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 * *
빛과 재가 격돌했다.
평화의 중재자가 흩뿌리는 찬란하기 그지없는 빛 속에서, 소멸의 재가 소용돌이가 되어 휘몰아쳤다.
밤까마귀 기사의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흑기사가 쇄도했다.
일각이 지났고, 거리가 좁혀졌다. 피스메이커의 칼자루가 잿더미의 군주를 그대로 갈라놓았다.
갈라진 마왕의 육체가 재가 되어 흩뿌려졌고, 이계의 용사가 자기 팔에 암혈의 갑주를 덧씌웠다.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에서 종말의 냉기가 솟아나 휘몰아쳤다.
동시에 마왕 역시 이계의 용사가 보여준 것과 같은 종말의 냉기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레이 유리스의 심장에 동화함으로써 『차가운 재의 서』이자 마왕의 의식은 결코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 설령 레이가 그 의미를 알지 못할지라도.
그리고 레이 유리스가 쌓아 올린 것들은 어느 의미에서 결코 헛되지 않았으리라.
나아가 마왕이 펼치는 종말의 냉기는 결코 레이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두 얼음이 그대로 맞부딪치며, 재와 겨울밤의 두 세계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팔자 좋게 세상 구경이라도 하신 것 같네.”
“레이는 불과 빛의 제국을 계승할 자였다. 그리고 나는 기꺼이 그 아이의 사상이 되기로 약속했지. 그 아이는 나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었다.”
“잿더미의 군주가 적색의 후계자와 궁합이 맞을 줄은 몰랐는데.”
“불과 재, 삶과 죽음. 무엇이 다르다고 생각하나?”
종말의 냉기를 휘감으며 잿더미의 군주가 비로소 그 형태를 갖추었다. 성장하는 것은 용사 하나가 아니었다.
재와 냉기의 군주가 그곳에 있었다.
“레이의 거짓은 진실보다 더욱 진실했다. 사기꾼이자 속임수의 삶으로 가득 차 있는 거짓의 군주, 네놈에 비할 바가 아니지.”
“그래서 이대로 나와 손을 잡기를 거부하고, 옛 숙주의 복수라도 할 생각이신가?”
피스메이커의 칼자루를 고쳐 잡으며 데일이 싸늘하게 조소했다.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잿더미의 소용돌이가 그대로 멎었다.
“이미 네놈의 심장에는 ‘옛 어둠의 어머니’께서 기거하고 계시지.”
마왕이 말했다.
“이미 마도서와 융합하고 있는 자가, 도대체 어떻게 나와 손을 잡겠다고 말하려는 것이냐?”
“마법사가 계약할 수 있는 마도서는 오직 하나.”
일순, 이계의 용사를 휘감고 있는 오러 아바타가 해제되었다. 작센의 데일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작센의 ‘검은 공자’는 『검은 산양의 서』를 그의 심장에 새겨넣었다. 네 말대로 이 이상 마도서를 융합시킬 수는 없지. 그러나…….”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다시금 오러가 폭발하듯 데일의 육체를 휘감았다. 밤까마귀 기사의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이계의 용사가, 그의 투구를 벗었다. 비로소 용사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계의 용사는 그렇지 않다.”
“……!”
“내가 너와 계약을 맺고자 하는 것은 ‘검은 공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용사’로서의 나다.”
용사가 말했다.
“그 행위가 가져올 후폭풍에 대해서 알고는 있는 것이냐.”
“각오하고 있지.”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그걸 몰라서 묻나?”
용사가 되물었다.
“아직도 이계의 용사가 정말로 넘치는 사명감과 애국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세계 평화를 위해 마왕을 쓰러뜨렸다고 생각하나?”
“그럴 리가.”
마왕이 조소했고, 데일이 고개를 되물었다.
“그럼 무엇을 망설이지?”
“…….”
“실패해도 네가 그토록 미워 마지않는 용사가 죽을 것이고, 성공할 경우 나는 기꺼이 너의 숙주로서 새 생명을 부여할 것이다.”
“재미있구나.”
마왕이 웃었다. 재의 세계가 다시금 휘몰아쳤고, 그대로 검은 공자가 고개를 돌렸다.
