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 * *
결정을 내리고 나서 병력이 움직이는 것은 찰나의 일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존 랭커스터 자작령에서 그의 부대가 출정을 시작했습니다.”
“적색 마탑의 동향은?”
“공식적으로 ‘레이 랭커스터’를 보필하기 위해 움직이는 고위 정화자(High Purifier) 부대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나, 그 외에 정체를 숨기고 암약하는 이들의 숫자까지는 정확히 알기 어려울 듯합니다.”
척후 임무를 맡고 있는 《그레이브 워커》가 보고를 올렸고, 바로 그때 미스트리스 티타니아가 대답했다.
“오백에서 일천 명, 존 랭커스터가 지휘하는 장미십자 기병대의 종자로 위장하고 있는 경기병들입니다.”
“……청색의 속삭임이 알려준 것입니까?”
“적색 마탑의 마법사들이 아무리 정체를 숨기려 해도, 황실에서 이곳까지 그 정도의 숫자가 움직이는 동향마저 속일 수는 없지요.”
그 말을 듣고 데일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위 정화자, 그리고 대규모 퓨리파이어 부대가 참전하는 전투입니다. 종래의 전투 교리로 그들과 맞서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겠지요.”
“역시 데일 공자님이세요.”
그 말을 듣고 그림자 군주의 책사(策士)를 자처하는 미스트리스 티타니아가 웃었다.
“그러나 이 싸움에 참여하는 마탑이 결코 적색 하나가 아님을, 유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
“여기서는 그림자 군주의 충성스러운 부하로서, 제가 감히 작전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티타니아의 말에 데일이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침묵 끝에, 데일이 입을 열었다.
“말씀하십시오.”
* * *
전쟁은 하루아침에 시작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그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는 것은 하루아침의 속전(速戰)이다.
존 랭커스터 자작과 휘하 랭커스터 가의 방계, 나아가 레이 랭커스터를 보필하는 적색 마탑의 병력들이 집결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끝을 헤아릴 수 없는 군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적색 마탑의 폭정 속에서, 청색 마탑의 침묵을 두고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는 가지각색이었다.
그저 적색 마탑이 두려워 침묵하는 겁쟁이라거나, 내지는 그들이 침묵 속에서 모종의 계략을 꾸미고 있다거나, 애초에 청색 마탑은 세속의 싸움에 흥미가 없다는 등.
그러나 처음부터 청색 마탑은 결코 침묵한 적이 없었다.
──밤이 깊었고, 존 랭커스터의 부대가 랭커스터 대공령 가까운 곳에 진을 치고 야영을 시작했다.
“작센 측의 애송이는 달리 움직임을 보이지 않나?”
그 시각, 존과 레이를 비롯한 고위 장교들이 모여 있는 막사.
“요크 측의 병력이 랭커스터 공작성을 향해 움직이고, 영지 일대에 징집령을 내렸다는 보고입니다. 그러나 병력을 성에 결집하고 나서 달리 움직임이 없는 것을 보아하니, 아마도 성내에서 장기 수성 전략을 펼치지 않을까 하고…….”
“흥, 적색 마탑을 상대로 수성 전략을 취하겠다니. 천하의 ‘검은 공자’도 결국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에 불과했나.”
그 말을 듣고 존 랭커스터가 코웃음을 쳤다. 그의 말마따나 작센의 데일은 제국의 대륙 통일 전쟁 당시 태어나지도 않은 핏덩이였고, 그 전쟁에서 제국의 적색 마탑이 보여준 활약을 결코 알지 못하리라.
“아무리 제국 제일의 천재가 어쩌니 해도, 결국 세월의 지혜를 극복하지 못하는 풋내기다.”
통일 전쟁 당시 역전(歷戰)의 전사로서, 존 랭커스터가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레이 랭커스터는 말없이 침묵을 지킬 따름이었다.
“검은 공자를 너무 우습게 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침묵 끝에, 레이 랭커스터가 말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레이 랭커스터. 저는 결코 바보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며 존이 무어라 말을 이으려 할 때였다.
“……!”
일순, 그의 의식을 짓누르는 것 같은 터무니없는 압박감이 휘몰아쳤다.
