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 * *
마왕 발로르의 마도서 『차가운 재의 서』가 비로소 그 힘을 드러냈고, 일대에 흩날리는 잿더미 위로 더더욱 강력한 마력이 휘감겼다.
“……많이 컸네.”
그 모습을 보며 그림자 군주가 싸늘하게 조소했다. 그날, 파이트 클럽에서 처음 그 능력을 드러냈을 때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레이 유리스의 성장은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흩날리는 소멸의 잿더미 사이로, 시린 냉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데일이 아니었다.
“저 역시, 그곳에서 ‘우주의 겨울’을 목격했지요.”
종말의 냉기, 세상이 얼음으로 끝날 것이란 그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
바로 그 냉기를 육체에 휘감으며 레이 유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결국 종말의 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나?”
“진실이라.”
데일이 조소하듯 되물었다. 레이 유리스가 즐겁다는 듯 웃었다.
후우웅!
“제국 제일의 천재, 제국 제일의 재능…… 참으로 사람들을 속여넘기기 좋은 핑곗거리죠.”
휘몰아치는 냉기를 뒤로하고 레이 유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 말에 그림자 군주가 일순 숨을 삼켰다.
“당신으로서는 무엇 하나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갖지 못한 자들은 그대 앞에서 절망하고 우러러보며 자신의 못남을 탓할 것이고, 재능 없음에 절망하겠지요.”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레이 유리스.”
“저도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솔직히 말해 잘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그저 ‘검은 공자의 재능’ 앞에서 절망하고 자신의 재능 없음을 탓하는 숱한 패배자 중 하나니까요.”
“…….”
“그러나 그저 순수한 재능의 차이라고 말하기에, 당신의 존재는 너무나도 완벽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수상하죠.”
그림자 군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결코 데일의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렴풋이, 레이 유리스의 직감은 진실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도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사기꾼.”
일말의 주저도 없는 즉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 데일이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거짓의 군주’는 당신입니다, 작센의 데일.”
그러나 레이 유리스는 웃지 않았다.
“당신의 그 능력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그렇게 완전무결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지, 저로서는 알 턱이 없습니다. 그러나 재능이란 말 따위로는 검은 공자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 그것 하나는 확실하지요.”
그 말에 비로소 데일의 웃음기가 사라졌다.
“저는 당신의 거짓을 파헤칠 것입니다.”
“황금과 그림자, 거짓과 진실, 세상의 종말, 참으로 시시한 것들에 집착하고 있군.”
데일이 차갑게 조소했다.
“말했듯이, 무엇 하나 나에게 흥미 없는 일이다.”
“그럼 무엇에 흥미가 있습니까?”
“…….”
제국을 무너뜨리는 것. 그러나 여기서 그 말을 내뱉는 것은 위험하다. 그렇기에 데일이 침묵을 지켰다.
“아, 또다시 거짓의 침묵으로 자신으로 포장하고 있네요.”
“쓸데없는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레이 유리스가 웃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데일 역시 주저하지 않았다.
암혈의 갑주를 휘감고,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를 전개하며 ‘데일의 세계’가 비로소 레이를 향해 쇄도했다.
전력을 담아 적을 배제하기 위한 무기의 형태로서.
촤아악!
칠흑의 성채를 구성하고 있는 슈브의 촉수가 휘몰아쳤고, 그 앞에서 ‘차가운 재’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흩날리는 재에 닿는 일체의 것들을 무(無)로 되돌리는 파괴의 마도서.
『차가운 재』가, 종말의 냉기를 머금고 휘몰아치고 있었다.
끝없이 휘몰아치는 슈브의 촉수를 집어삼키고 얼리며, 데일의 세계를 침범하고 있었다.
희고 어두운 겨울밤의 세계, 태고의 어둠과 종말의 냉기가 휘몰아치는 그곳에 우뚝 솟은 칠흑의 성채를 향해서.
“우리의 세계는 무척이나 닮아 있습니다.”
