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 * *
“…….”
레이의 몸에 피스메이커를 내리꽂기 직전, 청색의 나비들이 날아올랐다.
데일의 검이 내리꽂히는 것을 가로막기 위해, 레이의 몸을 뒤덮듯이.
푸욱!
그대로 데일의 검이 내리꽂혔고, 그러나 레이의 육체는 수백 마리의 청색 나비로 산화하며 흩어질 따름이었다. 마치 덧없는 환영처럼.
“이게 무슨 짓이지?”
역수로 피스메이커를 고쳐잡고 있는 이계의 용사가, 싸늘하게 되물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우리의 주군이시여.”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일이 고개를 들었고, 청색의 로브를 두르고 있는 실루엣이 그곳에 있었다.
“이 아이의 목숨을 거두는 것을, 훗날의 일로 보류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청색 마탑주가 그곳에 있었다. 필요에 따라 대륙 전체에 거미줄을 흩뿌리고, 대상의 의식을 결속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대륙 제일의 청마법사로서.
거짓과 모략의 청색 마탑.
“그 아이는 결코 당신의 적수가 될 수 없습니다. 평생토록 그림자 군주의 발끝조차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 그 아이의 진실이지요.”
“……그럼 나를 가로막는 이유가 뭐지?”
“그러나 그 아이를 죽였을 때, 그 행위가 가져올 후폭풍은 지금의 그림자 군주께서 감당하실 것이 아닙니다.”
“핏빛공을 말하고 있나.”
“아, 그렇답니다.”
바로 그때였다. 적색의 로브를 두르고 있는 남자 역시,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
마찬가지로 그것은 결코 실체가 아니었다. 청색 마탑주의 능력에 의해 결속되고 있는 의식에 불과하다.
“부디 제 아들을 이쯤에서 놓아주시지 않겠습니까.”
“어째서 핏빛공이 이 자리에 함께 있는 것이지?”
“송구하오나, 그가 직접 제가 있는 일실을 찾아왔습니다.”
“……랭커스터 공작령이 아니라, 청색 마탑을 찾았다고?”
“아무래도 이쪽이 조금 더 이야기가 빠를 것 같아서요.”
핏빛공이 대답했다. 어느덧 바닥에 쓰러진 레이의 육체가 핏빛공의 곁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 지……!”
“걱정할 것 없다, 레이.”
핏빛공이 말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부디 물러나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림자 군주시여.”
핏빛공이 말했다. 지금까지의 과장되기 그지없는 말투가 아니었다.
“지금의 당신이 아직 제국과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아들 레이가 이곳에서 죽게 될 경우…….”
핏빛공이 무척이나 정중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말을 잇는다.
“저는 황금과 그림자의 대립과 별개로, 오로지 작센의 파멸을 위해 제가 가진 역량 전부를 이용하겠다 맹세할 수 있습니다.”
“청색의 흑막, 그대의 탑에 있는 핏빛공을 죽이지 않을 이유가 있나?”
데일이 싸늘하게 되물었다. 핏빛공이 청색 마탑주를 보고 있다는 것은, 곧 그가 사지에 제 발로 들어와 있음을 의미할 테니까.
“아, 마침 청색의 흑막에게는 과거에 청산하지 못한 빚이 조금 남아 있어서 말입니다.”
“그 빚이, 섬기는 주군의 앞길마저 방해하고 가로막을 정도의 것이었나?”
데일이 어이가 없어 물었다. 청색의 흑막이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나는 청색 마탑이 바라는 많은 것들을 수행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내 몸에 묶여 있는 청색 거미줄이 무척이나 의심스러웠지.”
“……우리 청색은 늘 우리의 주군을 위해 충성하고 있습니다.”
청색 마탑주가 고개를 숙였고, 데일이 오러 마스터의 아바타를 해제했다.
동시에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가 그 육체를 휘감고, 진실의 눈이 청색의 흑막을 주시했다.
거짓과 모략의 대가가 감추고 있는 장막 너머의 비밀, 그리고 그 거미줄의 실체를 낱낱이 파악하기 위해서.
