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21화 (221/301)

221화

* * *

핏빛공의 발밑을 중심으로 업화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고, 동시에 그의 육체 위로 피의 활자들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적색 마탑주가 비로소 그의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상징, 마도서 『피의 책』이었다.

“어머, 우리의 아름다운 옛 시절을 다시 보여주기라도 하실 생각이신가요?”

“…….”

아라크네가 능청스럽게 되물었고 유리스 후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째서 진실의 군주를 위해 충성하고 있지? 거짓의 모략의 대가여.”

“진실보다 아름다운 거짓을 추구하는 그대들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진실에 집착하는 이들이란 생각을 해보신 적이 없나요?”

아라크네가 되물었다.

“진실보다 ‘진실한 거짓’을 추구하는 그 시점에서, 그대들의 존재는 결국 그림자 군주의 그림자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모두 진실의 노예와 다름없는 것이 아닐까요.”

“작센의 일개 애송이가 정녕 ‘진실의 군주’에 어울리는 자라 생각하나?”

“글쎄요.”

아라크네가 즐거운 듯 웃었다.

“그대의 말대로, 장미 전쟁에서 저와 청색 마탑의 소서리스는 모두 손을 뗐답니다. 오직 하나, 이해 당사자로서 참여하고 있는 ‘미스트리스 티티니아’를 제외하고 말이지요.”

“……그래.”

그렇게 말하며 핏빛공의 서클이 회전을 멈추었다. 휘몰아치는 불꽃의 마력이 사그라들었다.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고작 혈족의 계승자 하나를 위해 이 정도의 리스크를 짊어지다니. 참으로 의외였어요.”

“…….”

핏빛공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혈마법의 적성을 가진 백여 명이 넘는 아이들을 하수구에 처넣고, 최후의 생존자를 걸러내는 실험이었다.”

침묵 끝에 핏빛공이 말했다.

“그 아이, 레이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지. 살아남고 나서, 그를 찾으러 온 나를 보고 웃더군.”

“…….”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버지. 그게 그 아이의 첫마디였다.”

“그래서 그 아이의 아버지가 되기를 자청했나요? 아, 이것 참. 참으로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부자의 정이네요.”

그 말을 듣고 아라크네가 웃음을 터뜨렸다. 웃기고 웃겨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그러나 핏빛공은 결코 웃지 않았다.

“우리는 결코 진실이 될 수 없다. 세상은 얼음으로 끝나겠지. 네 말이 옳다. 아무리 우리가 그렇게 거짓의 가치를 부르짖어도, 우리는 결국 진실이 될 수 없는 모조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라크네는 여전히 침묵을 지킬 따름이었다.

“이 세상은 우리 필멸자가 감당할 수 없는 잔혹한 진실로 가득하고, 우리는 결국 도망칠 수 없는 진실로부터 도망치고자 하는 가짜에 불과하지.”

“…….”

아라크네가 침묵을 지켰다. 핏빛공은 아랑곳하지 않고 웃었다.

“돌아가시지요, 불과 피의 군주여.”

침묵 끝에 아라크네가 말했다.

“우리 청색 마탑이 그대들의 전쟁에 행사하는 영향력은 여기까지입니다. 제 이름을 걸고, 당신에게 약속하지요.”

“전쟁은 이걸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핏빛공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황금과 그림자의 군주가 존재하는 이상, 이 전쟁이 끝나도 다음 전쟁이 벌어지겠지. 그리고 거짓과 진실 중 하나가 사라질 때까지 전쟁은 끝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다음 전쟁이 벌어졌을 때도, 너는 여전히 침묵을 지킬까?”

“그럴 리가요. 황금과 그림자, 진실과 거짓의 전쟁은 이제 막 시작했을 따름이지요.”

아라크네가 웃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이 전투에서 물러나고, 나아가 ‘레이 유리스 님’의 목숨에 대해서는 확실히 보장해드릴 수 있지요. 그 이상 바라시는 것이 있나요?”

“…….”

다시금 짤막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네 제의를 받아들이겠다.”

