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24화 (224/301)

224화

* * *

“레이가…….”

그들을 이어주고 있는 의식의 결속이 끊어졌고, 청색 마탑의 일실에 남겨진 핏빛공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청색의 흑막, 아라크네가 말없이 침묵을 지킬 따름이다.

핏빛공 유리스 후작이 그대로 아라크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참으로 유감스럽게 되었네요, 유리스.”

“…….”

“제가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베풀어줄 수 있는 자비는, 당신이 무사히 살아 이곳을 빠져나가게 해드리는 것이지요.”

“마지막까지 거짓과 그림자의 기수로 남아 복종할 생각입니까?”

“제가 어째서 그림자 군주를 위해 충성하는지 알고 싶나요?”

“……딱히 알고 싶지 않습니다.”

유리스 후작이 싸늘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쟁이 시작될 것이고, 그 전쟁 속에서 이제 우리는 적이 될 거예요.”

청색의 마탑주가 슬픈 듯이 미소 지었고, 유리스 후작이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처음으로 그의 어깨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림자 군주의 말이 맞습니다.”

“무엇이 말이지요?”

“저는 삼류 악당에 불과했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말하며 핏빛공이 웃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미친 사람처럼 낄낄거리며. 삼류 배우처럼 과장되기 그지없는 제스쳐 끝에, 갑작스럽게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리고 시시한 악당 놀이는 여기까지입니다.”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표정으로 핏빛공이 말했다.

“마지막으로 묻지요. 그림자와 거짓을 배신하고 나와 함께 싸우지 않겠습니까?”

“유감스럽게도 그럴 수는 없답니다.”

아라크네가 말했고, 핏빛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그의 육체에 피의 활자들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그렇담 그대들의 군주가 말했듯, 삼류 악당처럼 물러나 훗날의 때를 기다려줄 이유도 없지요.”

“어머나.”

“다시 보게 되었을 때 적이 될 거란 헛소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대륙 제일의 적마법사가 다시금 여덟 개의 서클을 가속하기 시작했다. 그의 앞에 있는 청색 마탑주를 전력으로 배제하기 위해서.

그러나 바로 그때였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지금조차 서로를 보고 있지 않답니다.”

“그대의 헛수작에 제가 놀아날 것 같습니까?”

“다시 보게 되었을 때 적이 될 거란 사실 역시, 우리가 다시 볼 수 있을 때의 이야기겠지요.”

아라크네가 즐거운 듯이 웃었다.

“……!”

바로 그때, 핏빛공이 딛고 있는 일대의 풍경이 사라졌다.

핏빛공, 유리스 후작은 아무것도 없는 대지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모르는 자들이 보기에는, 방금까지 미친 사람처럼 허공에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사람처럼 보였으리라.

제국의 북부, 얼음의 대지. 그가 있었다고 생각한 청색 마탑은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탑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허의 대지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 * *

그 시각 새벽, 작센 공작성의 침실.

청색 마탑의 첩자로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결코 첩자란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아가 그 규칙은 청색 마탑의 지배자들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아…….”

작센 공작의 아내, 엘레나가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그의 곁에는 사랑스러운 그이가 잠들어 있었다.

“왜 그러시오, 엘레나?”

“잠시…… 악몽을 꾸었어요.”

이내 엘레나가 아무것도 아니란 듯 미소 지었다. 작센 공작이 걱정스러운 듯 팔을 뻗어 그녀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곁에는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남자가 누워 있었고, 그녀의 아들은 제국의 그 누구와도 비할 바 없는 ‘검은 공자’였으니까.

“우리 아들의 꿈을 꾸었어요.”

“악몽이었소?”

“네.”

거짓과 모략의 대가, 청색 마탑이 그림자 군주를 위해 충성하는 것은 생각보다 무척 알기 쉬운 이유였다.

청색 마탑 같은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존재했으나 그것은 결코 형체나 실체를 가진 무엇이 아니었다.

애초에 청색 마탑의 음습한 일실에서 거미줄을 짜는 아라크네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청색의 탑조차 실체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 대지에는 아무것도 세워져 있지 않았으니까.

귀족 가의 자제들이 청색 마탑의 마법을 배울 때에는, 늘 시기 좋게 청색의 스승들이 나타나 준다. 그러나 그 스승들조차 진정한 의미에서는 결코 청색의 마법사라 부를 수 없다.

결국 세피아처럼 그들의 뜻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니까.

청색 마탑의 실체는 오로지 그들의 정신 속에서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청색 마탑주를 비롯한 소서리스 의회가 자기를 청색 마탑이라 규정할 때, 비로소 청색 마탑이 존재할 수 있다.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존재.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 청색은 명백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데일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 없다오.”

“후후, 그래요. 당신의 아들을 걱정하는 것처럼 바보스러운 일도 없겠지요.”

그렇게 말하며 엘레나가 미소 지었다.

작센의 데일, 사랑스러운 그녀의 아들. 아들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모정(母情)은 달라지지 않는다. 설령 그 아이가 어머니를 향해 날카로운 칼날을 겨눌지라도.

처음부터 그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 아이는 그림자의 군주가 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가지고 있었다.

엘레나, 청색 마탑주가 지그시 작센 공작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었다.

“정말로 자랑스럽고, 또 사랑스러운 우리의 아들이에요.”

훗날 어둠과 죽음, 거짓과 모략의 흑청을 계승할 아이로서.

그리고 그 아이는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어머니로서 그것은 마땅히 축하해야 할 일이었으며, 동시에 무척이나 씁쓸한 일이기도 했다.

* * *

레이 유리스가 죽고, 그의 심장에 깃들어 있는 『차가운 재의 서』가 폭주를 일으키며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냈다.

