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 * *
흐드러진 보랏빛이 작센의 대검을 휘감았고, 향기가 흩뿌려졌다.
“……!”
그 모습을 보고 데일이 일순 숨을 삼켰다.
“어떻게 그 검을……!”
“너를 위해 강해지겠다고 맹세했으니까.”
샬롯이 대답했고, 그녀의 검이 휘둘러졌다.
칼끝을 따라 꽃들이 피어올랐다.
칼날의 꽃, 검화(劍花).
휘둘러지는 대검의 검신을 따라 헤아릴 수 없는 칼날의 꽃들이 피어올라, 그 꽃잎들이 데일에게 쇄도했다.
자색 오라의 조각을 머금고 있는 칼날 꽃잎들. 그 모습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일찍이 이계의 용사가 쓰러뜨린 튜토니아 기사국 최강의 기사, 신검 바델 오르하르트의 검…… 매화검이다.
과거의 데일이 그를 쓰러뜨렸을 때, 제국은 그 검을 계승하는 자가 나타나는 것을 두려워해 철저하게 매화검의 기록을 불태웠다. 그러나 신검 바델 경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으리라.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기사는, 자신이 평생을 추구해 쌓아 올린 검이 사라지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 검이 돌고 돌아, 다시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리라.
신검의 딸, 샬롯 오르하르트에게.
“매화검……!”
그 모습을 보자마자, 두 사람의 결투를 지켜보고 있는 귀검 세필리아를 비롯해 나머지 칠검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그들 역시 그 의미를 모를 리 없었으므로. 아니, 어느 의미에서는 그들이야말로 그 검의 진짜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자들이었기에.
“도대체 어떻게 그 검을 손에 넣었지!”
“어허, 이 아줌마. 지금 결투 중이란 것을 잊었소?”
샬롯을 추궁하려는 세필리아를 향해, 살검 마스터 바로가 그의 검을 뻗어 제지했다.
그 직후 귀검 세필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묵묵히 두 사람의 결투를 지켜보고 있는 대륙 제일검이자, 샬롯의 스승 ‘신검 랭커스터 대공’을 향해서.
“……대공 각하였습니까?”
귀검의 싸늘한 물음에, 랭커스터 대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제국에 충성하는 천하의 랭커스터 가주께서, 바델 오르하르트의 금기를 몰래 빼돌리셨군요.”
“누구보다 제국에 충성했지.”
신검 랭커스터 대공이 싸늘하게 조소했다.
“그래, 지금의 내 꼴을 보게나.”
웃고 나서 덤덤히 말을 잇는다.
“내 장남 리처드는 제국의 시대정신을 집행하는 적색 마탑의 이들에 의해 미쳐버렸고, 차남 미하일은 전장에서 ‘검은 공자’의 손에 목숨을 잃었지. 당시 그가 요크 측으로 전향했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황실이 나에게 무엇을 경고해 주었나? 아니,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지. 이게 그 충성의 결과일세.”
“그래서 제국을 배신하셨습니까?”
귀검 세필리아가, 다시금 그녀의 칼자루에 손을 올리며 싸늘하게 되물었다.
“배신이라고 했나? 나는 그저 랭커스터 가(家)를 지키고자 할 따름일세.”
“그러십니까.”
그 말을 끝으로 귀검이 고개를 돌렸다. 샬롯의 대검에서 흐드러지고 있는 칼날의 꽃잎을 바라보며.
자색의 잎사귀들이, 일제히 흩날리기 시작했다.
마치 봄바람에 매화나무의 꽃잎들이 쓸려나가는 것처럼 일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갈게, 데일.”
샬롯이 조용히 속삭였다. 데일 역시 각오를 굳히며 그의 검을 고쳐 잡았다.
“기꺼이.”
천검의 검위를 놓고 벌어지는 대결. 제국 제일의 재능이라 일컬어지는 두 명의 검사들이 비로소 그들의 전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후우웅!
칼날의 꽃잎들이 흩뿌려지며 데일을 향해 쇄도했다. 그러나 그것은 알기 쉬운 형태로 쏘아지는 총알의 포화가 아니었다. 사방에서 자유자재로 흩뿌려지는 칼날 꽃잎의 무리였고, 그 하나하나에는 스치는 것으로 육골이 토막 날 정도의 보랏빛 예기가 깃들어 있었다.