“슈브, 나를 도와줄 수 있겠어?”
─ 응! 내가 이렇게 재미있는 광경을 놓칠 것 같아?
어느덧 데일의 곁에 있는 슈브가 키득거렸다.
다시금 밤까마귀 갑주가 휘감기며, 이계의 용사가 의식을 다잡았다.
이미 작센의 데일은 6서클의 경지를 손에 넣었고, 그 6서클의 경지는 지금까지의 장로들과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는 그것이었다. 그렇기에 이것은 능히 시도할 가치가 있는 도박이었다.
데일이 ‘이계의 용사’로 존재하는 것은 결코 사상의 갑주 따위가 아니었다. 이계의 용사는 아바타 따위가 아니라, 또 하나의 자기 자신이었으니까.
그 사실을 명백하게 자각하고, 데일이 아니라 용사의 심장을 투영하며 실체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슈브의 촉수와 융합하고 있는 검은 공자의 심장이 아니라, 희고 어두운 겨울밤 속에서 덧없이 쓰러진 사자(死者)의 심장을.
마법이란 곧 사상의 투영이다. 그리고 지금, 데일이 투영하는 것은 또 하나의 자기 자신이었다.
물리적으로 두 개의 심장을 생성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검은 산양의 서』와 융합하고 있는 6서클의 심장을 향해, 육체 일부로 거듭나 있는 아티팩트 ‘그림자 망토’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대로 검은 공자의 심장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림자 심장(Shadow Heart).
그대로 이계의 용사가 팔을 뻗었고, 잿더미의 세계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림자 군주의 세계가 잿더미의 세계를 집어삼켰고, 집어 삼켜진 잿더미의 세계가 그림자 심장과 하나로 융합하고 있었다.
『차가운 재의 서』와 융합하고 있는 그림자 심장.
촤아악!
그와 동시에, 데일의 심장과 융합하고 있는 『검은 산양의 서』가 촉수를 뿜으며 날뛰기 시작했다.
심장에 드리워진 그림자, 바로 그 그림자 심장을 집어삼키듯 칠흑의 촉수를 뻗어 휘감았다.
이 복잡하기 그지없는 작업의 마지막 바느질을 담당하는 것은 그녀의 몫이었으니까.
─ 있지, 오빠.
슈브가 즐거움을 참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 오빠는 도대체 누구야?
그 물음 앞에서, 그림자 군주가 잠시 침묵했다.
“나.”
침묵 끝에 데일이 말했다.
* * *
사상의 세계가 거두어지고, 그곳은 어느덧 장미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랭커스터 대공령 내의 대지였다.
존 랭커스터 측의 야영지, 그러나 그곳에 더 이상 존 랭커스터를 위해 충성하는 이들은 남아 있지 않았다.
살아남은 자들 모두가 무릎을 꿇었고, 당당히 승리를 쟁취한 랭커스터의 정당한 후계자가 그곳에 있었다.
샬롯 랭커스터.
“기다리고 있었어, 데일.”
일부러 데일과 레이가 펼친 사상의 세계에 개입하지 않았다. 지금의 그녀로서는 능히 가능한 일이었음에도.
천검의 무위를 가진 그녀에게 있어, 청색 거미줄에 빠진 오합지졸 부대를 제압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을 지휘해야 할 수장, 존 랭커스터가 덧없이 널브러진 시체가 되어 있었으니까.
일찍이 유리스와 랭커스터의 이름을 가진 적색의 후계자, 레이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적색의 후계자를…… 쓰러뜨렸구나.”
두 사람이 펼친 사상의 세계가 소멸했고,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데일이었다. 그 의미를 모를 샬롯이 아니었다.
“응.”
“전쟁이 시작되겠네.”
“시작되겠다고?”
그 말을 듣고 데일이 씁쓸하게 웃었다.
“주위를 둘러봐, 샬롯.”
“…….”
“전쟁은 이미 시작됐어. 돌이킬 수 있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없지.”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말하며 샬롯 역시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도 이 전쟁은 끝이 났어.”
