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 * *
수정색의 하늘을 걷는 자, 그리고 피의 강물 위를 걷는 자가 있었다.
자신의 육체와 살갗을 페이지 삼아 빼곡하게 피의 글씨를 새겨넣고 있는 남자였다.
“……정말로 그렇게까지 해야 하겠습니까?”
바로 그때, 침묵을 지키고 있는 흑색공이 입을 열었다. 푸드덕! 그의 등 뒤로 몇 마리의 밤까마귀가 날아올랐다. 여차할 때 실력을 행사하는 것도 각오하겠다는 듯이.
“흑색공이 참여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흑색공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또 하나의 구경꾼이자 백색 마탑의 정점, 천상공이었다.
“두 사람이 동의하고 있는 결투이며, 그렇기에 이 결투는 제국의 법에 의해 보호받고 있습니다.”
“…….”
“아, 싸움에 합류하시는 것을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핏빛공이 아랑곳하지 않고 웃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서로의 군주를 위해 전쟁을 벌이는 것도, 나쁠 것 없지요.”
그림자의 진영과 황금의 진영.
“그럴 필요는 없소, 흑색공.”
일촉즉발의 대치 앞에서, 그러나 흑색공을 가로막는 것은 신검 랭커스터 대공이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치러야 할 업보니까.”
그의 손에 들린 창천의 검이 창백하고 투명하게 서슬을 흩뿌렸다.
“하늘에 닿고 싶었소.”
“대공 각하…….”
신검, 그러나 진정으로 천검(天劍)의 이름에 어울리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의 아바타를 드러내며.
하늘의 기사였다. 수정처럼 빛나는 갑주를 갖고, 새의 날개를 가진 기사. 그러나 결코 천사가 아니었다.
데일의 곁에 있는 샬롯이 나지막이 숨을 삼켰다.
“그러나 정작 내 삶은 대지의 사슬과 족쇄에 꽁꽁 묶여 있는 수감자의 나날이었지.”
“호오.”
“제국의 귀족, 아들의 아버지, 일곱 자루 검의 일좌, 그러나 지금의 나에게 그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지. 그제야 깨달았다네. 처음부터 의미 따위는 없었다는 것을.”
“이제야 철이 좀 드셨습니까.”
핏빛공이 조롱하듯 웃었다. 어느덧 그의 육체는 전신에 빼곡하게 글씨를 새겨넣다 못해, 살가죽 전체가 벗겨진 것과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이제 하늘로 돌아갈 때가 되었을 따름이라오.”
천검이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의 무게에, 비로소 흑색공이 조용히 걸음을 물렸다. 그의 등 뒤에서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까마귀 소리가 잦아들었다.
동시에 핏빛공이 딛고 있는 핏빛의 강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의 육체에 빼곡히 새겨지는 글씨가 피의 강 위로 퍼져나가며, 강 일대를 따라 계속해서 글씨를 써넣고 있었다.
“저는 그저 묵묵히, 피로써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릴 따름이지요.”
핏빛공이 말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그 말과 동시에 천검이 하늘의 세계를 등지고 땅을 박찼다. 하늘의 검이 핏빛공과 핏빛 강을 따라 휘둘러졌고, 그에 맞서 핏빛공이 팔을 뻗었다.
제국 제일의 적마법사가, 자신의 힘을 과시하듯 모두의 앞에서 불꽃을 피워올렸다.
그러나 그 불길이 꽃피는 것보다도 천검의 검이 그의 육체를 토막 내는 것이 더 빨랐다.
촤아악!
핏줄이 그어졌다. 사람의 육체가, 그것이 사람의 육체였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조각조각 찢어 발겨졌다.
일검(一劍) 앞에서 그 형체가 무너져 내렸다.
동시에 피가 흩뿌려졌다.
그와 동시에, 피의 강이 일렁이며 혈류가 솟아 사람의 실루엣을 이루기 시작했다. 방금 공격이 거짓이었다는 듯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게.
바로 그 실루엣을 향해 다시금 천검이 땅을 박찼다.
“이곳에 있는 그대들에게, 굳이 역사의 중요성을 설파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러나 그때마다 핏빛공의 육골이 조각났고, 다시금 솟아났다.
