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 * *
공석이 되어 있는 랭커스터 대공의 옥좌를 뒤로하고, 바로 그 자리를 손에 넣기 위해 랭커스터의 온갖 방계(傍系)들이 모여 있었다.
“감히 랭커스터의 피 일적조차 섞이지 않은 계집이, 무슨 자격으로 형님의 옥좌를 탐내려는 것이냐.”
대공의 남동생, 존 랭커스터가 싸늘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조소했다. 나아가 그를 필두로 결집하는 랭커스터의 방계들이, 마찬가지로 조롱과 야유를 쏟아냈다.
전쟁이 시작되기에 앞서 벌어지는 의미 없는 공회전이다.
“대공 각하께서는 공식적으로 저를 랭커스터 가의 가장 정당한 후계자로 지목하셨습니다.”
그의 앞에서, 천검의 검위를 손에 넣은 소녀가 입을 열었다.
“검의 시험에서 그 말씀이 제국 황실의 이름으로 공표되었다는 것을, 그대들 역시 모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덤덤하게, 그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바로 그 랭커스터 대공께서 서거하셨다. 바로 그 작센의 결혼식에서 말이다.”
“그렇소, 애초에 저 계집은 처음부터 작센에 몸을 의탁한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필시 수상쩍은 흑심을 품고 랭커스터 대공 각하에게 꼬리를 친 것이 틀림없겠지요!”
“하나부터 열까지, 대공 각하께서는 작센의 손아귀에서 놀아나신 겁니다!”
“장남 리처드 공자님의 암살도 참으로 수상쩍기 그지없지요! 작센의 영지에서 맞이한 그 죽음은 어떻게 봐도 작센의 교활하기 짝이 없는 수작입니다!”
곳곳에서 아우성이 터져 나왔고, 그 와중에도 데일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마찬가지로 랭커스터 방계의 가주들 사이에서, 공식적으로 ‘랭커스터’의 이름을 칭하고 있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일찍이 레이 유리스의 이름을 가진 핏빛공의 양아들, 적색 마탑의 후계자.
그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이들이 믿고 있는 배경에는 결국 적색 마탑이 있다는 것.
나아가 실질적으로 랭커스터 가를 적색 마탑이 집어삼킬 절호의 기회를 앞두고, 그들은 이전의 장미 전쟁처럼 소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에 비해 데일이 ‘작센의 군세’를 직접 움직이는 것은 정치적으로 쉽게 취할 수 없는 행동이다. 그들의 주장대로 처음부터 랭커스터 가를 집어삼키기 위한 속셈으로 비칠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피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을 마친 데일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말을 듣고, 깊이 고심을 해보았습니다.”
작센의 ‘검은 공자’가 입을 열었고, 일순 성의 대회당에 있는 이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저는 제 아내, 샬롯 랭커스터의 주장에 더더욱 정당성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하겠네요.”
“웃기지 마라! 이것은 처음부터 네놈들 작센이 랭커스터 가를 집어삼키기 위해서──”
바로 그때였다.
후우웅!
데일이 딛고 있는 발밑을 중심으로, 그림자 망토가 퍼져나가며 일대를 어둠으로 뒤덮었다. 그 행위에 랭커스터의 가주들이 경악 속에서 숨을 삼켰다. 레이 랭커스터는 여전히 침묵을 지킬 따름이었다.
“이대로 이곳에 있는 그대들 모두를 죽여버리고, 힘으로 이 자리를 손에 넣지 못할 것도 없지요.”
“……!”
「키에에에엑!」
어둠의 호수에서, 성체 그 이상의 존재로 거듭나 있는 《섀도우 러커》들의 괴성이 울려 퍼졌다. 지금의 데일이 성장하는 것에 따라 그 피조물들 역시 성장하고, 이 시점에 이르러서는 말 그대로 괴수(怪獸)의 이름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그러나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그저 장내에 얼어붙을 것 같은 정적이 내려앉고 나서, 할 말을 계속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제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랭커스터 대공께서 딸에게 준 정당성을 더럽히고 싶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림자 군주가 말했다.
