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10화 (210/301)

210화

* * *

샬롯의 세계에 맞서, 데일 역시 그의 세계를 꺼내 들었다.

오로지 100%의 긍정과 부정밖에 존재하지 않는 심상의 풍경.

냉기와 어둠으로 이루어진 세계였고, 바로 그 세계에 칠흑의 성채가 우뚝 솟아올라 있었다.

샬롯 오르하르트 역시 바로 그 성채 속에 있었다.

그녀의 주군이자 흑금(黑金)의 옥좌 위에 앉아 있는 그림자 군주를 마주하며.

그러나 그녀가 딛고 있는 지점을 중심으로, 그녀의 등 뒤에는 또 하나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지평 너머로 끝없이 매화잎이 흩날리는 꽃의 세계였다.

두 개의 세계가 맞물렸고, 매화의 기사가 그녀의 검을 고쳐 잡았다. 그림자 군주 역시 흑금의 옥좌에서 몸을 일으켜, 그의 검을 고쳐 잡았다.

옛 용사의 애검, 피스메이커의 칼날이 평화의 빛을 머금고 빛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샬롯이 쥐고 있는 것은 그저 작센 공작 가의 일개 대검이었다.

그러나 고도의 경지를 가진 검은 결코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 그렇기에 지금 샬롯이 펼치고 있는 검의 경지는 마법사로서 사상의 세계를 펼치는 그 이상의 것이리라.

그것도 골방에 틀어박혀 수행에 매진하는 일개 장로와는 비교를 불허하리라.

처음부터 전장에 서는 것을 전제로 검(劍)을 갈고닦은 그녀니까.

“……샬롯 오르하르트.”

그렇기에 데일이 입을 열었다.

“그대가 기사의 맹세를 바친 주군으로서, 너에게 명령을 내리겠다.”

그림자 군주가 말했고, 매화의 기사가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이 결투의 승패, 나아가 누가 천검의 검위를 손에 넣고를 떠나서……”

데일이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에게 돌아와 줘.”

“……!”

그 말에, 매화의 기사가 투구 너머로 나직이 숨을 삼켰다.

“약속했지. 내가 필요로 할 때, 절대 주저하지 않고 달려와 줄 거라고.”

“응.”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군의 명령을 받들겠어.”

“좋아.”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매화 꽃잎이 흩날리며 데일의 세계를 향해 침범했고, 그것은 데일이 쌓아 올린 칠흑의 성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성을 이루고 있는 벽돌이나 대리석 바닥, 구조물 따위가 슈브의 촉수로 바뀌며 쇄도하기 시작했다. 그에 맞서 샬롯이 흩날리는 칼날의 꽃잎이 휘몰아쳤고, 암혈이 흩뿌려졌다.

세계와 세계가 격돌했다.

흐드러져 있는 보랏빛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날카로움을 머금고 있는 꽃의 세계.

그에 맞서는 것은 태고의 어둠과 종말의 냉기로 이루어진 겨울밤, 그 대지 위에 우뚝 솟은 칠흑의 성채였다.

카앙!

검과 검이 격돌했다.

매화의 기사가 흩뿌리는 보랏빛의 검과 칼날의 꽃잎, 그에 맞서 그림자 군주가 피스메이커를 휘둘러 ‘평화의 빛’을 흩뿌렸다.

찬란하게 빛나는 빛의 보호막이 휘몰아치는 꽃잎을 막아내고, 이내 쨍그랑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샬롯의 거리가 좁혀졌다.

작센의 대검이 휘둘러졌다.

카앙!

휘둘러지는 대검을 용사의 검으로 막아내기 무섭게, 대검의 터무니없이 커다란 검신(劍身)이 여러 자루 검으로 쪼개졌다.

‘환검(幻劍)……!’

그러나 그 검 하나하나에는 물리적 실체가 존재했고, 흡사 십수 자루의 레이피어를 구사하듯 검들이 폭격처럼 내리꽂혔다.

카앙! 카앙!

휘둘러지는 십수 자루의 검을 막아내는 것은 마찬가지로 십수 자루의 검들이었다.

그림자 군주를 위해 충성하는 불사의 기사들이, 데일의 일검에 더해져 그들의 흑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샬롯의 무위를 막아내며 데일이 흘끗 거리를 벌렸다.