고도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검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
일찍이 기사들이 사상의 갑주라 불리는 아바타를 통해 마법사와 같은 초상의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듯이.
그리고 지금, 데일의 앞에 있는 것은 그 검의 정점이라 일컬어지는 기사의 산물이다.
사방에서 흩뿌려지는 꽃잎들이, 그 꽃잎에 깃들어 있는 오러가 일대의 풍경을 뒤바꾸고 있었다.
흡사 마법사가 펼치는 사상의 세계처럼…… 칠검이 지켜보고 있고, 샬롯과 데일이 딛고 있어야 할 검의 전각 일대가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자 그곳은 어느덧 두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세계였다.
봄바람이 불고 있었고, 사방 일대에 헤아릴 수 없는 매화나무의 가지들이 끝없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핏빛의 꽃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도망칠 수 없는 매화밭. 그리고 그 핏빛 꽃잎들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설마 이 정도까지…….”
“이 경지를 알고 있어?”
데일이 무심코 중얼거렸고, 샬롯이 되물었다.
“신검 바델 오르하르트 경의 매화검에 대해서는, 모르는 이들이 없을 테니까.”
데일이 태평하게 거짓말을 했다. 동시에 쥐고 있는 칠흑의 마검 ‘기아’를 도로 그의 칼집에 집어넣었다.
그 대신 또 하나의 검을 뽑아들었다.
“……!”
샬롯의 표정이 일순 경직되었다. 그 의미를 모를 리가 없는 까닭에.
신검 바델 오르하르트를 쓰러뜨린 용사의 애검, 피스메이커다.
평화의 중재자.
“참 얄궂네.”
그 모습을 보고 샬롯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뭐가?”
“우리 모습이 꼭, 제국의 용사와 아버지 바델 경의 싸움처럼 느껴져서.”
용사의 검을 쥐고 있는 데일과 매화검을 구사하고 있는 샬롯. 참으로 그 말대로였다.
용사가 있었고, 그 용사의 손에 쓰러진 아버지의 딸이 있었다.
“너는 그 누구보다 소중한 내 기사야.”
“너도 그 누구보다 소중한 내 주군이야.”
데일이 말했고, 샬롯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절대로 질 수 없어.””
두 사람의 결의가 교차했고, 그 즉시 데일이 땅을 박찼다.
매화밭에서 흩날리고 있는 죽음의 꽃잎들이, 봄바람에 이끌리듯 데일을 향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핏빛 꽃잎에 깃들어 있는
용사의 검에 깃들어 있는 평화의 빛이 흩뿌려졌다. 일대의 공격을 무위로 되돌리는 《평화의 강제》가 빛을 내뿜었다.
일체의 물리 공격을 무위로 되돌리는 힘. 그러나 그 힘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신검 바델과의 싸움에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앙!
그러나 찰나의 공격, 일순에 휘몰아치는 죽음의 꽃잎을 비껴낼 방패 역할 정도는 수행할 수 있으리라.
쨍그랑!
‘벌써……!’
끝없이 휘몰아치는 핏빛 꽃잎 속에서, 데일을 휘감고 있는 평화의 빛이 덧없이 스러졌다. 유리 조각이 깨지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고, 칼날의 잎사귀들이 데일의 육골을 향해 휘몰아쳤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성장세다.’
촤아악!
그러나 그보다 앞서,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를 덧씌웠다.
나아가 암혈의 갑주에서 솟아나는 칠흑의 칼날이 흩날리고 있는 샬롯의 꽃잎 하나하나를 튕겨냈다.
거리가 좁혀졌고, 데일을 향해 흩날리는 꽃잎들이 방향을 바꾸었다.
매화 꽃잎들이 그대로 그들의 화주(花主) 샬롯 오르하르트의 육체를 휘감았다.
휘감고 나서 보랏빛의 오러가 폭발했고, 그 너머에 비로소 검의 극의에 이르러 있는 샬롯이 모습을 드러냈다.
꽃의 기사였다.
* * *
끝없이 펼쳐진 호수의 물 위에서, 제국 제1황자 랜슬롯이 비로소 사상의 갑주를 몸에 둘렀다.
