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 * *
신검 바델 오르하르트가 그곳에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기사, 그리고 대륙 최강의 검사.
바로 그 검사에 맞서, 여섯 장의 날개를 가진 치품천사 오렐리아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잔잔하게 일렁이는 호수 위. 지평 너머까지 펼쳐진 물의 세계를 뒤로하고.
호수 위로, 몇 장의 꽃잎들이 흩날리듯 춤추며 내려앉았다. 핏빛의 매화잎이었다.
강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것이 일찍이 ‘이계의 용사’와 치열한 우열을 가리지 못하고 동귀어진했다 일컬어지는 대륙 제일의 검이었나.
“……저의 패배입니다.”
여섯 장의 날개는 흩날리는 칼날의 꽃잎에 짓이겨져,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찢어진 채였다. 고결한 순백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고통 속에서 오렐리아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손에 들린 성검 뒤랑달이 힘없는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고개를 드십시오.”
그리고 그녀 앞에서 신검 바델 오르하르트, 동시에 제국 제1황자 랜슬롯이 말했다.
“성처녀 님의 승리입니다.”
“……!”
“저는 당신이야말로 성검을 쥘 자격이 있으며, 나아가 그대의 고결함을 존중하고 싶습니다.”
신검이 말했다.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계시는 겁니까?”
거짓의 성처녀가 물었다. 신검이 의미심장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우리의 거짓이, 진실보다 더 가치 있기를.”
* * *
네 자루 검의 격돌이 끝을 맺었고, 두 개의 결투가 끝이 났다.
그러나 천검과 성검의 검위를 쥐는 것은 결코 승자들의 몫이 아니었다.
두 패자들의 몫이었으니까.
“이것으로 작센의 데일에 맞서, 승자 샬롯 오르하르트를 천검의 검위에 봉할 것이며──.”
조용히 무릎 꿇고 있는 매화의 숙녀를 향해, 신검 랭커스터 대공이 말을 잇는다.
“아울러 랭커스터의 가주로서, 지금부터 ‘샬롯 오르하르트’를 우리 랭커스터 대공 가의 양녀(養女)로 받아들여 랭커스터의 이름을 하사할 것임을 제국에 포고하겠습니다.”
“대공……!”
랭커스터 대공이 말했다. 그 말에 일순 귀검 세필리아의 표정에 귀기가 어린다.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계시는 겁니까?”
“아주 잘 이해하고 있지요.”
랭커스터 대공이 일말의 주저도 없이 대답했다.
“샬롯 랭커스터는, 지금부터 우리 랭커스터 가의 미래를 이끌어갈 검이자 나의 장녀입니다.”
샬롯 랭커스터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신검이 그의 칼등으로 샬롯의 머리와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며, 약소한 의식을 마무리 지었다.
작센의 데일은 말없이 그녀를 지켜볼 따름이다.
주군의 곁에 남기 위해, 치욕을 마다하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검희의 모습을.
* * *
“성검 뒤랑달의 검주, 성검사 오렐리아 님.”
의식은 약소하게 치러졌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검의 시험을 주관하고 있는 브란덴부르크 백작, 필립이 말했다. 짐짓 엄숙하게.
“나, 나는 자랑스러운 아버지 성검사의 유지를 잇는 성검의 검주로서, 성처녀 오렐리아 님을 봉할 것을 명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순백의 성처녀, 거짓의 오렐리아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지금도 데일의 그림자 속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칠흑의 오렐리아를 뒤로하고.
바로 그때였다.
“그, 그러나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오렐리아 님!”
의례적으로 절차를 마치려다 말고, 필립이 입을 열었다.
“말씀하십시오.”
“오렐리아 님께서는 아직 일개 농노의 딸입니다! 일개 농노의 딸이, 그 천한 혈통으로 성검을 쥐는 것은 여러 가지로 문제의 소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짐짓 강압적으로 제스처를 취하며 필립이 과장되게 소리쳤다. 귀족들이 일개 하녀나 농노의 딸들을 유린하는 데 있어 그들의 ‘핏줄’을 과시하는 으레 있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저 필립, 자랑스러운 성검의 아들이자 브란덴부르크 백작과 결합할 경우……! 성처녀 님께서는 성검의 검주로서 그 무엇보다 확실한 정통성을……”
스릉.
바로 그때였다. 침묵 끝에, 무릎 꿇고 있는 오렐리아가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성검의 칼자루를 뽑았다.
“또다시 그 이상 헛소리를 지껄이셨다가는…….”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오렐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말없이 성검의 창백한 서슬이 흩뿌려졌고, 그 서슬 앞에서 필립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렸다.
“어, 어디까지나 제의였습니다! 결코 강압이 아니라 그저 재고해주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말을 얼버무리며, 필립이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성처녀의 곁에서, 제국 제1황자 랜슬롯이 일말의 감정도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롭게 신검의 자리를 손에 넣은 랭커스터 대공…… 그리고 그의 양녀로 거듭나 있는 ‘천검 샬롯 오르하르트’를 보며.
바로 그때였다. 조용히 그를 지켜보고 있는 작센의 데일과 시선이 교차했다.
일순, 랜슬롯의 표정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그러나 그의 동요는 거기까지였다.
“이상의 일을, 제국 제1황자 랜슬롯의 이름으로 제국에 공표할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비로소 검의 시험에서 펼쳐진 수라장이 끝을 맺었다.
이곳에서 벌어진 내막을 아는 것은 고작 몇 명의 검객과, 그들을 지켜보는 필립 휘하 소수의 기사가 전부다.
그러나 검의 전각에서 벌어진 일이 산을 내려가 정식으로 공표되고, 나아가 사람들의 입을 타고 대륙에 퍼지기 시작할 즈음에는…….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일으키는 것처럼, 그 무엇과도 비할 바 없는 소용돌이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 * *
“랭커스터 대공 각하.”