“강해졌네.”

거리를 벌리고 나서 데일이 말했다.

“정말로 강해졌어.”

냉정하게 말해서, 데일이 진심으로 샬롯을 쓰러뜨리기 위해 임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샬롯 오르하르트를 ‘죽이기 위해’ 전투에 임하는 것과는 달랐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샬롯의 무위가 갖는 가치는 결코 폄하될 수 없었다.

“…….”

그렇기에 데일이 솔직하게 칭찬했다. 매화의 기사는 꽃의 갑주 속에서, 침묵을 지킬 따름이다.

“아바타를 꺼내.”

침묵 끝에 매화의 기사가 말했다.

“네가 가진 검(劍)의 아바타를 보여줘.”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가 아니라, 오러 마스터의 경지를 손에 넣고 데일이 가진 아바타.

데일이 쌓아 올린 또 하나의 사상.

“…….”

데일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침묵은 길지 않았다.

용사의 애검, 피스메이커의 칼자루를 빙글 고쳐 잡았다. 동시에 하복부의 오러 하트가 폭발하듯 오러를 내뿜었다.

후우웅!

휘몰아치는 오러의 폭풍 속에서, 오러 마스터로서 쌓아 올린 사상의 갑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밤까마귀 기사의 흑갑(黑鉀)으로 무장하고 있는 흑기사였다.

생각보다 평범하다. 밤까마귀 기사의 갑주가 곧 사상의 갑주라니. 아마 샬롯 오르하르트는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그리고 그녀로서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지금 데일이 펼치고 있는 진짜 사상의 갑주는, 바로 그 밤까마귀 기사의 갑주 밑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그토록 증오하는 아버지의 적이, 바로 이 흑기사의 갑주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밤까마귀 기사의 흑갑 밑으로, 이계의 용사…… 제국의 사냥개가 침묵하고 있었다.

작센 가의 ‘검은 공자’라는 껍데기 속에 숨어 있는 전생의 자신이.

전생의 옛 애검 피스메이커를 고쳐 잡고,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흑색의 투구에 가려진 얼굴을 샬롯으로서는 알지 못하리라. 설령 얼굴을 알았다 할지라도 달라질 것은 없으리라.

샬롯 오르하르트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계의 용사는 죽었으니까. 신검 바델이 그러했듯이.

그렇기에 샬롯은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이 누구일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데일 역시 그것을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저 말없이 땅을 박찰 따름이다.

동시에, 용사의 손에 들린 피스메이커가 빛을 내뿜었다.

지금까지의 그 무엇과도 비교를 불허하는 빛.

진정한 평화의 빛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사방 일대에서 휘몰아치고 있는 칼날의 꽃잎들이, 그대로 정지했다. 그것은 데일의 세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상이 정지했고, 그러나 피스메이커를 쥐고 있는 용사는 그렇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서 세상은 정지한 것이 아니었다. 세상의 시곗바늘이, 아주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을 따름이지.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평화 같은 것은 허상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진실로 평화가 존재한다고 가정할 경우, 그 평화가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정체(停滯).

역사의 수레바퀴, 이 세계의 시곗바늘 그 자체를 멈추는 것.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어느 의미에서는 종말의 겨울이 찾아왔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우주 전체가 절대영도로 얼어붙어 일체의 것들이 정지해 있는 것이야말로 ‘궁극의 평화’일 테니까.

피스메이커의 평화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시곗바늘이 더없이 정지에 가까운 상태로 느려졌다.

그러나 극도로 느려진 세상의 시곗바늘 속에서, 오직 하나의 존재는 그렇지 않았다.

타앗!

이계의 용사가 땅을 박차고 쇄도했다. 정지해 있는 시곗바늘 속에서 홀로 자유롭게.

째깍.

세상이 정지한 것은 아주 찰나였다. 그러나 이 정도의 강자들에게 있어, 찰나가 갖는 의미는 억겁(億劫)과도 같으리라.

시곗바늘의 초침 하나가 움직였다.

용사의 검이, 매화의 기사를 향해 겨누어져 있었다. 정지해 있는 일각 속에서 홀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이계의 용사가.

천하의 신검 바델 오르하르트조차 최후의 최후에 이르러서는 이계의 용사에게 패배했다.

