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 * *
팽팽하게 당겨진 공기가 비로소 폭발했다. 신검 랭커스터 대공이, 그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검을 뽑아 들었다. 신속과도 같은 움직임이었고, 어느덧 그의 칼날 끄트머리가 핏빛공의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아, 깜짝이야. 어째서 검을 멈추셨지요?”
그 모습을 보고 핏빛공이 싸늘하게 조소했다.
“그대로 검을 휘둘러 목을 베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랭커스터 대공의 검이 그의 육체에 생채기를 내는 일은 없었다. 서로의 몸에 흐르고 있는 피의 무게를 이해하는 까닭에. 일찍이 미하일 랭커스터가 ‘검은 공자’의 앞에서 그러했듯이.
“……처음부터 네놈들 적색 마탑의 수작이었나.”
“이것 참, 오해하지 마십시오.”
핏빛공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저는 어디까지나 대공 각하의 차남, 미하일 아드님의 철없는 소망을 이루어주었을 따름입니다.”
“……!”
그 말을 듣자마자 비로소 랭커스터 대공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어차피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 흑색공을 통해서 밝혀질 진실이다. 그렇기에 핏빛공이 앞서 선수(先手)를 쳤다. 그게 다였다.
“정말로 내 아들, 미하일이…….”
요크와 ‘검은 공자’의 주장이 맞았다.
랭커스터 대공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토록 믿음직하고 자랑스러운 아들이, 그토록 끔찍하기 그지없는 괴물의 초상을 갖고 있었다니.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믿을 수밖에 없었다.
네 명의 마탑주와 그림자 군주, 그러나 어느덧 그곳에 모여 있는 것은 그들이 다가 아니었다.
천상공의 곁에 있는 성검사 오렐리아, 신검 랭커스터 대공과 그의 수양딸 천검 샬롯.
끝으로 그림자 군주와 작센의 검들, 광검 헬무트 경과 살검 마스터 바로, 방랑검이 그곳에 있었다.
제국의 정점에 서 있는 검과 마법의 대가들.
“아드님들의 일에 대해서는 참으로 깊이 유감을 표하지요.”
그 속에서 여유를 잃지 않고 핏빛공이 웃었다.
“그러나 책임을 물을 상대를 착각하셨습니다.”
“…….”
“하물며 그 책임을 물어야 할 상대에게, 대공 각하의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딸을 넘겨버리다니!”
핏빛공이 다시금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그림자 군주, 데일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어째서 미하일 공자님이 그렇게 무모하기 짝이 없는 ‘악의 길’로 빠져들었는지 아십니까?”
“여기까지 와서 제 탓으로 책임을 떠넘길 생각입니까?”
“저는 그저 사실을 말할 따름입니다. 그날, 제국 제일의 천재이자 ‘검은 공자’ 앞에서 패배하고 미하일 공자님이 느끼셨을 뼈저린 질투와 열등감!”
핏빛공이 과장되게 두 팔을 벌리며 웃었다. 신검 랭커스터 대공 역시 묵묵히 침묵을 지킬 따름이다.
“처음으로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느끼는 절망과 좌절이, 총명하신 미하일 공자님을 비틀린 악으로 이끌었지요!”
“헛소리를 들어주는 것은 거기까지입니다.”
그림자 군주가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핏빛공께서는 지금, 랭커스터 대공 가의 장남을 암살했다고 자백하신 것과 다름없습니다. 설령 아무리 제국의 총애를 받는 적색 마탑주라 할지라도 그 책임을 져야겠지요.”
“책임이라.”
그 말에 핏빛공이 흥미롭게 웃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
동시에 핏빛공의 표정에서 감정이 사라졌다.
“전쟁이라도 하실 생각입니까? 저와 목숨을 걸고 결투라도 벌이실 생각입니까?”
제국 제일의 강자들, 그들이 격돌하는 무게를 알지 못할 핏빛공이 아니다. 신검 역시 예외가 아니리라. 그러나 이 남자다. 이 남자가 랭커스터의 아들들을 향해 악마의 속삭임을 내뱉었고, 랭커스터 대공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이 자리에서 보란 듯이 랭커스터 가의 장남을 암살했다.