진실의 군주로서, 삼라(森羅)의 진실을 간파하는 그림자 군주의 능력.
“이해했다.”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뜻에 따라 검을 물리고, 레이 유리스를 살려 보내주지.”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핏빛공이 조용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스릉.
데일이 용사의 애검을 칼집에 집어넣고, 그대로 등을 돌렸다.
“죄송합니다, 아버, 지…….”
비틀거리는 육체로 몸을 일으키며, 레이가 고개를 숙였다. 핏빛공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때가 아닐 따름입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겠지.”
바로 그때, 등을 돌린 데일이 말했다.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싸늘한 목소리였다.
“그럼 내가 어째서 삼류 악당처럼 물러나, 이대로 때를 기다려줘야 하지?”
“……!”
뒤늦게 청색의 흑막이 팔을 뻗었다. 청색 마탑주가 펼치는 거짓과 모략의 마법이 레이를 지키기 위해 펼쳐졌고, 동시에 그 거짓을 향해 침묵하고 있는 그림자 군주의 ‘그림자’가 쇄도했다.
그림자 속의 칼날, 레이디 섀도우의 핏빛 검이었다.
쨍그랑!
바로 그 검이, 핏빛 궤적을 남기며 휘둘러졌다.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째서 거짓과 모략의 대가들이, 거짓의 군주를 섬기지 않고 그림자와 진실의 기수(旗手)를 자처하는지 이해했다.”
데일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청색의 흑막, 네 능력으로는 절대 내 눈을 속여넘길 수 없다는 것을.”
“…….”
“너는 나를 청색의 충성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주군으로 있게 하고 싶겠지. 그러나 이제는 알 수 있다. 청색은 결코 나에게 거스를 수 없는 꼭두각시란 것을.”
그 말대로였다.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청색 마탑주는 결코 그림자 군주의 적이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절대 그림자 군주를 거스를 수 없는 나약함을 들키고 싶지 않아 했다.
그렇기에 그토록 필사적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베일에 감추고 우위를 점하려는 것이었다. 왕을 조종하는 흑막으로서.
베일이 걷혔다.
바로 직전에 그림자 군주가 ‘진실의 눈’으로 목격한 것은 알량하기 그지없는 과거사가 아니었다.
이 일대에 펼치고 있는 청색의 거미줄, 청색 마탑주의 마법을 파훼하기 위한 마력의 실들이었으니까.
그녀가 의식을 결속하고 통제하며, 속이기 위해 결계처럼 펼치고 있는 거짓의 직조(織造)들.
실을 보고 나서, 그 실을 끊는 것은 레이디 섀도우, 오렐리아의 몫이었다.
경악하고 있는 핏빛공과 청색 마탑주의 모습이 찰나에 걸쳐 스쳤고, 이내 덧없이 스러졌다.
거짓의 결계가 깨지고 나서 데일이 그대로 검을 뽑았다. 다시금 오러가 폭발하며 밤까마귀 기사의 아바타가 휘감겼다.
전투와 살상을 목적으로 하는 검의 극의.
이계의 용사가 피스메이커를 쥐고서 쇄도했고, 그 앞에서 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아직……!”
다가오는 용사의 검을 앞두고, 레이가 팔을 뻗었다.
다시금 잿더미의 세계가 일대를 집어삼켰고, 그 위를 희고 어두운 겨울밤의 세계가 덧씌웠다.
소멸의 재가 흩날렸다. 그러나 흩날리는 재가 이계의 용사에게 닿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촤악!
검이 휘둘러졌다. 피가 흩뿌려졌다.
동시에, 레이 유리스의 육체가 잿더미가 되어 흩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회피나 도망을 위함이 아니었다. 과부하를 감당하지 못하고 『차가운 재의 서』가 폭주를 일으켰고, 그대로 사용자의 육체를 잠식하고 있었다.
“내가 진짜 진실을 알려줄까.”
데일이 말했다. 레이 유리스가 침묵했다.