──바로 이 힘 앞에서.

그러나 이 궁극의 평화 앞에서도 바델 오르하르트는 이계의 용사를 죽기 일보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가진 기사의 경지를 상징하는 것이리라.

샬롯 오르하르트는 강했다. 그러나 결국 여기까지였다.

“아…….”

그녀로서는 무엇이 일어났는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으리라.

그저 정신을 차려보니, 데일의 검이 그녀의 목덜미를 겨누고 있었으니까.

“내 승리야.”

이계의 용사…… 그리고 데일이 말했다. 매화의 기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대로 피스메이커의 칼자루를 역수로 고쳐 쥐고서, 바닥에 내리꽂았다.

“이게, 대체 뭐야…….”

침묵 끝에, 샬롯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무나도 웃겨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또다시, 너에게는 닿지 못하는 거구나.”

샬롯이 자조하듯 말했다. 침묵 끝에 데일이 자신의 아바타를 해제했다. 샬롯이 익히 알고 있는 작센의 데일이 그곳에 있었다.

“네 검은 확실히 나에게 닿았어.”

데일이 말했다.

“아울러 천검의 검위는 네 것이 될 거야.”

“……또다시 나를 동정하는 거야?”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

샬롯이 싸늘하게 되물었고, 데일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너는 너무 고결해.”

“……!”

“정정당당하게 손에 넣지 못하는 천검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겠지. 나를 이기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네 자신이 강하지 못하니까 내 곁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지.”

데일이 말했다. 샬롯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네가 약한 거야.”

데일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샬롯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추해질 용기가 없으니까. 진흙투성이가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더러워질 용기가 없으니까. 허황하기 그지없는 이상과 고결함에 얽매여 있으니까, 아무리 성장하고 강해져도 나에게는 닿지 못해.”

그렇게 말하며, 데일이 고개를 돌렸다. 태고의 어둠과 종말의 냉기를 머금고 있는 세계를 뒤로하며.

“나는 추한 인간이야.”

“…….”

“너로서는 절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추악하고 더럽고, 비열하기 짝이 없지.”

데일이 자조하듯 웃었다.

“그게 지금의 나를 있게 해주었고.”

“……어째서 그렇게까지 강해지려는 거야?”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데일이 대답했다. 일말의 주저도 없이.

“여기서 나는 너에게 패배했어. 그리고 너는 천검의 검위를 손에 넣고,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올 거야.”

데일이 말했다.

“네가 보기에는 추하고 고결하지 못한 행위겠지. 그래도 개의치 않아. 그리고 네가 내 제의를 받아들이지 못할 경우…….”

데일에게 더 이상 ‘샬롯 오르하르트’는 필요하지 않다. 그 의미를 헤아리지 못할 샬롯이 아니었다.

“……받아들일게.”

그렇기에 샬롯 오르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데일의 말대로였다. 아무리 추하고 추해도 개의치 않았다. 샬롯이 바라는 것은 그저 데일의 곁에 있는 것이었으므로.

─ 응, 아주 재밌어! 정말정말 재밌어! 나, 인간이란 생물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어!

슈브가 참을 수 없다는 듯 키득거리며 광희했다. 샬롯이 듣기에는, 그저 칠흑의 성채가 모종의 괴성을 부르짖는 것처럼 들리고 있으리라.

샬롯의 추함, 데일의 추함, 그것이 곧 인간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슈브가 웃고 또 웃었다. 너무나도 즐거워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끝없이 울려 퍼지는 슈브의 광소를 뒤로하고, 데일이 비로소 팔을 휘저었다. 샬롯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을 휘감고 있는 세계가 소멸했다.

비로소 숨을 삼키고 있는 칠검이 그곳에 있었다.

검의 전각.

바로 그곳에서, 작센의 ‘검은 공자’가 무릎을 꿇었다.

“작센의 데일, 샬롯 랭커스터 앞에서 패배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데일이 말했고, 샬롯과 랭커스터 대공이 일순 숨을 삼켰다. 처음부터 랭커스터 대공의 속내를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러나 선수를 치는 것은 신검 랭커스터 대공의 몫이 아니었다.

무릎 꿇고 데일이 차갑게 웃었다.

샬롯은 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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