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 * *
이듬해, 작센과 랭커스터의 장남과 장녀가 혼약을 발표하고 얼마 후.
데일의 열일곱 생일을 맞아, 나아가 두 사람의 식(式)을 앞두고 작센 공작성은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축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라 할 수 있는 데일의 마음은 무척이나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샬롯 역시 예외가 아니리라.
새벽 밤이 깊었고, 잠들지 못한 데일이 공작성의 유리창을 바라보며 침묵에 잠겼다.
어머니 엘레나는 비로소 데일이, 그것도 랭커스터 가의 양녀로 입적한 샬롯과 맺어진다는 사실을 무척 기뻐하고 있었다. 깊은 내막을 알지 못하는 그녀로서는 어릴 때부터 함께 동고동락한 소녀와 맺어진다는 게 그저 순수하게 기뻤으리라.
바로 그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시지요?”
데일이 숨을 삼키고 나서 입을 열었다.
“나야, 데일.”
샬롯 랭커스터였다.
여느 때처럼 밤까마귀 갑주 차림의 여기사가 아니라, 흑색 실크 소재의 나이트가운을 걸치고서. 샬롯이 머뭇거리며 데일의 방에 들어왔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침묵 속에서 샬롯이 복잡하게 미소 지었다.
“네가 랭커스터의 제의를 수락해줬을 때, 무척 기뻤어.”
“…….”
“설령 그게 정략을 위한 결정이라고 해도.”
샬롯이 씁쓸하게 중얼거렸고, 데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네가 나를 필요로 해줘서 기뻐.”
그저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까닭에.
검(劍)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검을 쥐는 자는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데일이 말없이 샬롯의 어깨를 휘감고 포옹했다. 샬롯이 일순 숨을 삼켰으나, 당혹은 길지 않았다.
새벽 밤하늘이 무척이나 어둡고 캄캄했다.
* * *
이튿날 새벽 아침.
“리제.”
“오라버니!”
일찍부터 작센 가의 중정에서 마법을 수행하는 여동생 리제와 스승 세피아가 있었다.
“샬롯 언니가 제 새언니가 될 거라고 들었어요!”
“그래, 그러니까 너도 부끄럽지 않게 더 열심히 마법을 배워야지.”
순수하게 미소 짓는 리제를 보며 데일이 말없이 웃었다.
“네! 저, 벌써 1서클 마법사가 됐으니까요!”
여덟 살의 리제, 데일이 8살을 맞고 나서 서클을 새겼을 때와 같은 나이다. 엄밀히 말해 당시의 데일과 비교할 수는 없어도, 리제의 성장이 빠르다는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일이리라.
리제의 심장을 따라 마나 서클이 회전했고, 그녀의 주위에서 새하얗고 창백한 냉기가 보석처럼 흩뿌려졌다.
아름다웠다.
“무척 예쁘네.”
그렇게 말하고 나서, 데일이 흘끗 고개를 돌렸다. 말없이 침묵을 지키는 엘프 스승 세피아가 있었다.
“리제, 세피아 님과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러는데, 잠시 자리를 비켜줄 수 있을까?”
“알겠어요, 오라버니!”
데일의 말에 리제는 달리 의심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멀어지는 리제를 보며, 침묵 끝에 데일이 입을 열었다.
“세피아 님.”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세피아가 미소 지으며 되물었다. 여느 때처럼 상냥한 엘프 마법사의 미소였다.
“저는…….”
데일이 주저하며 입을 열려 할 때였다.
“나를 신경 써줄 필요는 없다.”
세피아가 말했다. 부드럽게, 그러나 알 수 없는 거리감을 가진 목소리였다.
“제가 신경이 쓰여요.”
그러나 데일 역시 그대로 물러나지 않았다.
“너를 향하는 샬롯 양의 마음은 어떻게 할 것이냐?”
“…….”
“샬롯 양이 마음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구나.”
세피아가 말했다.
“나는 네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월을 살아왔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그렇지 않지. 짧고 덧없으며, 아주 찰나의 감정에 흐트러져 그들이 내리는 무수히 어리석은 결정들을 보아왔다.”
“그럼 어째서 작센 공작 가에 머무르고 계시는 거죠?”
“리제를 가르치기 위해서란다.”
세피아가 짐짓 차갑게 대답했다.