“조심하십시오, 레이 님!”
레이의 곁을 보좌하는 고위 정화자들이, 일제히 그의 서클을 가속하며 핏빛 마력을 생성했다. 동시에 그들이 막사 바깥으로 뛰쳐나갔을 때, 그곳에 벌어진 풍경을 보고 그들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곳에 펼쳐져 있는 풍경은 랭커스터 대공령이 아니었다.
수정의 대지가, 지평 너머까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얼어붙을 듯 시린 냉기가 휘몰아치는 대지였고, 바로 그곳에서 야영을 준비하고 있는 병사들이 당황하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당황하지 마라! 당장 막사에서 나와 소속 부대로 움직여라! 방진을 구축해라!”
장교들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적들이 보이지 않았다.
기습이라고 하기에, 작센의 병력 대다수는 이미 랭커스터 공작성에 주둔하고 있다. 아무리 그가 기이한 힘을 가지고 있어도 고작 보고를 듣고 몇 초 사이에 부대를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침착해라! 적의 주력은 어디까지나 공작성에 주둔 중이다! 설령 기습이라고 해도 적의 병력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러 마스터의 장미십자 기사들과 적색 마탑의 퓨리파이어 부대가 합류하고 있는 부대다. 고작 적 정예 병사 두셋의 손에 의해 추풍낙엽처럼 무너질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저, 저쪽입니다!”
바로 그때, 지평 너머에서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음에도 그 존재를 알아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죽음을 상징하는 밤까마귀 표식을 새겨넣은 의복. 갑주조차 아니었다.
“거, 검은 공자……!”
“침착하십시오.”
그 모습을 보고 레이가 나직이 대답했다. 그의 곁을 보좌하는 고위 정화자들이 일제히 핏빛 마력을 응축하며 발포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황 속에서 적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우왕좌왕하는 병사들은 어느새 방진을 구축하고, 기사들조차 갑주로 무장하고 방진 일부에 합류하고 있었다.
“이 전쟁에 홀로 나서다니,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작센의 데일, 검은 공자의 힘에 대해 모를 그들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데일이 강력한 힘을 갖고 있어도 이 정도의 군세를 홀로 압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장 레이와 고위 정화자들이 이곳에 있지 않나.
바로 그때였다.
레이의 곁을 지키고 있는 고위 정화자 하나의 핏빛 마력이, 그대로 사그라들었다.
“……?”
사그라들고 나서, 다시금 그의 서클이 가속하기 시작했다.
발밑을 따라 시린 청색의 마력을 생성하며.
“!”
그 모습을 보고 레이는 망설이지 않았다. 제국을 지배하는 사람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 어린 뱀파이어가 땅을 박차며 쇄도했고, 그의 손이 고위 정화자의 심장을 향해 그대로 내리꽂혔다.
푸욱!
“컥, 커헉……!”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 무엇보다 믿음직스러워야 할 고위 정화자가, 하나둘씩 무엇에 홀린 듯 초점 없는 눈동자를 하기 시작했다.
청색의 나비들이 날아올랐다.
“이, 이것이 대체……!”
동시에, 검은 공자의 곁에서 또 하나의 그림자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청색의 로브를 두르고 있는 마법사들이었다.
소서리스 의회, 모략과 거짓의 청색 마탑을 지배하는 자들.
실제로 그들이 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여기까지 발을 딛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그들의 육체는 저마다의 장소에서 그들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필요에 따라, 대상의 정신을 결속하고 하나의 자리에 규합시키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색 마탑의 정점으로서, 핏빛공 유리스 후작은 『피의 책』을 통해 이 세계의 역사를 덧씌울 수 있다.
데일의 아버지 흑색공에게는 죽음 그 자체를 조작할 힘이 있다.
그렇담 그중에서 모략과 거짓의 대가, 청색 마탑주에게는?
궁극적으로 그녀의 능력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의식 강탈(Mind Snatch).
필요에 따라 소서리스 의회 멤버들의 의식을 결속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필요에 따라 그 이상의 것들을 펼칠 수 있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사람의 의식을 거미줄에 걸린 하루살이처럼 다루며 농락할 힘이.