정적 끝에, 핏빛공이 등을 돌렸다. 아들을 위해 적지에 홀로 발을 들였고, 그 아버지의 용기는 보답을 받았다. 적어도 지금의 유리스 후작에게 있어 그 이상의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 * *

청색의 마탑주가 펼친 지옥의 거미줄이 비로소 거짓말처럼 끝을 맺었다.

사방에서 존 랭커스터 측의 병사들을 집어삼키는 거미들이 사라졌고, 경악 속에서 그들이 비로소 의식을 되찾았다. 그곳은 더 이상 북극의 동토가 아니라, 그들이 익히 알고 있는 랭커스터 공작령의 야영지였다.

“지금이다.”

그리고 때를 기다린 데일의 부하 하나가 속삭였고, 마법의 폭죽이 하늘을 향해 쏘아 올려졌다.

“지금이다, 랭커스터의 자랑스러운 검들이여.”

동시에 순백의 갑주 위로 적백의 장미를 새겨넣은 여기사가, 투구를 내리고 몸소 휘하 기병대를 향해 소리를 높였다.

샬롯 랭커스터.

랭커스터 공작성에 집결해 있는 주력 병력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샬롯을 필두로 장미십자 기사들의 소수 정예가 모이는 것까지 파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물며 지금처럼 사방이 동요로 가득 차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샬롯 휘하 기병대의 숫자는 고작해야 오백 남짓이었다.

그러나 청색의 흑막을 비롯해 소서리스 의회가 그들 주력 부대를 어그러뜨리고, 무너질 대로 무너져 있는 동요 속에서 ‘오백의 기병대’가 갖는 의미는 절대로 가볍지 않았다.

특히나, 대륙 칠검의 일좌이자 ‘천검’의 이름을 가진 검객이 지휘하는 기병대 앞에서는.

“돌격!”

샬롯 랭커스터를 지지하는 장미십자 기사들이, 공포 속에서 혼비백산하고 있는 병력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쿠웅!

대오가 무너진 부대의 틈새로 파고들어 병사들을 압사시키고, 창이 그들의 육골을 꿰뚫고 있었다.

동시에 샬롯의 칼끝을 따라 매화잎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지금의 샬롯은 더 이상 일개 기사가 아니었다. 존재 하나로 전투의 전황을 뒤바꿀 수 있는 규격 외의 강자.

일찍이 신검 바델 오르하르트가 펼친 대륙 최강의 검술이, 그곳에서 흩날리기 시작했다.

칼날의 꽃잎이 흐드러졌다.

직전까지 청색 마탑주와 소서리스들이 흩뿌린 광기 속에서 비로소 그들이 정신을 되찾았을 때, 다음에는 그들의 부대를 헤집고 있는 천검과 장미십자 기병대였다.

“천검, 천검이다!”

“샤, 샬롯 랭커스터……!”

적백의 장미를 새겨넣은 서코트를 걸치고, 샬롯 랭커스터가 그녀의 검을 휘둘렀다.

랭커스터를 상징하는 것은 잔혹한 고결함.

그 이름처럼, 흩날리는 칼날의 꽃잎들이 무자비하게 그녀의 적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촤아악!

곳곳에서 피가 흩뿌려졌다. 제아무리 방패의 벽을 두텁게 세워도, 매화잎처럼 흩날리는 칼날마저 막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물며 상대는 직전까지 적의 환술 속에서 허우적대는 상황이다.

죽음의 꽃이 피어올랐고, 피를 머금고 꽃잎들이 흐드러졌다.

* * *

“거, 검은 공자……!”

당혹 속에서 겁에 질린 존 랭커스터가 그의 검을 뽑아 들었다. 레이가 흘끗 그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잠시 기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말이지?”

“이 쓰레기의 입을 다물게 해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요.”

그렇게 말하며, 레이가 그대로 팔을 뻗었다.

콰직!

“컥, 커헉……! 네, 네놈……!”

중갑으로 무장하고 있는 존 랭커스터를, 하나의 손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올리며 레이가 고개를 돌렸다.

“저는 처음부터 당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데일 역시, 묵묵히 그의 모습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쓰러뜨려야 할 적을 대신해서 처리해주는 것을,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대로 그의 목뼈가 우그러지며 팔다리가 축 늘어졌다. 실이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덧없이.

