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 * *
“이 빌어먹을 작센의 애송이가……!”
쿠웅!
일찍이 형님 랭커스터 대공의 아우이자, 그의 대공령 일부를 대리하고 있는 남동생 존 랭커스터 자작의 영주성.
바로 그 성의 일실에서, 존 랭커스터가 탁자를 내려치며 노호했다. 그의 노호에 존을 따르고 있는 휘하 귀족들의 표정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천심이, 하루아침에 갈대처럼 샬롯 랭커스터를 향해 떠나가고 있었다.
대공령 곳곳을 떠돌고 있는 ‘이야기꾼’들이, 철저하게 샬롯 랭커스터를 옹호하고 존과 유리스 일가를 비하하는 낭설을 퍼뜨리고 있다. 그리고 그 파급 효과는 존이 상상하는 이상의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직접 영향력을 행사해야 할 대공령 내의 귀족들이 하나둘씩 존을 떠나고 있었다. 뒤늦게 존 역시 뒷공작을 위해 암살자들을 보냈으나, 돌아온 것은 그들의 잘린 목이었다.
“아, 아버님…….”
“닥쳐라, 어디서 계집 따위가 입을 놀리려 하느냐!”
바로 그때, 함께 동석하고 있는 장녀 린네가 무어라 입을 열려 했다. 그러나 존 랭커스터는 그녀가 뭐라 입을 열려 할 틈도 없이 소리를 내질렀다.
“죄, 죄송해요.”
린네 랭커스터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바로 그때였다.
“말씀하시지요, 린네 양.”
“레이 님……!”
침묵을 지키고 있는 레이 랭커스터가 입을 열었다. 당황하며 린네가 숨을 삼켰고, 레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린네 양께서 참여하고 계시는 이상, 마땅히 입을 열 자격이 있습니다.”
“저, 저는 그저 아버님께서 너무 화를 내지 마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러나 린네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다시금 존이 소리를 높였다.
“이게 다 네가 계집의 몸으로 태어나서 벌어진 일임을 잊어버린 것이냐!”
“죄, 죄송해요!”
린네가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 레이 랭커스터가 말을 잇는다.
“아버님의 딸입니다. 부디 말을 조금 더 신중하게 택해주시지요.”
“레이, 그대가 비록 랭커스터의 이름을 잇고 있다고 하나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 모습을 보고 존 랭커스터가 싸늘하게 내뱉었다.
“적색 마탑의 호의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대들의 꼭두각시가 될 생각이 없음을 말해드리지요.”
그 말에는 노골적이기 그지없는 적의와 경계가 어려 있었다.
“…….”
그 말을 듣고 ‘레이 유리스’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린네가 가녀린 어깨를 들썩이며 애써 흐느낌을 참고 있었다.
“그럼 랭커스터의 피를 잇지 못하는 부외자는, 이쯤에서 실례하도록 하지요.”
동시에 레이가 그대로 등을 돌렸다.
린네 랭커스터의 손을 잡아끌며.
* * *
존이 있는 영주성의 일실.
린네 랭커스터는 참으로 바보 같은 여자였다. 아주 사소한 일로 울음을 터뜨리고 어쩔 줄을 모르는 어리석은 여자.
“흑, 레이 님……!”
레이는 자신의 품에 고개를 파묻고 흐느끼는 린네를, 감정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무엇이 그렇게 슬프십니까?”
“저는 그저 너무 겁이 나서……!”
린네가 흐느끼며 말했다.
“자, 작센의 ‘검은 공자’는 세상에서 가장 잔혹하고 끔찍한 자라고 들었어요! 그 악명 높은 자를 상대로 아버님께서, 그리고 레이 님께서 이렇게 싸우시는 것이 그저 너무 두려워서……”
그 이름에 레이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또다시 그 이름이다.