그러나 신검 바델 경이 쓰러질 당시, 나아가 제국이 통일 전쟁을 일으킬 당시의 오렐리아는 일개 시골뜨기의 딸에 불과했다.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기사의 모습 같은 것을 알 리가 없으리라.
“이 모습은, 일찍이 용사의 검에 쓰러진 신검 바델 오르하르트입니다.”
“……!”
그러나 그 무명(武名)마저 모를 수는 없다.
“신검 바델 경이, 당신이 추구하는 사상의 종착점입니까?”
그렇기에 여섯 장의 날개를 가진 치품천사 오렐리아가 되물었다. 그녀가 추구하는 사상의 종착점이, 자매신의 기수를 자처하는 신의 집행자이듯이.
“사상이라고요? 아, 그럴 리가요.”
제1황자 랜슬롯이 싸늘하게 웃었다.
“통일 전쟁이 끝나고 나서, 신검 바델 오르하르트 경의 육체는 공식적으로 그날의 겨울밤에 버려져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
“그러나 사실, 그의 육체는 사라지지 않았지요.”
그리고 그 육체가 어디에 들어가 있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제국이 그 정도의 소재(素材)를 내버려 둘 리가 없겠지요.”
“그 말대로입니다. 황제 폐하의 이름 아래 적색 마탑이 그 육체를 손에 넣었지요. 그 정도 경지를 가진 기사의 육체는 여러모로 쓸모가 많을 테니까요.”
신검 바델 오르하르트의 가죽을 둘러쓰고 있는 랜슬롯이 씁쓸하게 조소했다.
“참으로 용서할 수 없는 악행이지요.”
“……그의 고결함을 모욕하는 것을 참지 못하신 겁니까?”
“그의 고결함이라고 하셨습니까? 틀립니다.”
랜슬롯이 일말의 주저도 없이 대답했다.
“──제국이 모욕한 것은 ‘나’의 고결함이니까.”
“지금, 뭐라고…….”
“신검의 육체가 제국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나서, 오러 하트를 비롯한 육체의 일부가 제1황자 랜슬롯에게 이식되었지요. 천하의 제국조차 거기에 ‘자아의 조각’마저 깃들어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제국의 황자가 아니라, 바델 경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신검 바델 오르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저는 엄밀히 말해 제국의 황자도, 신검도 아닙니다. 그저 그 둘의 의식이 융합하고, 그 사이에 걸쳐져 있는 무엇일 따름이지요. 내지는 ‘두 명 전부’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어째서 저에게 그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저는 당신의 고결함을 믿고 있으니까요.”
랜슬롯이 말했다.
“부디 검을 쥐십시오, 여신의 기수여.”
그리고 바델 경이 말했다.
그 말에 더 이상 거짓의 성처녀 오렐리아는 망설이지 않았다. 마찬가지였다. 그의 앞에 있는 저 존재도 진짜 바델 오르하르트가 아니니까.
자신이 거짓임을 알고 있음에도 진실보다 더 진실해지려는 자들.
“각오하십시오.”
그렇기에 여섯 장의 날개를 가진 치품천사에게, 망설임 같은 것은 없었다.
* * *
매화의 기사(Knight of Blossom)였다.
엄밀히 말해 신검 바델 오르하르트가 펼친 아바타와는 조금 다르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의 샬롯이 펼치고 있는 매화검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창조할 정도의 경지에 이르러 있으니까.
사방이 흩날리는 매화밭이었고, 그 속에서 그림자 군주가 자신의 아바타를 전개하며 서 있었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정도의 실력으로는 결코 샬롯을 쓰러뜨릴 수 없을 것이란 것을.
“보여줘.”
매화의 기사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
“너의 마음이 가진 풍경을.”
“…….”
그렇기에 샬롯 오르하르트가 말했다. 데일이 일순 망설였다. 그러나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후우웅!
동시에 희고 어두운 겨울밤의 풍경이 데일의 발밑에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종말의 어둠과 태고의 냉기를 머금고, 나아가 그림자 군주로서 쌓아 올린 칠흑의 성채가 우뚝 솟아올랐다.
마법사가 자신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진다.
긍정하고 자신의 전부를 드러낼 상대이거나, 내지는 전력으로 부정하고 배제해야 할 적.
그렇담 사상의 세계를 펼치는 마법사로서, 그의 앞에 있는 매화의 기사는 도대체 어느 쪽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