“너는 그림자 군주의 발끝에도 닿을 수 없다고 했지.”
“…….”
“그것은 거짓말이다.”
재가 되어 부스러지고 있는 레이가,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너는 나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 위험하고 경계해야 할 적이다. 그렇기에 지금 이 자리에서, 절대 너를 살려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게 네가 죽어야 할 이유다.”
“그렇습니까…….”
그 말을 듣고, 레이가 씁쓸하게 웃었다.
“적어도 당신에게 닿기 위한 제 노력은 아주 무가치하지 않은 셈이었군요.”
데일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이루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레이 유리스가 말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평화로웠다.
“그러나 그날 이후 제가 바라는 것은, 그저 당신의 발끝에 닿는 일이었지요.”
“…….”
“결코 당신에게 닿지 못할 거란 진실을 극복하고 싶었습니다.”
진실보다 진실한 거짓. 레이 유리스는 자기 손으로 그의 거짓을 진실로 바꾸었다.
“그리고 저는 비로소 그림자 군주의 위협이 되었군요.”
설령 핏빛공과 돌이킬 수 없는 적대 상황이 되고, 충성하는 청색 마탑의 부탁마저 저버릴 정도의 위협. 그것이 레이 유리스가 손에 넣은 진실보다 진실한 거짓이었다.
그렇기에 죽였다.
그렇기에 망나니 필립을 몇 차례고 죽이지 않았다. 설령 눈앞에서 아버지를 잃고 백작이 되었음에도, 데일에게 있어 위협조차 되지 못할 피라미니까.
“……그걸로 됐습니다.”
“그래.”
레이 유리스가 말했다. 잿더미가 그의 목덜미를 타고 얼굴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목소리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고, 그걸로 끝이었다.
잿더미가 흩날렸고, 희고 어두운 겨울밤의 냉기가 데일의 심장을 휘감았다.
슈브의 웃음이 미친 듯이 울려 퍼졌다.
너무나도 웃기고 웃겨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레이 유리스는 잿더미가 되어 덧없이 스러졌고, 데일은 남겨졌다.
동시에, 데일의 심장을 향해 또 하나의 촉수가 휘감기기 시작했다.
덧없음과 깨달음.
다섯 개의 서클을 뒤로하고, 공회전하는 마력이 갈 곳을 잃고 데일의 심장 주위에서 역류하기 시작했다. 터무니없을 정도의 마력이 쏟아지고 있었다.
데일이 깨달은 6서클의 경지는, 그야말로 덧없는 깨달음이었다.
너무나도 쉽고 맥없어서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그 덧없음의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거짓보다 진실에 가까운 거짓. 거짓보다 거짓에 가까운 진실. 천금보다 무거운 덧없음.
이 세계는 정말이지 아이러니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 세계였다.
그리고 그 역설의 깨달음이 데일을 다음 경지로 이끌어 주었다.
6서클.
나아가 지금의 데일에게 있어 6서클이 갖는 의미는 말할 가치도 없으리라. 하물며 그것은 슈브의 촉수마저도 아니었다.
순수하기 그지없는 마도(魔道)의 비경 그 자체였으니까.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흡사 멸망 이후의 세계를 보는 것 같은 잿더미의 세계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레이 유리스는 죽었다. 그러나 재가 되어 스러진 것은 어디까지나 레이 유리스 하나였다. 그의 심장에 깃들어 있는 『차가운 재의 서』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재의 세계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미친 듯이 요동치며 영역을 확장할 따름이었다.
“…….”
소유주를 잃고 폭주하며, 일대에 휘몰아치는 광활하기 그지없는 마력을 머금고 마도서가 ‘자신의 의지’를 자각하고 있었다. 나아가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어느덧 잿더미의 세계가 그들의 옛 군주를 맞이하고 광희하기 시작했다.
『차가운 재의 서』를 이루고 있는 사상의 화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왕…….”
데일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마왕의 재림.
차가운 재의 군주, 잿더미의 왕이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