“드, 듣기로 결혼식을 빌미로 백부와 리처드 공자님을 암살한 것이 모두 ‘검은 공자’의 짓이라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아울러 미하일 공자님을 쓰러뜨린 것 역시 그의 짓이었지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천진하기 그지없는 소녀. 적색 마탑이 주장하는 대로 랭커스터 대공 가의 비극 모두가 작센의 짓이라 의심치 않는 이 여자는, 바로 그 작센의 ‘검은 공자’가 가져올 공포를 떠올리며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러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레이가 미소 지으며 조용히 린네의 새하얀 목덜미를 휘감았다.
“결코 작센의 ‘검은 공자’가 저의 아내를 해치게 놔두지 않을 테니까요.”
“아아, 레이 님……!”
레이의 속삭임에 린네가 울음 속에서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저, 레이 님과 맺어진 것이 너무나도 기뻐서 믿을 수가 없어요.”
“저 역시 그렇답니다.”
린네가 수줍게 뺨을 붉히며 웃었다. 레이는 말없이 그녀를 포옹하며, 목덜미 너머로 감정 없는 표정을 지을 따름이었다.
린네 랭커스터는 참으로 바보 같고 어리석은 여자였으므로.
* * *
“이야기꾼 길드가 성공적으로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듯하네요.”
미스트리스 티타니아의 보고에, 랭커스터 공작성의 일실에 있는 검은 공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청색이 흩뿌리고 있는 거미줄의 실체.
“일찍이 청색 마탑이 말해준 ‘말할 수 없는 활약’이 바로 이것이었나요.”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저희는 그림자 군주께서 자신의 자격을 자각하기도 전부터 그대를 위해 헌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티타니아가 웃었다. 그 말 대로다.
어린 데일이 북부의 벽지에서 활약을 펼칠 때마다, 그의 활약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대륙 전체로 퍼져나갔다. 제국 제일의 천재, 나아가 데일이 필립을 쓰러뜨린 흑백 전투의 활약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차도 비행기도 없는 이 세계에, 어떻게 그렇게 데일의 무용담이 정교하고 빠르게 퍼져나갈 수 있을까?
그러한 활약을 퍼뜨리는 것은 호사가들의 일이었고, 동시에 그 활약이 제국 전체로 구석구석 퍼져나가는 것은 그 호사가들이 아주 철저하고 정교한 ‘조직’을 이루고 있기에 가능했다.
이야기꾼 길드(Guild of Storyteller).
바로 그 길드가 곧 청색의 거미줄 그 자체였다는 사실은,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시 말해 데일이 제국 제일의 천재이자 ‘검은 공자’로서 그 명성과 악명을 떨치는 과정 속에는, 처음부터 그들 청색 마탑의 암약이 있었다는 뜻이다.
“점점 더 그대들이 수상쩍습니다.”
데일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제가 그림자 군주의 자격을 얻기도 전에, 어떻게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까?”
“글쎄요, 저는 그저 청색의 일개 꼭두각시에 불과하답니다.”
미스트리스 티타니아가 의미심장하게 말을 흐렸다.
“그저 우리의 탑주, 청색의 흑막께서 펼친 거미줄의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지요. 저 같은 일개 꼭두각시가 어찌 감히 탑주님의 생각을 헤아리겠습니까.”
“…….”
데일이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침묵은 거기까지였다.
“마스터 바로.”
“어허허,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소.”
침묵 끝에 데일이 고개를 돌렸고, 살검 마스터 바로가 태평하게 시치미를 뗐다.
“누가 그걸 물어봤냐. 빨리 와서 상황 보고나 하랬지.”
“어이쿠, 이것 참 실례했소. 거듭 말하는데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설정이라오.”
그대로 마스터 바로가 몸을 일으키며 데일이 보고 있는 테이블 위의 지도를 향했다. 그것은 랭커스터 대공령과 그 주위에 붙어 있는 휘하 가신 귀족들의 영지를 그리고 있는 지도였다.
바로 그 지도의 곳곳에, 핏빛의 잉크로 점들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아직 점이 찍혀 있지 않은 몇몇 지점들을 향해, 마스터 바로가 깃펜을 쥐고서 핏빛 점들을 찍었다.