“거, 거미다!”
동시에 병사들 사이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거미가 내 몸을 뒤덮고 있어! 아아아악!”
수백, 수천 마리의 새끼 거미들이 어느새 그들의 육체를 뒤덮고, 목구멍과 귓구멍, 심지어 눈동자 사이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곳곳에서 발광하며 몸을 뒤틀었고, 그때마다 수백 마리의 새끼 거미들이 후두둑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레이 유리스는 알 수 있었다.
거미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소서리스들이 펼치는 잔혹하기 그지없는 환술(幻術)이었다.
청색 마탑을 구성하고 있는 100% 전력이, 그들이 충성하는 그림자 군주의 적을 배제하기 위해 결집해 있었다.
대륙의 정점에 서는 다섯 마법사들, 오색 마탑주.
그 마탑주가 직접 전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그 의미를 모를 레이가 아니었다. 당장 그의 아버지, 핏빛공이 보여준 힘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청색의 흑막…….”
경악 속에서, 심장이 얼어붙었다.
동시에 ‘검은 공자’가 그들 사이로 걸음을 내디디기 시작했다.
그림자 군주를 따르는 청색의 기수들이 활약하는 그곳에서, 부하들의 활약을 뒤로하고 홀로 덤덤히.
“아, 아아……!”
겁에 질려 경악을 감추지 못하는 존 랭커스터가 있었다.
“레이 유리스.”
그곳에서, 데일이 입을 열었다. 의식을 강탈당하고 사방에 널브러진 고위 정화자들. 그를 지켜줄 부하는 없다.
“유감스럽게도 저는 당신에게 질 생각이 없습니다.”
“…….”
“그러나, 적어도 당신과 저의 승부는 청색의 힘 없이 정정당당하게 치러질 가치가 있겠지요.”
데일의 말에, 레이가 조용히 웃었다.
* * *
그 시각, 청색 마탑의 최상층.
사방이 어두운 거미줄로 뒤덮여 있는 음습하기 짝이 없는 일실이었다.
“아, 가엾은 하루살이들.”
그곳에서 청색의 흑막, 아라크네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촉각(觸覺)이, 무엇을 깨닫고 그대로 정지했다.
탑을 가로질러 그녀의 일실을 향해 찾아오는 불청객의 존재를 깨닫고서.
─ 저항하지 말고, 그를 나의 방으로 들여보내렴.
청색의 흑막이 입을 열었고, 머지않아 아랫층에서 벌어지는 다툼이 사그라들었다. 머지않아 불청객이 그대로 그녀의 거미집을 향해 모습을 드러냈다.
“아라크네, 나의 옛사랑.”
불청객이 입을 열었다.
“……유리스.”
대륙 각지에 뻗어 있는 그녀의 거미줄과 촉각을 속일 수 있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다.
가령 대륙 제일의 적마법사, 핏빛공이라거나.
“어째서 협정을 깨트렸지?”
청색의 흑막을 앞에 두고, 핏빛공이 물었다. 그 말을 듣고 아라크네가 즐겁다는 듯 웃었다.
“처음부터 협정을 깨트린 것은 적색과 황금이 아니었나요?”
“당장 소서리스 의회를 물리고, 이 전투에서 물러나.”
핏빛공이 말했다. 일말의 격식도 없이 스스럼없는 목소리였다.
“내 아들을 해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으니까.”
“아, 걱정하지 마시길. 아무리 저라도 그 정도로 사리가 없지는 않으니까요.”
아라크네가 말했다.
“그러나 우리 청색은 이미 침묵을 깨트렸고, 돌이킬 수 있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없답니다.”
“…….”
그 말을 듣고 나서, 핏빛공의 발밑을 중심으로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어머나, 이곳이 저의 거미집이란 사실을 잊으셨는지. 천하의 핏빛공이라 해도, 이곳에서 싸울 경우 그대의 목숨을 장담하기 어렵지 않겠어요?”
아라크네가 즐거운 듯 웃었다.
“적어도 너의 의식을 이곳에 집중시키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지.”
핏빛공이 대답했다.
아들을 지키기 위한 아버지로서, 그것은 능히 감수할 가치가 있는 리스크였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