레이 유리스가 웃었다. 그림자 군주는 여전히 흑금의 옥좌에 앉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차가운 재를 흩뿌리며 레이가 걸음을 옮겼고, 그에 맞서 그림자 군주를 지키는 죽음의 기사들이 몸을 일으켰다.
냉기와 어둠으로 이루어진 데스나이트가 쇄도했고, 레이가 다시금 차가운 재를 흩뿌렸다.
그 손짓 하나가 일체의 것들을 다시금 무(無)로 되돌렸다.
일찍이 마왕 발로르가 그러했듯이.
“…….”
그림자 군주가, 흘끗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바라보았다. 마왕을 쓰러뜨린 옛 용사의 애검. 나아가 오러 마스터로서, 용사의 아바타를 가진 데일이다. 그리고 그 아바타는 밤까마귀 기사의 갑주에 의해 감춰져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용사의 아바타를 쓰는 이상, 결코 레이 유리스를 살려보낼 수는 없다.’
그렇기에 여기서 자신의 손으로 그의 목숨을 끊을 경우, 가져오게 될 리스크를 헤아렸다. 생각하는 것은 잠시였다.
망설임은 결코 길지 않았으니까.
그림자 군주가 옥좌에서 비로소 그의 몸을 일으켰다. 촉수들의 쇄도가 정지했고, 그것은 죽음의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릉.
비로소 용사의 애검, 피스메이커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데일의 육체, 오러 하트 속에서 삼색의 오러가 휘몰아치며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림자 군주를 상징하는 암혈의 갑주가 아니라, 검의 길을 추구하는 기사로서 쌓아 올린 아바타가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죽음을 상징하는 새, 밤까마귀의 표식이 그려져 있는 브레스트 아머.
밤까마귀 기사의 흑색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칠흑의 기사였다.
그리고 그 갑주 속에 숨겨진 존재를, 레이 유리스가 알 턱이 없으리라.
‘여기서 끝을 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데일이 땅을 박찼다.
타앗!
거리가 좁혀졌다. 동시에 레이 유리스가 거느린 차가운 재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재의 바람. 설령 기사로서 아무리 뛰어나도 잿더미 하나하나를 일일이 막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이계의 용사’에게 있어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째깍.
평화의 중재자, 피스메이커가 추구하는 궁극의 평화가 그곳에 펼쳐졌다.
영겁의 정체.
세상이 정지했다. 휘몰아치는 재의 바람들이, 알갱이 하나하나가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멎었다. 그 속에서 오로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용사 하나였다.
푸욱!
데일의 일검이 레이 유리스를 향해 휘둘러졌다. 심장을 찢고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다음에는 목이 뎅강 잘려나갔다.
촤아악!
피가 흩뿌려졌다. 그리고 멈춰 있는 세상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의 순살(瞬殺)이었다.
그러나 결코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덧없이 잘려 부서진 레이의 육체가, 재가 되어 스러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흩날리는 재의 무리가 하나의 지점을 향해 응축되고 있었다.
도망치게 놔둘 수는 없다. 그렇기에 이계의 용사가, 이제는 그림자 군주로서 팔을 뻗었다.
밤까마귀 기사의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팔 하나가, 마력에 휩싸이며 다시금 ‘암혈의 갑주’로 거듭났다. 마그마가 일렁이고 있는 칠흑의 생체 갑주.
두 아바타가 공존하며,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에서 종말의 냉기가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휘몰아치는 데일의 냉기를 막는 것은 마찬가지로, 레이 유리스가 가진 또 하나의 ‘냉기’였다.
우주의 겨울을 상징하는 두 냉기가 맞물렸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그 힘을 오롯이 끌어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저, 둘 중에서 완전에 가까운 것은 데일의 쪽이었다.
냉기가 냉기를, 겨울이 겨울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희고 어두운 데일의 세계가, 창백한 재가 불씨가 흩날리는 레이의 세계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의 압도였다.
뒤늦게 부서진 레이의 육체가 재로 승화하며 다시금 그 육골(肉骨)을 이루었고, 다급히 몸을 날렸다.
“도대체 어떻게……!”