신검 바델의 미망녀, 바네사 오르하르트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제는 또 하나의 신검으로 거듭나 있는 랭커스터 대공이 그의 앞에 있었다.
“아시다시피, 제 처 역시 세상을 뜨고 제법 세월이 지났습니다.”
랭커스터 대공이 말했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샬롯을 위한 형식적 모양새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샬롯 오르하르트가 랭커스터의 이름을 손에 넣기 위해 해야 할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침 부군(夫君)을 잃은 미망녀가 있었고, 처를 잃은 남자가 있었으니까.
“설령 형식밖에 없는 껍데기라 하더라도 개의치 않습니다. 저는 그저, 일찍이 옛 친우를 돕지 못한 빚을 청산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딸아이에게 그이의 검을 가르쳤나요?”
“그렇습니다.”
랭커스터 대공이 대답했고, 바네사의 표정이 흐려졌다. 작센의 비호 속에서 신검의 딸은 이미 어엿한 기사로 성장했다. 그러나 랭커스터 가의 여식이 되어, 나아가 신검 바델의 검을 계승하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행위였으니까.
그럼에도 돌이킬 수 있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없었다.
* * *
검의 시험이 끝나고, 그곳에서 벌어진 일들이 호사가들의 입을 통해 대륙 전체로 퍼져나갈 즈음.
작센의 데일 역시, 비로소 시험을 끝마치고 그의 영지로 돌아왔다.
대륙 칠검의 네 자루를 거느린 채.
“다시 돌아오게 돼서 기뻐.”
데일이 말했고, 천검(天劍) 샬롯 랭커스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대공 각하와 어머니께서 재혼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침묵 끝에 샬롯이 되물었고,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 곳곳의 비밀스러운 속삭임을 가져다주는 자들이 있어.”
그의 등 뒤에서 날갯짓하는 청색의 나비를 뒤로하고.
“그래도 네가 매화검을 손에 넣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거야.”
샬롯이 웃었다.
“나는 계속해서 네 활약을 지켜보고 있었어.”
“대륙 곳곳의 속삭임을 가져다주는 자들을 통해서?”
“응.”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작센 가를 떠나 용병대에 몸을 의탁했고, 바라미르 백작의 영지전에 참여해 우익(右翼)의 기수에 섰으며, 적의 좌익을 돌파하고 포위 기동 끝에 상대 귀족을 생포했다는 것.”
“……!”
“그 후 다섯 개의 영지전에서 활약하고, 다음에는 용병대를 나와 모험가로 괴물을 사냥하고 다녔어. 그 후에는 제국자유도시 프로나의 골칫거리 트롤 무리를 토벌하고, 도시의 영웅이 됐지.”
데일의 입에서는 막힘 없이 샬롯의 행적이 흘러나왔다.
“나에게 있어 너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검이야.”
데일이 말했다. 검의 시험에서 보여준 싸늘한 모습이 아니라, 어디까지고 샬롯이 기억하고 있는 바로 그 데일이었다.
“……데일.”
샬롯이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목구멍까지 솟구치는 감정을 입에 담고 싶었다.
그러나 샬롯 랭커스터는 조용히 미소 지을 따름이었다.
검(劍)은 생각하지 않으니까.
* * *
“샬롯 양이 돌아왔더구나.”
그날 밤, 작센 공작의 집무실.
죽음과 어둠의 군주이자 흑색 마탑의 정점에 서는 자, 데일의 아버지 ‘흑색공’이 입을 열었다.
“그것도 랭커스터 가의 성을 손에 넣고서 말이지.”
“저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상해야 할 것이다.”
작센 공작이 대답했다.
“그녀는 이제 망국의 몰락 귀족이 아니다. 대륙 칠검의 검위를 가진 랭커스터 대공 가의 장녀지.”
“하고자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녀는 더 이상 너를 지키는 일개 기사로 존재할 수 없다. 아울러 우리 작센의 비호도 이제는 의미가 사라졌지.”
작센 공작이 대답했다. 제국 제일의 귀족 중 하나에 걸맞은 냉정함을 가지고.
“이 이상 그녀가 우리 작센 공작령에 체류하고자 할 경우, 그에 상응하는 값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귀족의 거래입니까?”
데일이 물었고, 작센 공작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들이 그들의 카르텔을 공고히 하고 결속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 때마침 혼기의 남녀가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잠시 생각할 여유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거라. 그저……”
작센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고 나서, 방금까지의 냉정함이 거짓말이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나는 늘 네 결정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다오.”
“고맙습니다, 아버지.”
데일이 고개를 숙이며 그대로 등을 돌렸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작센 공작령 너머의 마왕령, 그리고 그 마왕령 너머에 있는 어둠의 대지. 불사공 프레데릭을 필두로 옛 작센의 가주들이 ‘그림자 마탑’에 결집하기 시작했다.
시스티나 교황령의 백색 마탑에서는, 성처녀 오렐리아를 필두로 ‘교국 독립’을 위한 비밀스러운 맹약이 올려졌다.
제국의 3대 공작 가, 그중 랭커스터 대공 가와 작센 공작 가는 그들의 장녀와 장남의 혼약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끝으로 또 하나의 3대 공작, 익사공의 밀사가 백색 마탑과 접촉해 ‘독립 동맹’에 합류했다는 속삭임이 청색의 거미줄을 통해 들려왔다.
데일이 알고 있는 것들, 알지 못하는 것들, 나아가 데일이 직접 엮여 있는 일까지.
정세가 빠르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 와중 데일이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곳곳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씨들이 폭발을 일으키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란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