“제국 제일의 대귀족에 썩 어울리는 처신 같지는 않네요.”
바로 그때였다.
“샬롯 오르하르트.”
신검 랭커스터가 흘끗 고개를 돌렸다. 그의 수양딸, 그러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샬롯의 성씨는 신검 바델의 그것이었다.
“샬롯 랭커스터, 그리고 이제는 작센의 샬롯이라 불러야 하겠지.”
“대공 각하…….”
밤까마귀 기사의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샬롯이 나지막이 숨을 삼켰다.
“내 친우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제국 제일의 대귀족에게 어울리는 처신’이었으니까. 너를 거두어 매화검을 가르친 것은, 과거의 내 비겁함으로부터 고개를 돌리는 도피 행각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 말에 샬롯이 고개를 저었다.
“대공 각하께서 저에게 아버지의 검을 가르쳐주신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용기가 필요했으니까요.”
“그래,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그렇게 말하며 신검 랭커스터 대공이 웃었다.
그대로 고개를 돌린다.
“랭커스터 가는 대에 대를 걸쳐, 제국의 대귀족에게 어울리는 처신을 취해왔다.”
“옛 랭커스터 가주들의 충성에 대해서는 아주 잘 기억하고 있지요.”
핏빛공이 조용히 웃었다. 헤아릴 수 없는 랭커스터의 가주들이 대에 대를 거듭하는 와중에도, 그 남자는 그들의 흥망성쇠를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불사의 삶을 손에 넣은 뱀파이어, 블러드 엘프의 일족으로서.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지.”
신검이 비로소 그의 검을 뽑았다. 일찍이 하늘의 검이라 일컬어진 창천(蒼天)의 검. 수정색의 하늘을 들여다보듯 맑고 투명하기 그지없는 검신이 서슬을 머금었다.
“호오.”
“두 아들을 잃었고, 나의 딸 ‘샬롯 랭커스터’는 내가 아니라 작센의 비호 아래 놓여 있다. 지금의 내가 제국의 대귀족으로서 취해야 할 처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말씀하시지요.”
핏빛공이 대답을 기다렸고, 대답이 돌아왔다.
타앗!
거리가 좁혀지며 신검의 손에 들린 창천의 검이 휘둘러졌다. 서로의 몸에 흐르고 있는 피의 무게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
촤아악!
핏빛공의 목이 그대로 잘리고 울컥울컥 피를 내뿜었다. 그러나 신검의 일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의 몸을 도륙하기 위해 이검을 휘둘렀다.
카앙!
그러나 그 이검이 휘둘러지는 일은 없었다.
잘린 목에서 쏟아지는 피가,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혈류가 되어 솟구쳤다. 그대로 휘둘러지는 창천의 검을 가로막았다.
불과 피의 군주, 유리스 후작.
“아, 이것 참…….”
동시에 잘린 목에서 끝없이 솟아나는 혈류가 응고되며, 사람의 형체를 이루었다.
또 하나의 목이었다.
동시에 발밑을 나뒹굴고 있는 핏빛공의 잘린 목이 혈액의 형태로 녹아내렸고, 그 피가 발밑을 따라 흡수되었다.
“참으로 어리석은 결정을 하셨습니다.”
핏빛공이 대답했다. 비로소 일말의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 싸늘함을 머금고서.
“그리고 그 어리석음의 대가를 치러야 할 때지요.”
동시에 핏빛공이 딛고 있는 발밑을 중심으로, 일대의 세계가 역전되었다.
일찍이 그가 데일에게 보여준 것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옛 지구의 폐허였다.
그러나 지금, 핏빛공이 펼치고 있는 ‘사상의 세계’는 또 하나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기사의 아바타가 사상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지듯, 마법사의 세계 역시 꼭 하나의 형태를 가질 필요는 없다. 특히 핏빛공처럼 고위 경지의 마법사일수록 그러하다.
철저하게 적을 쓰러뜨리기 위한 무기로서, 대륙 제일의 적마법사가 그의 세계를 펼쳐 들었다.
“힘입니다.”
불꽃 같은 것은 타오르지 않았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오직 하나,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절대적 폭력이지요.”