그러나 그 마도서의 폭주에 기름을 부어준 것은 동시에 6서클을 각성한 데일의 마력이기도 했다.

마도서는 그 자체로 마법사의 사상을 담고 있는 그릇이다. 이미 오래전에 죽었어야 할 존재가 마도서의 화신이 되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 자체는 그리 이상하지 않다.

저것은 진짜 마왕이 아니라, 결국 그가 남겨놓은 사상의 정수에 불과하니까.

그렇기에 그 가치가 결코 폄하될 수 없는 것이다.

마법사의 존재는 오로지 의식으로 규정되며, 마도서는 바로 그러한 의식이 낳은 산물이자 마(魔)의 유전자 그 자체다.

잿더미의 왕이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마왕 발로르였다.

광희하는 잿더미의 세계를 거느리고 있는 차가운 재의 군주.

“어째서 나를 일깨웠나, 어리석은 인간이여.”

“이대로 다시금 영겁의 잠에 빠져들고 싶나?”

데일이 되물었다. 동시에 그의 체내에서 오러가 휘몰아치며, 검의 극의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밤까마귀 기사의 갑주를 두르고 있는 흑기사. 그러나 그 속에 감추어진 내용물을 알지 못할 마왕이 아니리라.

잿더미의 세계가 미친 듯이 요동치며 당장이라도 그를 날려버릴 듯 적의를 머금기 시작했다.

“이계의 용사…….”

“그래, 이제야 옛날 기억이 좀 나지?”

데일이 그대로 피스메이커의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그의 검끝에서 빛나기 시작하는 평화의 빛을 보고, 비로소 마왕의 주위에 소멸의 재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레이 유리스가 보여준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파괴력을 가진 재의 폭풍이었다.

잿더미의 왕이란 이명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당장 용사조차 홀로 마왕을 쓰러뜨린 것이 아니다. 전 성검사를 비롯해, 제국의 헤아릴 수 없는 강자들과 함께 하는 사냥이었으니까.

“지금의 너는 마도서에 깃들어 있는 의식의 조각에 불과하다. 내 마력의 공급이 끊어지는 시점에서 다시 침묵하고, 그대로 봉해져 교회의 밑바닥에 처박히겠지.”

“나를 가진 이 아이의 눈을 통해, 많은 것들을 보아왔다.”

마왕이 말했다. 이계의 용사에게 있어 죽음은 끝이 아니었고, 그것은 마왕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차가운 재의 서』에 깃들어 있는 것은 명백하게 마왕의 의식이자 자아 그 자체였으니까.

“그리고 네놈, 그림자 군주의 존재에 대해서도 뼈저리게 알 수 있었지.”

“레이 유리스가 마도서의 화신을 꺼내지 못한 게 다행이었군.”

“그래서 이 가엾은 아이를 죽였나?”

마왕이 조소했다.

“이 아이의 말이 옳다. 네놈은 사기꾼이지. 그리고 이 가엾은 아이는 마지막까지 그 진실을 알지 못하고, 평생을 재능의 벽과 열등감 속에서 발버둥을 치다 비참하게 삶을 마감했다.”

“…….”

“거짓의 군주는 그야말로 네놈을 두고서 하는 말이겠지, 이계의 용사.”

마왕이 말했다. 이 세계에서 유이하게 데일의 정체를 알고 있는 존재로서.

“진실이니 거짓이니, 시시한 이야기 따위를 하고자 너를 깨우지 않았다.”

“그럼 무엇을 위해 나를 깨웠지?”

“마왕령 너머에서 네가 도망친 어둠의 대지.”

데일이 입을 열었다.

“그곳에 있는 작센의 《엘드리치》들에게서 도망쳤지.”

“…….”

“나와 함께 손을 잡고, 그 땅을 되찾고 싶지 않나?”

이계의 용사가 물었다. 비로소 마왕의 주위에 퍼져 있는 잿더미의 세계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너를 그 마땅히 그 대지의 지배자로 앉게 해주겠다.”

“무엇을 바라고서 하는 짓이지?”

“지금 그 땅을 점거하고 있는 찬탈자들을 쓰러뜨려야겠지.”

데일이 말했다. 불사공 프레데릭을 비롯한 옛 작센의 가주들.

그들에 맞서, 용사가 마왕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좋다.”

잿더미의 왕이 싸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에 앞서, 우리 사이의 빚이 아직 청산되지 않았구나.”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그 모습을 보며 이계의 용사가 검을 고쳐 잡았다.

동시에 멈춰 있는 잿더미의 세계가, 다시금 휘몰아치며 재의 소용돌이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 * *

“어머니!”

엘레나가 작센 공작성의 중정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딸 리제가 함박웃음을 머금고 달려와 포옹을 했다.

그녀의 곁에 있는 세피아가 즐거운 듯 웃으며 말했다.

“따님의 성장이 무척이나 빠릅니다. 마치 청색 마법이 천성(天性)이라도 되는 것 같네요.”

“후후, 그렇게 말해주시니 다행이네요.”

그 말을 듣고 엘레나가 웃었다.

청색 마탑의 소서리스(Sorceress), 이야기 속의 여자 마법사.

“자랑스러운 그이의 딸이니까요.”

엘레나가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사랑스러운 딸 리제를 포옹하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세피아 님, 잠시 자리를 비켜주실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세피아는 달리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물러났다. 멀어지는 그녀의 등을 보며, 일순 엘레나의 표정에서 감정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시였다.

엘레나가 리제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순진하게 빛나는 소녀의 눈동자가 그곳에 있었다.

“우리 리제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오라버니처럼 훌륭한 마법사요!”

엘레나의 물음에 리제가 일말의 주저도 없이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엘레나가 지그시 미소 지었다.

“나도 우리 딸이, 얼마나 훌륭한 마법사가 될지 무척 기대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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