쿠웅!

존 랭커스터의 시체를 내팽개치며, 레이 유리스가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두 사람이 딛고 있는 발밑의 풍경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희고 어두운 겨울의 세계, 그리고 그에 맞서 레이 유리스 역시 ‘그의 세계’를 꺼내 들었다.

“…….”

잿빛의 세계였다. 멸망 이후의 세계를 보는 것처럼 덧없는 폐허와 재로 가득 차 있는 세계. 그러나 결코 데일의 이계가 아니다.

그것은 이 세계의 끝이었다.

불로써 멸망해버린 세계.

“이 세계는 결코 얼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제가 그렇게 놔두지 않을 테니까요.”

레이 유리스가 말했다.

“나는 세계의 끝 따위에 아무 흥미도 없다. 어째서 그렇게 세계의 끝 따위에 집착하는 거지?”

“이 세계의 피할 수 없는 진실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의무니까요.”

피할 수 없는 종말, 빅 프리즈.

그것은 실제로 억겁의 세월보다도 길고 아득하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미래의 일이다. 어째서 황금의 대제와 핏빛공, 거짓의 기수들이 그토록 그 사실에 집착하는지 데일로서는 알 수 없었다.

“말했듯이, 나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야.”

그림자 군주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우주의 겨울 그 자체를 상징하는 종말의 냉기와 태고의 어둠을 거느리고서.

촉수로 이루어져 있는 칠흑의 성채, 바로 그 흑금(黑金)의 옥좌 위에 앉아서.

─ 아, 재미있는 인간이 또 찾아왔어!

어느덧 데일의 곁에서 슈브가 생긋 웃었다. 기괴하기 짝이 없는 촉수가 데일의 몸을 애무하듯 휘감았고, 그 모습을 보며 레이가 얼굴을 찌푸렸다.

동시에 그의 발밑에서 흑적의 마력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레이의 세계에서 흩날리는 잿더미가 모여, 사람의 실루엣을 이루었다.

잿더미의 기사(Knight of Ashes)들이었다.

마치 흑마법사가 자신의 망자들을 부리는 것 같은 풍경이었고, 데일 역시 그에 응수하듯 팔을 뻗었다. 흑금의 옥좌 위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고.

사상으로 쌓아 올린 냉기와 어둠의 기사들이 그곳에 있었다.

두 명의 군주들이 그곳에 있었고, 그 군주들을 위해 충성하는 기사들이 격돌했다.

냉기와 어둠, 그리고 잿더미가.

잿더미의 기사들이 쇄도했고, 동시에 그들을 이루고 있는 재 속에서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타닥, 타닥!

처음에는 당장이라도 꺼질 듯 희미한 불씨였고, 그러나 이내 그것은 업화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글거리는 불꽃을 휘감고 잿더미의 기사들이 쇄도했다.

그에 맞서는 것은 어둠과 냉기로 무장하고 있는 데일의 기사들이었다.

세상의 끝을 상징하는 종말의 냉기를 머금고, 피할 수 없는 진실로 무장하고 있는 기사들이 쇄도했다.

카앙!

그들의 검이 맞부딪칠 때마다 종말의 냉기가 칼날을 타고 재의 기사들에게 휘감겼고, 불과 잿더미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고작 일검(一劍) 앞에서.

“너는 나를 이길 수 없다. 힘의 차이가 너무 명백하니까.”

그림자 군주가 말했다.

“…….”

레이 유리스가 나직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자신의 존재는 결코 그림자 군주의 발끝에도 닿지 못할 거란 진실. 또다시 진실이다.

어째서 이토록 진실이란 것은 잔혹하고 비정할까. 알 수 없었다.

‘잔혹한 진실을 바꾸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입니다, 레이.’

무심코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도망칠 수 없는 잔혹한 진실 앞에서 저항을 결의한 거짓의 사도들.

그렇기에 레이가 입술을 악물었다.

“이제 시작입니다.”

일찍이 마왕 발로르의 것이었으며, 이제는 레이의 심장과 융합한 마도서…… 『차가운 재의 서』를 일깨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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