“지상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며, 전쟁의 역사는 곧 ‘피의 기록’입니다.”
결코 사람의 역사 하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도 대륙을 지배하고 있는 이종족, 나아가 과거 제2제국의 엘프들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데일의 앞에 있는 바로 이 블러드 엘프처럼.
그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천검이 쇄도했으나, 그 일검에 아까처럼 핏빛공이 쓰러지는 일은 없었다.
카앙!
검을 마주하는 검이 있었다.
“필멸자의 존재는 모래성처럼 덧없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그들을 기록하고 있는 이상, 그들의 존재는 비로소 불멸(Immortal)을 손에 넣을 수 있지요.”
“……!”
천검의 표정이 비로소 얼어붙었다.
“자, 다시 역사의 풍경 속으로 돌아가 볼까요.”
그렇게 말하며 핏빛공이 능청스럽게 웃었다. 어느덧 그곳은 피의 강이 아니었다.
──희고 어두운 겨울밤이었다.
그리고 일찍이 죽었어야 할 필멸자가, 천검 랭커스터 대공의 앞에 서 있었다.
신검 바델 오르하르트.
“이제는 벌써 십수 해도 지나버린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지요.”
바로 그 남자의 뒤에 서서, 핏빛공이 웃었다.
“신검이 용사에게 패배하고 쓰러진 것, 제국의 정복 전쟁이 비로소 끝을 맺은 사실은 역사의 형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흘린 피로써 말이지요.”
동시에 핏빛공의 살가죽에 새겨진 글씨가,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에 쓰여 있는 글씨는 뜻 모를 이형의 활자들이 아니었다.
제국어였다.
「제3제국력 XXX, 신검 바델 오르하르트가 이계의 용사에게 패배했다.」
그렇게 가슴팍에 쓰여 있는 글씨가,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제3제국력 XXX, 신검 바델 오르하르트가 천검 랭커스터 대공을 죽였다.」
“……!”
그 의미를 이해하는 바로 그 시점에서, 데일의 피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역사는 곧 피의 기록이다. 다시 말해 핏빛공이 가진 마도서 『피의 책』이란…….
바로 그 피의 기록을 열람하고, 마법사의 의지에 따라 그 기록 자체를 덧씌울 힘이란 사실을.
역사 속의 풍경을 끄집어내 자신의 의지로 조작하는 힘. 말 그대로 역사를 조작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일찍이 데일의 아버지가 ‘죽음’의 개념 그 자체를 덧씌웠듯이, 이 남자가 조종하는 힘 역시 일개 불꽃 따위가 아니었다.
“아시다시피,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핏빛공이 싸늘하게 웃었다. 승자가 패자의 피를 흘리게 함으로써 기록되는 피의 역사.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과거의 풍경이, 핏빛공의 뜻대로 조작되어 펼쳐지고 있었다.
일찍이 천검 랭커스터 대공의 둘도 없는 친우이자 대륙 제일의 검.
그리고 샬롯의 아버지.
“아버지……!”
역사 속의 망자, 신검 바델 오르하르트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과거의 망령조차 아니었다. 그것은 결코 데일이 알고 있는 ‘진실’이 아니었으니까.
황금의 군주에게 충성하는 거짓의 기수로서, 피의 기록을 조작하고 뒤틀어 창조한 가짜에 불과했다.
“정신 차려, 샬롯.”
그렇기에 데일이 그의 곁에 있는 소녀를 향해 속삭였다.
“저 남자는 네 아버지가 아니야.”
“그래도…….”
일말의 감정도 없는 목소리로. 그 말에 샬롯이 비로소 입술을 깨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샬롯 양께서는 아직 모르시겠지요.”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 핏빛공이 짓궂게 웃었다. 동시에 그가 손을 휘저었고, 그의 살가죽에 쓰여진 활자가 다시금 뒤틀렸다.
바델 오르하르트의 ‘투구’가 사라졌다. 그리고 투구 밑으로 비로소 그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샬롯의 표정이 다시금 얼어붙었다.
“참으로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감동의 재회네요.”
핏빛공이 말했고, 신검이 땅을 박찼다.