“나는 네가 샬롯 양과 행복해지기를 바랄 따름이다.”
“…….”
“인간으로서, 찰나의 소중함을 망각하지 말아다오.”
처음으로 그녀의 목소리에 희미한 진심이 어린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정말로 세피아 님의 바람이신가요?”
“…….”
세피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다. 그렇기에 데일 역시 그 이상 묻지 않았다.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 * *
작센 공작성에서, 작센과 랭커스터의 장남 ‘데일’과 장녀 ‘샬롯’이 맺어지는 예식(禮式)이 공표되었다.
제국 3대 공작 가, 그중의 두 가문이 집결하는 자리는 두말할 것 없이 제국 전체의 이목을 사로잡았으리라.
그 뒤에 숨겨져 있는 복잡하기 그지없는 내막을 비롯해서.
신검 바델 경의 딸, 샬롯 오르하르트. 그러나 샬롯의 어머니 바네사는 랭커스터 대공과 재혼함으로써 딸에게 ‘랭커스터’의 성씨를 하사해 주었다.
아울러 그 샬롯 오르하르트는 철이 들 무렵까지 작센 공작 가 밑에서 비호를 받아왔고, 지금에 이르러 어엿한 대륙 칠검이자 천검의 이름을 가진 검객으로 거듭났다.
바로 그 소녀가, 랭커스터의 이름을 갖고 작센의 ‘검은 공자’와 맺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랭커스터의 위세가 옛날 같지 않다고 하나, 어쨌거나 제국의 3대 공작 가를 이루는 대제후다. 그 랭커스터와 작센이 결속하고 힘을 합쳤다는 것은 절대 가볍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식의 일정이 가까워졌고, 두 사람의 맺음을 축하하기 위해 제국 유수의 귀족들이 앞다투어 몰려들었다.
제국 황실도 예외가 아니었다.
제국 제1황자 랜슬롯과 적색 마탑의 정점에 서는 두 남매, 핏빛공 유리스 후작과 ‘레이디 스칼렛’이 함께했다. 유리스 후작의 아들이자 적색 마탑의 후계자, 레이 유리스와 함께.
제국 전체를 아우르는 헤아릴 수 없는 강자들이 저마다의 명목(名目)을 내걸고 집결했다.
두 공작 가의 결속을 통해 바뀌게 될 ‘힘의 질서’를 파악하고자 함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기로가 다가오고 있었다.
* * *
그 시각, 작센 공작성에 의탁하고 있는 그림자 대법정. 나아가 ‘산의 암살자’들을 포함해 데일 직속의 첩보대로 거듭나 있는 《그레이브 워커》의 아지트.
데일의 검(劍)들이 그곳에 있었다. 작센 공작의 충성스러운 검, 광검 헬무트 블랙베어 경을 제외하고서.
레이디 섀도우, 그림자 속에서 데일을 수호하는 칠흑과 진실의 오렐리아.
살검 마스터 바로와 방랑검.
끝으로, 새롭게 천검의 검위를 손에 넣은 칠검이자 데일의 배우자가 될 여기사 ‘샬롯 랭커스터’가.
그림자의 검과 더불어 대륙 칠검의 무명을 가진 세 자루 검들.
“축하드려요, 흑색의 여기사님.”
아울러 그림자 성녀가 마스터 바로의 곁에서 입을 열었다. 칠흑의 붕대로 눈동자를 가린 채, 그러나 그 너머의 것들을 볼 수 있다는 것처럼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러나 우리 그림자의 왕이시여, 조심하는 게 좋을 것입니다.”
“저는 늘 조심하고 있습니다.”
데일이 대답했고, 그림자 성녀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군주께서 조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림자 군주를 향하는 위협 역시 더더욱 거대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지요.”
“무엇을 조심하라는 것입니까?”
“이 자리에서, 황금과 그림자 사이에 놓여 있는 힘의 질서는 돌이킬 수 없는 형태로 뒤바뀔 것입니다.”
그림자 성녀가 말했다.
“저와 샬롯의 예식이 이루어지는 자리에서 말입니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명목에 불과합니다. 이미 군주께서는 이 대륙에 돌이킬 수 없는 형태로 당신의 영향력을 뿌리내리고 있었고, 그것을 알지 못할 황금이 아니니까요.”