그리고 핏빛공의 세계가 집어삼키는 것은 신검 하나가 아니었다. 일대에 모여 있는 모두를 끌어들여서, 과시하듯 자신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천상공과 흑색공, 청색의 흑막과 그림자 군주, 나아가 그들의 기수를 비롯해 대륙 칠검들까지 누구 하나 예외가 아니었다.
“힘을 가진 자는 그렇지 못한 자를 빼앗는다. 그리고 빼앗기는 자는 피를 흘리지요. 역사는 오로지 피의 수레바퀴를 통해 굴러가는 법이며, 그럴 때마다 약자들의 육골이 짓이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지요.”
피의 바다였다.
지평 너머까지 끝없이 피로 이루어져 있는 피바다. 핏빛공 유리스 후작은 바로 그 강물 위를 딛고 있었다.
“다시 말해, 역사의 수레바퀴는 곧 폭력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 세계는, 제국의 수레바퀴에 짓눌리고 부서져 압사되어버린 자들의 피로 이루어져 있지요.”
“적색 미치광이의 헛소리를 들어줄 여유 따위는 없다.”
그 속에서 신검 랭커스터 대공이 검을 고쳐 잡았다.
고도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검은 마법과 구별될 수 없다. 일찍이 샬롯 오르하르트가 그러했듯이.
일찍이 그가 가진 이명대로, 하늘이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랭커스터 대공이 펼친 하늘에는 백색 마탑의 사제들이 펼치는 사상의 세계처럼, 결코 천상의 성스러움이나 금빛, 경이로움 같은 것이 없었다. 여신의 자비와 자애로 가득 차 있는 하늘이 아니었다.
그저 수정처럼 맑고 깨끗한 하늘이었다.
바로 그 하늘 위의 천공(天空)을, 신검 랭커스터 대공이 딛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맞서, 핏빛의 강물 위를 딛고 있는 적색 마탑주, 유리스 후작이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결투 재판을 시작하지요.”
핏빛공이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제국의 법이 규정하고 있는, 힘을 통해 주장의 정당성을 가리는 승부.
그의 말마따나 승자가 전부를 얻고 패자가 전부를 잃는 싸움이었다.
동시에 이 싸움에 그 이외의 강자들이 끼어들기를 가로막는 포석이기도 했다.
“네 뜻을 받아들이지.”
랭커스터 대공이 대답했다. 그가 신검의 이름을 손에 넣은 것은 고작 몇 달도 채 되지 않는 짤막한 남짓이다.
그렇기에 지금도 비록 신검의 이름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가 추구하는 검의 길이란 오직 하나였다.
하늘의 검.
창천과 혈해, 두 세계가 맞물린 그곳은 무척이나 기이했다.
천상의 위를 걷고 있는 듯하며, 동시에 피의 강물 위를 딛고 있는 듯한 기이하기 짝이 없는 풍경.
이러니저러니 해도 천검 랭커스터 대공의 존재는 대륙에서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강자다.
설령 그 상대가 적색 마탑주라 해도 다를 것은 없으리라.
신검이자 하늘의 검이 땅을 박차고 쇄도했다. 그리고 그 움직임에 따라 하늘의 세계가 핏빛공의 세계를 향해 확장되며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아, 인간의 가엾은 발버둥이란.”
그 모습을 보며 핏빛공이 싸늘하게 조롱을 내뱉었다.
대륙 제일의 적마법사이자 적색 마탑의 정점에 서는 자로서, 그의 심장에 깃들어 있는 여덟 개의 서클이 가속하기 시작했다.
“『피의 책(Book of Blood)』이여.”
동시에 유리스 후작이, 비로소 그가 가진 마도서의 이름을 읊조렸다.
촤아악!
일대의 혈해가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유리스 후작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피를 뒤집어쓴 핏빛공이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는 알몸이었고, 그 피부 위로 칼자국이 새겨졌다.
조각칼을 새겨넣어 부조를 그리듯, 육체 전체에 칼자국이 새겨지며 빼곡하게 ‘글씨’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살갗을 찢어 쓰고 있는 글씨였고, 글씨를 따라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피의 책.
그 이름처럼, 육체를 페이지 삼고 피로써 그리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