그림자 군주의 《그레이브 워커》들이, 존 랭커스터 쪽 귀족들의 침실에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었음을 뜻하는 표식이었다.
존 랭커스터의 자작령과 그 주위를 제외하고, 대다수 거점은 핏빛 점이 찍혀 있다.
“천심은 갈대와 같고, 갈대가 우리를 향하는 이상 저들로서는 행동에 나올 수밖에 없지요.”
미스트리스 티타니아가 지도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곧 전투가 시작될 것입니다, 그림자 군주시여.”
“지금 상황에서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곧 자기 손으로 천심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로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어머나, 참으로 총명하기도 하셔라.”
티타니아가 즐겁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그러나 데일은 웃지 않았다.
* * *
“샬롯 랭커스터.”
데일이 냉정하게 전황을 헤아리고 있는 사이, 샬롯 랭커스터 역시 그녀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전쟁 속에서, 적들의 천심을 끌어들이는 것은 데일의 역할이다.
그러나 갈대처럼 기울어진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공고히 굳히는 것은 결국 랭커스터의 가주, 샬롯의 몫이었다.
랭커스터 공작성의 장미십자 기사와 가신들 속에서, 샬롯 랭커스터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더 이상 밤까마귀 기사의 갑주가 아니라, 적백의 장미가 새겨진 랭커스터 가의 의복을 입고 있었다.
“잠시 드릴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데일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물었고, 샬롯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실례하겠어요.”
그녀를 향해 충성하는 이들을 뒤로하고, 샬롯이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이 향하는 곳은 랭커스터 공작성의 사람 없는 일실이었다.
“후우, 힘들어.”
그제야 비로소 샬롯의 뻣뻣하게 굳어 있는 표정이 누그러졌다. 데일이 알고 있는 여느 때의 샬롯이 그곳에 있었다.
“가주 노릇도 참 쉽지 않은 모양이네.”
“응, 네 아버님이 얼마나 고생하고 계실지 상상도 가지 않을 지경이야.”
샬롯이 웃었고, 데일 역시 말없이 웃었다.
“머지않아 존 랭커스터 자작이 병력을 소집할 거야.”
“드디어 때가 왔네.”
샬롯이 그다지 놀랄 것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의 뒤에는 적색 마탑이 있어. 공식적으로 이목을 끌 수는 없어도, 랭커스터 대공령을 집어삼키기 위해서는 절대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강자들이 움직이겠지.”
어쨌거나 황실이 노골적으로 랭커스터 가를 삼키기 위해 움직이는 것은, 제국 내 귀족들의 경계를 살 의혹이 있다. 그러나 그 대리자를 내세움으로써 행해지는 이상, 그것은 철저하게 별개의 일이다.
존 랭커스터 자작 자체는 결코 위협이 아니다. 나아가 그를 향해 충성하는 기수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고 따위도 어느 의미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리라.
그럼에도 그가 이토록 무모하게 강수를 둘 수 있는 것은, 그의 뒤에 적색 마탑이 있기에 가능했으니까.
그리고 적색 마탑 역시 랭커스터 가를 집어삼키기 위해, 결코 구색을 맞추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데일에게 있어서는 처음으로 적색 마탑의 전력(全力)과 맞서는 전투라 해도 과장이 아니리라.
통일 전쟁 당시, 기사들은 전쟁의 꽃이라 불리는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전쟁에 적색의 로브를 흩날리는 그들 적색 마탑의 적마법사가 나타날 때, 병사들은 그들을 두고 경외하며 이렇게 불렀다.
전쟁의 신.
이 전투는 바로 그 전쟁의 신을 상대로 펼치는 싸움이다.
“말했잖아, 데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샬롯은 당황하지 않았다.
“나는 작센의 샬롯이니까.”
“…….”
“내가 어디까지나 너를 위해 휘둘러지는 검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줘.”
“그래.”
샬롯이 말했고, 데일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심의 갈대를 놓고 다투는 보이지 않는 전쟁은 여기까지다.
이제부터는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보이는 전쟁이 시작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