무엇이 일어났나. 알 수 없었다. 그저 눈을 깜빡하는 사이, 그의 육체가 도륙 나 있었다. 아마 마도서의 힘을 빌리지 않았을 경우 꼼짝없는 즉사였겠지.
그러나 적어도, 마왕의 마도서를 가진 이상 레이의 육체는 쉽게 죽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데일이기에 망설임 같은 것은 없었다.
째깍.
다시금 세계가 정지했다. 그대로 땅을 박차고 쇄도하며, 암혈의 갑주로 이루어진 팔이 레이 유리스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쩌적, 쩍!
손끝에서 휘몰아치는 냉기가 그대로 레이의 육체를 집어삼켰다.
정지해 있는 초침(秒針)이 다시금 움직였다.
세상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나서, 레이 유리스의 눈에 비치는 것은 어느덧 코앞까지 쇄도해 그를 얼리고 있는 그림자 군주였다.
빨랐다. 빠르다? 아니다, 이것은 속도의 개념조차 아니었다.
위대한 혈족의 피를 잇는 어린 뱀파이어로서, 그의 육체조차 감지하지 못할 정도의 터무니없는 신속.
다급히 몸을 재로 되돌리려 했으나, 이미 냉기에 얼어붙고 있는 레이의 육체는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화르륵!
불꽃이 타올랐다. 레이 유리스의 체내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꽃이었다.
그대로 불꽃이 ‘아직 얼어붙지 않은’ 레이 유리스의 육체를 녹여버리기 시작했다. 자기 손으로 자기를 불태워 남아 있는 부위가 그대로 녹아내렸다.
녹아내렸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남아 있는 육체의 일부가 재로 승화하며 그대로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다시 레이 유리스의 육체가 형성되었을 때, 그것은 ‘사람의 형상을 모방하고 있는’ 처절한 무엇에 지나지 않았다.
피부가 찢어지고, 팔 하나가 사라졌으며, 두피가 모조리 벗겨지고 이목구비가 녹아내려, 두개골 일부밖에 남지 않았다. 휑하니 드러나 있는 눈동자가 데일을 응시했다.
메커니즘 자체는 썩어가는 육체 일부를 도려내는 것과 같다. 종말의 냉기가 전체를 집어삼키기 전에 필사적으로 자기 육체를 ‘도려냄’으로써 살아남은 것이리라.
“승부는 여기까지다.”
이계의 용사, 그림자 군주가 말했다.
“너는 나를 이길 수 없어.”
“아직, 아직입니다……!”
고작 사람의 형상을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레이는 입술을 악물고 고개를 들었다.
“그래? 그럼 죽어야지.”
그림자 군주는 망설이지 않았다. 적 앞에서 자비를 베풀거나 시시한 이야기를 할 여유 따위는 없으니까.
부조리한 세상에서 ‘검은 공자’는 늘 승리하는 쪽이었다.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대로 데일이 땅을 박찼고, 레이 유리스가 저항했다.
처절하다 못해 절망에 가까운 발악이었다.
‘시간을 멈추는 능력을 이 이상 남발할 필요는 없다.’
피스메이커가 가진 궁극의 평화는, 그 자체로 검과 의식의 막대한 과부하를 가져오는 능력이다. 이 이상 능력을 사용했다가는 검과 이계의 용사, 양쪽의 무사를 보장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승부의 추는 확실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오러를 머금고 있는 검이 쇄도했고, 나아가 암혈의 갑주를 덧씌운 데일의 팔이 삼색의 마력을 내뿜었다.
그 앞에서 레이 유리스가 자신의 육체를 내주고 저항하며 발버둥 쳤다.
비로소 그의 두 다리가 잘리고 나서 잿더미가 되려는 찰나, 데일이 펼친 종말의 냉기에 집어삼켜졌다.
쿠웅!
이제는 설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 상체밖에 남지 않은 레이가 바닥을 기었다. 데일은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며, 그대로 용사의 애검을 역수로 고쳐 잡았다.
창백하게 시린 종말의 냉기를 머금고서.
카앙!
검이 내리꽂혔다.
동시에, 청색의 나비가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