“작센 공작령은 제 아버지의 영지입니다. 설령 상대가 누구라 해도 쉽사리 어리석은 짓을 감행하지는 않겠지요.”
“그렇게 볼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 영지가 동시에 ‘작센의 영지’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
그림자 성녀가 말했고, 데일이 나직이 숨을 삼켰다.
“마왕령 너머의 《엘드리치》들을 말하는 것입니까?”
대대로 작센의 옛 가주들이, 죽음을 속이고 도망친 북쪽의 끝.
“불사공께서는 저와 같은 풍경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저 역시, 불사공께서 보고 계시는 것과 같은 풍경을 볼 수 있지요.”
“……무엇이 보이십니까?”
“작센의 옛 가주들이 ‘그림자 마탑’으로 집결하고 있지요.”
“이곳 작센 공작령을 노리고서 말입니까?”
“그것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림자 성녀가 대답했고, 데일이 표정을 찌푸렸다.
“황실을 비롯해 적색 마탑주와 제국 유수의 강자들이, 저와 샬롯의 식을 위해 모여들고 있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기고 나서, 데일이 입을 열었다. 냉정하게 지금의 상황을 정리하며.
“그림자 마탑의 《엘드리치》들이 움직일 경우,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그들을 맞이할 적기라고 볼 수 있겠지요.”
“황금의 기수를 자처하며 옛 그림자의 일족과 싸울 생각입니까?”
그림자 성녀가 되물었다. 데일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그러는 성녀님께서는 그들 옛 작센 가주들을 위해 싸우고 계십니까?”
일순 마스터 바로의 표정이 굳었다. 급속도로 험악해지는 공기 속에서 그림자 성녀가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바로.”
“마리아 아가씨, 아니…… 성녀님.”
그림자 성녀의 진짜 이름, 마리아의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가 그녀의 기사 ‘마스터 바로’를 제지했다.
“저는 오직 그림자 군주를 위해 충성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불사공 프레데릭과 옛 그림자의 일족은 그 자격을 잃었지요.”
“부디 그 충성이, 계속해서 저를 향할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림자 군주가 짐짓 싸늘하게 대답했다.
* * *
제국 황도에서 출발해, 북쪽에 있는 작센의 동토로 향하는 어느 마차.
핏빛공 유리스 후작이 포도주를 홀짝이며 그곳에 있었다. 레이디 스칼렛, 나아가 그의 아들 ‘레이 유리스’와 함께.
제국을 지배하는 사람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 피를 갈구하는 블러드 엘프의 일족.
“제법 배가 불러왔구나, 나의 사랑스러운 동생아.”
“슬슬 때가 되고 있으니까 말이지요.”
레이디 스칼렛은 마치 출산을 코앞에 두고 있는 산모(産母)처럼 배가 부풀어 있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날, 강마의 의식을 통해 레이디 스칼렛의 뱃속에 무사히 잉태해 있는 악마의 씨.
“아이가 기뻐하고 있는 것이 느껴져요.”
그렇게 말하며 레이디 스칼렛 역시 포도주를 홀짝였다.
핏빛의 포도주였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제국을 바꾸게 될 ‘힘의 질서’를 목도하고자 대륙 유수의 귀족과 강자들이 모여들었고, 그러나 대다수는 그러한 속내를 알지 못하고 작센 공작령을 가득 메웠다.
작센 공작성의 대회당에서, 그 어느 때와 비교할 바 없는 호사스러운 식의 준비가 시작되었다.
작센 가 하나의 이름이 아니라, 적백(赤白)의 장미를 가문으로 삼는 랭커스터 대공 가 역시 하나의 축이 되어서.
비로소 예식의 막이 올랐다.
밤까마귀와 적백의 장미가 겹쳐졌고, 공작성의 대회당 중앙에서 작센의 ‘검은 공자’가 고개를 들었다.
샬롯 랭커스터 역시 그의 앞에 있었다.
여느 때의 갑주가 아니라, 흡사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공주님처럼 화사한 드레스 차림으로.
감격스럽게 아들을 지켜보는 어머니 엘레나가 있었고, 순수하게 기뻐하는 여동생 리제가 있었으며, 마지막까지 엘프 스승 세피아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동시에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핏빛공 유리스 후작이, 두 사람을 축복하듯 박수 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무척이나 불길한 미소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