두각시로 바꾸어놓듯이.
─ 비로소 퍼즐 조각이 짜 맞추어졌다.
전생의 돌, 이계의 용사, 전생(轉生), 그리고 작센 공작 가.
“그렇지 않니? 데일.”
“당신의 짓이었습니까?”
“동시에 너의 결정이기도 했지.”
청색의 흑막이 말했다. 이계의 용사가 조용히 숨을 삼켰다.
직전에 작센 공작이 말해준 지켜야 할 것들이, 이제는 알 수 없는 흐릿함 속으로 빠져들었다.
“처음부터 우스꽝스러운 가족 놀이였군요.”
“그래.”
엘레나가 씁쓸한 듯이 웃었다.
“그랬어야 했지.”
“…….”
“누구나 옷장 속에 해골을 감추고 있는 법이고, 너에게 너무 일찍 나의 해골을 들켜버렸구나.”
데일이 침묵했다.
“그러나 제국을 무너뜨리겠다는 너의 목적이 바뀌지 않았듯이, 그림자 군주를 섬기겠다는 나의 목적도 달라지지 않겠지.”
“그것이 당신의 목적이었습니까?”
“그림자의 승리를 위해 내 전부를 바치는 것, 그것 말고 그림자의 기수로서 수행해야 할 목적이 무엇이 있겠니?”
“아버지는 저에게 그림자 군주로서, 신념을 위해 싸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그이답구나.”
엘레나가 즐거운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 속에서 온갖 마법사들을 보아왔지. 자신이 바라는 목적을 손에 넣기 위해, 기꺼이 괴물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그 구역질이 날 정도로 역겨운 족속들을.”
“당신처럼 말이지요.”
데일의 조소에 엘레나가 씁쓸한 듯이 웃었다.
“그러나 그이처럼 마법사답지 않은 마법사는 처음이었어.”
“아버지는…….”
침묵 끝에, 데일이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 같은 사기꾼들에게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이용당하기에는, 너무나도 과분하고 가엾은 사람입니다.”
“그렇지. 그래서 더더욱 그이의 모습이 가엾고 슬퍼서 참을 수가 없구나.”
엘레나가 정말로 동감이란 듯 웃었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작센 공작 가의 장남을 자청하며 그 남자를 이용했고, 엘레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데일이 말했다.
“우리는 이미 하나의 배를 타고 있는 공범이니까요.”
“…….”
“저는 아버지와 리제를 위해 제국을 무너뜨릴 것이고, 당신 역시 그림자의 승리를 위해 황금의 제국을 무너뜨려야 하겠지요.”
처음부터 두 사람의 목적은 같았다. 제국을 무너뜨리는 것은 곧 그림자의 승리가 될 것이고, 그림자의 승리는 곧 작센 공작 가의 승리를 의미할 테니까.
“……데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레나가 머뭇거리며 말을 흐렸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데일은 기다리지 않았다.
“전쟁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에 있어, 청색 마탑은 그대들이 가진 전부를 바쳐야 할 것입니다.”
“너를 위해, 나는 기꺼이 내 전부를 바칠 거란다.”
“그림자 군주를 위해 충성하는 기수로서, 마땅히 수행해야 할 의무겠지요.”
그 말을 끝으로 데일이 등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너를 낳았을 때.”
엘레나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하루하루 성장하는 너를 지켜볼 때마다, 훗날 다가올 이 날이 너무나도 겁이 나더구나. 진실의 군주를 영영 속일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야.”
“그렇습니까.”
“설령 그것이 우스꽝스러운 가족 놀이라고 하더라도, 네 어머니가 될 수 있어서 정말로 행복했어.”
“이상의 그림자 군주를 낳기 위해 세운 계획으로서는, 참으로 그럴싸했습니다. 저 역시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지요.”
데일이 싸늘하게 말했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을 위해 너무나도 많은 이들이 꼭두각시가 되어 춤을 추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말이지요. 저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가족의 행복을 손에 넣을 자격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데일이 말을 이었다.
“아버지와 리제를 위해서, 저는 이 우스꽝스러운 형태를 깨트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 그것이 너의 결정이구나.”
엘레나가 웃었다.
“나로서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란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할 수밖에 없다.
“우리 청색은 그림자 군주를 위해, 기꺼이 우리가 가진 전부를 바쳐 복종함을 맹세하나니.”
나아가 데일이 파괴하려는 것이 설령 그녀의 세계일지라도, 어머니는 마땅히 그것을 긍정해줄 것이다. 그것이 아들의 엄마니까.
설령 그것이 우스운 가족 놀이였다고 할지라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어쨌거나 엘레나는 데일의 어머니였으므로.
거짓보다도 더더욱 거짓에 가까운 진실이었다.
* * *
레이디 스칼렛이 고통 속에서 미소 짓고 있었다. 유리스 후작이 그녀의 손을 잡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잘 참아주었다, 나의 사랑스러운 여동생아.”
그녀의 배는 더 이상 부풀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뱃속에 잉태되어 있는 악마의 씨앗이, 비로소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혐오스러운 아기가 적색 마탑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날, 결사의 의식을 통해 레이디 스칼렛이 뱃속에 잉태한 진화의 악마.
살아가는 것은 곧 투쟁이다. 승리하는 자는 살아남고 패하는 자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그리고 삶의 투쟁에서 패배하고 살아남지 못하는 이들에게, 자신들의 전부를 빼앗고 포식하는 승리자는 곧 악(惡)과 다름없으리라.
그 점에 있어 레이디 스칼렛이 낳은 것은 삶의 투쟁, 나아가 먹이사슬의 정점에 군림하는 악의 정점이었다.
앙그라 마이뉴.
아기가 울음을 터뜨렸고, 레이디 스칼렛이 조용히 아이를 보며 미소 지었다.
“아아, 어쩜 이리도 사랑스러운 아이람.”
적색 마탑이 숭상하는 것은 힘의 사상이다. 그 점에 있어, 이 존재는 그들 마탑의 사상에 부합하는 가장 적합한 후계자였다.
“동생을 보지 못하고 죽은 레이가 너무나도 가엾어요.”
스칼렛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비록 그녀를 통해 잉태되기는 했어도, 이 존재 역시 레이와 다를 바 없었다.
거짓의 아이.
그러나 피가 이어지지 않은 이들의 유대는, 그 어느 가족보다도 진실에 가까운 거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