하나밖에 없는 그의 옛 친우, 천검 랭커스터 대공을 향해서.
카앙!
검이 맞부딪쳤다. 그리고 신검의 발밑을 따라 매화밭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직감할 수 있었다.
핏빛공이 『피의 책』을 통해 과거를 멋대로 조작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저 남자, 신검 바델 오르하르트의 검(劍) 자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실이란 것을.
둘도 없는 옛 친우의 검이 휘둘러졌다. 과거의 망령, 그것도 지배자의 뜻대로 춤추는 역사의 망자가 되살아나 춤추고 있었다.
신검 바델 오르하르트가 펼치는 것은 마법사의 그것과 구별할 수 없는 사상의 세계였고, 동시에 그가 기사로서 가진 아바타에 대해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그에게는 아바타가 없었다. 그의 사상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그 자체였으니까.
신검 바델이 아무 까닭 없이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기사라 불린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고결함이, 이제는 지배자의 뜻대로 춤추는 역사의 위증자(僞證者)가 되어 있었다.
“정말로…….”
신검의 검이 천검과 맞부딪쳤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자네의 검이군.”
천검 랭커스터 대공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흩날리는 매화밭이 그의 하늘 속으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하늘의 기사가 검을 휘둘렀다. 자유와 하늘을 갈망하고 있는 검이었고, 그때마다 신검 바델이 펼치는 매화잎이 칼날이 되어 흩날렸다.
대륙 제일의 검이 맞부딪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의 신검 바델 경’에 비해, 지금 그 앞에 있는 천검 랭커스터 대공은 노쇠해 있는 검사에 불과하다. 처음부터 승부의 추는 기울어져 있었다.
그저 마지막까지 무릎 꿇지 않고, 하늘의 기사가 검을 휘둘렀다.
“하늘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네의 검을 볼 수 있어서 기쁘다네.”
신검 바델의 검이 하늘의 기사를 향해 휘둘러졌다. 피는 흐르지 않았다. 육체가 찢어지는 일도 없었다.
그저 육체가 소멸하고 어지럽게 흩날리는 깃털들이 남아, 바람을 타고 하늘로 춤추듯 올라갈 따름이다.
“대공 각하……!”
샬롯의 목소리가 다시금 격해졌다. 데일이 말없이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나 바로 그때였다.
푸욱!
또 하나의 칼날이, 신검 바델의 등을 찢고 솟아났다. 그 검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용사의 애검, 피스메이커다.
어느덧 신검 바델을 조종하고 있는 핏빛공의 육체가, 또 하나의 기록을 적어내고 있었다.
「제3제국력 XXX, 신검 바델 오르하르트가 이계의 용사에게 패배했다.」
“말했듯이, 역사는 피의 기록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핏빛공이 웃었다.
신검으로 거듭나 있는 랭커스터 대공을 쓰러뜨리는 것은 결코 그의 몫이 아니었다. 핏빛공이 과거로부터 되돌린 역사의 망자였으니까.
동시에 신검 바델이 무릎을 꿇었고, 이계의 용사가 그곳에 있었다. 자신의 애검 ‘피스메이커’를 쥐고서.
“아버지…….”
샬롯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샬롯의 ‘두 아버지’가 그곳에서 끝을 맺었다. 그리고 이계의 용사가 감정 없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찰나였다.
동시에 일대의 풍경이 스러지고, 다시금 피의 강이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남자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자기 몸에 ‘피의 기록’을 새겨넣고, 동시에 제국의 시대정신을 집행하는 대륙 제일의 적마법사가.
핏빛공이 감정 없는 표정으로 데일을 바라보았고, 동시에 그의 앞을 가로막는 남자가 있었다.
“승부는 이걸로 끝이 났습니다.”
흑색공이 입을 열었고, 핏빛공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핏빛공의 육체에 새겨진 『피의 책』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일대를 가득 메우고 있는 혈해(血海)가 곧, 그 책을 써나가는 잉크란 사실을.
그리고 비로소 핏빛공이 그의 세계를 거두었고, 그곳은 어느덧 작센 공작성의 중정이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어디를 돌아봐도, 그곳에 랭커스터 대공의 존재는 찾아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