그러나 주위에 널브러져 있는 것은 적들의 살과 피와 뼈였고, 살아남은 적은 오로지 투항하고 무릎 꿇은 자들이었다.
“포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샬롯이 되물었다. 그 말에 데일이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되물었다.
“네 포로를 나보고 물어서 어쩌자는 겁니까, 랭커스터 대공 각하.”
랭커스터 대공의 이름이 튀어나왔고, 그러나 그곳에 있는 누구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하나의 전쟁이 끝이 났다. 그리고 곧 새로운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다가올 전쟁은 결코 이곳 제국에서 벌어지는 싸움이 아니리라.
* * *
존 랭커스터와 레이 랭커스터가 사망했다. 그 직후, 랭커스터 대공령 내의 잔당이 항복을 외치고 샬롯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세는 빠르게 기울다 못해 그대로 결착이 나버렸다.
“삼가 랭커스터 대공 각하를 뵙습니다!”
“장미의 가주(家主)를 뵙습니다!”
랭커스터 공작성의 옥좌에, 샬롯이 앉아 있었다. 천검의 이름을 가진 제국 제일의 여귀족으로서.
* * *
그로부터 얼마 후, 랭커스터 공작성의 침실.
샬롯과 데일이 그곳에 있었다. 랭커스터 대공과 그녀의 남자, 동시에 작센의 이름을 가진 부부로서.
승전과 샬롯의 후계자 계승을 통해 대공령에서는 축제가 벌어졌고, 그 후에는 전쟁의 피해를 수습하고 영지의 평화를 되돌리는 작업이 이루어지리라.
이 영지를 지배하는 대귀족의 이름으로.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또다시 혼자서 돌아가는 거구나.”
샬롯이 씁쓸하게 말했고, 데일이 말없이 미소 지었다.
“이대로 평생 못 보는 것도 아니잖아.”
“알고 있어.”
샬롯이 애써 태평하게 웃었다.
“그때랑은 다르니까. 아니, 그때도 너는 결코 내 곁을 떠나지 않았어.”
샬롯이 데일을 떠났을 때조차, 데일은 샬롯을 떠나지 않았다.
“나의 주군이 내리는 명령을 기꺼이 수행하는 게, 기사의 의무니까.”
“이제는 함부로 명령 내리는 것도 무서울 지경이 됐지.”
데일의 말에 샬롯 역시 웃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침묵 끝에 샬롯이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이, 네가 내 영지에 머무르는 마지막 밤이네.”
“응.”
“그럼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을까?”
샬롯이 조심스럽게 물었고, 데일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기 무섭게 샬롯이 입술을 겹쳤다. 데일 역시 팔을 뻗어 그녀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달빛이 무척 아스라했다.
* * *
샬롯은 랭커스터의 가주가 되어 그녀가 다스려야 할 영지에 남았고, 동시에 작센의 데일은 마땅히 그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다.
3차 장미 전쟁에서 승리를 손에 넣고, 여느 때처럼 호사가들의 입을 통해 ‘검은 공자’의 잔혹함과 악명을 과시하며.
동시에 적색의 후계자 레이 유리스가 데일의 손에 쓰러졌다는 것은, 제국 전체에 돌이킬 수 없는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멈추어 있는 것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제는 누구도 그것을 멈출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가속하기 시작했다.
대륙 전체에 걸쳐 시시각각 벌어지는 돌이킬 수 없는 일들.
그것은 작센 공작령조차 예외일 수 없었다.
검은 공자가 돌아왔고, 여느 때처럼 아버지 작센 공작이 그의 자랑스러운 아들을 맞이해 주었다.
그의 아내이자 데일의 어머니, 엘레나와 함께.
“어서 오렴, 데일.”
작센 공작의 곁에서 엘레나가 생긋 미소 지었다.
“무사히 돌아와서 이 이상 기쁠 수가 없구나.”
“아무렴, 우리의 아들이지 않소.”
그녀의 말에 작센 공작이 나지막이 미소 지었다. 숨길 수 없는 아버지의 흐뭇함을 드러내며.
“그래요, 우리의 자랑스러운 아들이죠.”
엘레나가 웃었다.
그러나 데일은 웃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