“대공께서는 제국의 역적이 될 위협을 감수하고 샬롯 오르하르트에게 ‘신검 바델’의 매화검을 직접 전수하셨고, 나아가 검의 시험에서 샬롯 양을 수양딸로 받아들여 랭커스터 가의 후계자로 지목하셨습니다. 그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제국 황실의 이름으로 공표가 되었지요.”
덤덤하게, 정치적으로 자신이 가진 카드를 헤아리며.
“그리고 무엇보다, 작센에서 랭커스터 각하를 쓰러뜨린 것은 저희 작센이 아닙니다. 이곳에 있는 그대들 역시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데일이 싸늘하게 되물었다. 그들 속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적색의 집행자를 바라보며.
“그곳에 계시는 ‘레이 랭커스터’의 아버지, 핏빛공이란 사실을.”
“…….”
“오히려 랭커스터 대공께서는, 장남 리처드 공자님을 암살한 배후로 핏빛공을 지목했습니다. 그 사실을 모를 그대들이 아닐 테지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실 생각입니까?”
데일이 차갑게 조소했고, 비로소 적색의 후계자가 침묵을 깨트렸다.
“무엇을 바라십니까? 작센의 ‘검은 공자’님.”
“샬롯 랭커스터는 랭커스터 가의 가주를 계승할 정당성이 있습니다. 그게 다지요.”
“그러한 정당성은 제 아내, 린네 랭커스터 역시 결코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전쟁이라도 하실 생각입니까? 레이 랭커스터.”
“그러시는 검은 공자께서는 작센의 군세로 랭커스터를 찬탈할 생각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지요. 병졸 하나 없이 어떻게 전쟁을 수행하실 생각입니까?”
레이가 되물었고, 데일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제 병사들을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말뜻에 담겨진 의미를 헤아리고, 랭커스터 방계의 가주들이 숨을 삼켰다.
“저는 작센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제 아내 샬롯 랭커스터의 명예와 정당성을 위해 싸울 것입니다.”
“설령 작센의 공자님이 이 성을 힘으로 집어삼키고 손에 넣어도, 랭커스터 대공령은 무척 넓습니다.”
레이 랭커스터가 대답했다.
“결코 성이나 요새 몇 개를 함락하는 것으로 승리할 수 있는 싸움이 아니지요.”
그 말대로다. 아무리 힘이 강해도 이것은 랭커스터 대공령 전체의 정당성, 다시 말해 천심(天心)을 손에 넣어야 비로소 승리하는 게임이다. 그 점에 있어 아무리 확실한 정당성이 있어도 ‘랭커스터 대공 가’를 이루고 있는 방계와 하위 귀족, 가신들을 적으로 돌리고 있는 이상 결코 승리는 쉽지 않으리라.
“그 점에 대해서는 깊이 유의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일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레이 공자님의 말대로 힘을 통해 이 성을 집어삼키도록 할까요.”
그리고 망설일 것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가, 감히 무슨 짓을……!”
곳곳에서 당혹에 차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달라질 것은 없었다. 일대를 수몰시키고 있는 어둠의 호수에서 《섀도우 러커》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터무니없을 정도의 거대 괴수로 거듭나, 낫 모양의 팔다리를 과시하듯 들어 올리며.
검을 쥐고 있는 이들이 검을 뽑아들었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그저 경악 속에서 벌벌 떨 따름이다.
바로 그때였다.
화르륵!
불꽃이 피어올랐다. 레이 랭커스터와 그를 중심으로 결집하고 있는 방계의 가주들을 지키기 위해서, 불꽃의 결계가 그들을 휘감았다.
불의 방주였다.
마치 세상 전체가 어둠으로 뒤덮이고, 최후의 불꽃이 타오르는 것 같은 풍경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불꽃을 향해, 어둠 속에서 핏빛 꽃잎들이 쇄도했다.
칼날의 꽃잎이 휘몰아치며 불꽃을 갈가리 찢어발겼다. 불의 방주가 덧없이 뜯겨나갔고, 최후의 생존자들이 겁에 질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레이 공자님의 말이 옳습니다. 여기서 이들 모두를 죽여봐야, 천심을 얻을 수 있을 리 없겠지요.”
그림자 군주가 말했다.
“그렇기에 기꺼이 자비를 베풀겠습니다.”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목소리로.
“지금부터 저는, 제 아내 샬롯 랭커스터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전(全) 랭커스터’ 모두가 기꺼이 그들의 마음을 바꿀 때까지 싸움을 계속할 겁니다.”
“……!”
“그들의 영지와 백성, 성과 병사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항복을 소리칠 때까지 멈추지 않겠지요. 설령 이 땅이 얼마나 넓고, 얼마나 많은 가주가 적대하고 있을지라도 개의치 않을 겁니다.”
일찍이 제국과 적색 마탑이 그토록 숭상해 마지않는 힘의 질서를 통해서.
“그렇기에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아무 상처 없이, 기꺼이 제 아내의 기수(旗手)가 되어 승리 후의 영광과 명예를 손에 넣을 기회지요.”
그것은 말 그대로 최후통첩이었다. 거스르는 자는 대가를 치를 것이고, 순응하는 자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게 오는 자들을 레이 공자님께서 해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데일이 차갑게 웃었다.
“천심(天心)을 얻는 싸움에서, 그렇게 잔혹하기 그지없는 행위를 하실 레이 공자님이 아니니까요.”
“……좋습니다.”
레이 랭커스터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공자, 작센의 데일이 가진 악명과 잔혹함을 모를 이들이 아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랭커스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그들조차, 이 공포 속에서는 생각을 해야 했다.
줄을 서는 것은 귀족의 첫걸음이니까.
레이 랭커스터와 그의 뒤에 있는 적색 마탑, 지금 그들이 쥐고 있는 이 동아줄이 정녕 옳은 줄일까?
결국 대공의 자리에 앉는 것은 그들이 아니다. 샬롯 랭커스터와 린네 랭커스터…… 다시 말해 작센과 유리스 가의 힘싸움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들이 바라는 것은 그저 승리자를 점찍고 그들을 위해 싸우며, 그 후 떨어질 콩고물을 얻어 먹는 것이다.
달리 그럴싸한 사명 같은 것이 아니라.
그렇기에 데일의 겁박이 그들의 마음을 뒤집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장고 속에서 대회당에 모여 있는 방계와 가신의 가주들이, 저마다 결정을 내리고 각자의 동아줄을 쥐기 시작했다.
“데일 공자님.”
바로 그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는 하이에나들 사이에서 레이가 입을 열었다.
“저는 늘 ‘검은 공자’의 벽 앞에 가로막히고 패배했습니다.”
“…….”
“아마 이 싸움에서도 제가 당신을 이길 수 있을지, 솔직히 말해서 확신 같은 것은 없지요.”
레이가 그렇게 말했고, 그 말을 듣고 또다시 몇 명의 가주들이 재빨리 ‘새 동아줄’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이 가져올 겨울을 막고, 이 세상에 봄의 불씨를 피워올리기로 맹세했습니다.”
─ 거짓의 아이야, 너에게 내가 진실을 알려줄까? 너는 그 아이, 그림자 군주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해.
그날, 우주의 겨울에서 레이 유리스가 마주한 진실. 자신의 존재는 결코 그림자 군주의 발끝에도 닿지 못할 거란 운명. 알고 있음에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저는 이 세상이, 결코 얼음으로 끝나게 놔두지 않을 테니까요.”
“유감스럽게도, 저는 세상의 끝에 대해 별 흥미가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림자 군주가 웃었다. 처음부터 레이 랭커스터의 존재 같은 것은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이.
“그러나 저 역시, 레이 공자님에게 순순히 져드릴 생각은 없지요.”
그림자 군주에게 있어, 세상의 종말 따위는 정말이지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