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 * *
데일과 모드레드, 샬롯과 신검, 순백의 오렐리아와 랜슬롯.
검의 전각에서 동시에 펼쳐지는 세 개의 결투 중 두 결투가 끝이 났다.
천검의 검위를 놓고 벌어지는 네 자루 검들 사이에서의 승부였다.
세 명의 규칙에 따라, 나머지 하나의 대전 상대를 자처하는 신검 랭커스터 대공은 최후의 일전에 앞서 샬롯의 감각을 날카롭게 벼려주었고, 작센의 데일은 모드레드를 상대로 손쉽게 승리를 손에 넣었다.
“방금 모드레드 공자님께서 패배를 받아들이셨습니다.”
데일이 싸늘하게 대답하며, 팔을 뻗었다. 동시에 모드레드를 휘감고 있는 종말의 냉기가, 마치 시간을 되감듯 역순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절대로 되돌릴 수 없는 세계의 법칙, 불가역(不可逆)의 섭리를 역행하듯이.
제7황자 모드레드를 휘감고 있는 냉기가 비로소 데일의 육체 속으로 스며들었고, 동시에 모드레드가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허억, 헉……!”
고통 속에서 의식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졌다. 여전히 그의 육체가 파르르 떨리며 창백하게 얼어붙어 있는 채였다.
“나는, 나는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
바로 그때, 필사적으로 검을 고쳐 잡고 모드레드가 소리쳤다.
“나는 자랑스러운 제국의 아들, 황금의 기수……!”
직전까지 얼어버린 육체의 감옥 속에서 있는 일들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듯.
“그러십니까.”
그러나 데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청색의 나비가 날아올랐고, 동시에 청색의 거미줄은 이미 모드레드의 영혼 가장 깊숙한 곳에 휘감겨져 있으니까.
청색 마탑의 스파이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 자신이 결코 청색 마탑의 스파이란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니까.
“그쯤 하십시오, 모드레드 황자님.”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려는 모드레드를 향해, 비로소 귀검 세필리아가 입을 열었다.
“대륙 칠검의 하나로서, 저 귀검 세필리아는 이 승부의 승자가 ‘작센의 데일’임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세필리아……!”
“무모하게 굴지 마십시오, 황자님.”
납득하지 못하고 무어라 항의하려는 모드레드를 향해, 세필리아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지금의 황자님으로서는 결코 저 ‘검은 공자’를 이길 수 없습니다.”
“……!”
그 말에 모드레드가 입술을 깨물었다. 또다시, 넘을 수 없는 벽이 그곳에 있었다.
제국 제일의 천재란 말조차 부족한 괴물, 그림자 군주가.
“……경의 뜻을 받아들이겠다.”
모드레드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직전까지 얼음의 감옥 속에서 무엇이 있었는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또 하나의 나비가 청색의 거미줄에 걸려들었고, 그 거미줄을 조종하는 것은 더 이상 청색의 흑막 ‘아라크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그녀는 충성스러운 그림자의 기수이자 교활한 책사(策士)였고, 그녀가 충성하는 군주는 바로 이곳에 있었으니까.
* * *
“헉, 허억……!”
춤추는 신검의 무위 앞에서, 샬롯 오르하르트가 비로소 호흡을 가다듬었다.
데일과 모드레드의 결투가 끝나는 즉시 ‘세 명의 규칙’에 따라 두 사람의 싸움 역시 끝을 맺는다. 비록 신검이 전력을 다하는 싸움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제자를 향해 휘둘러지는 검은 결코 얕볼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샬롯은 호흡을 가다듬고 체내의 평정을 유지했다.
“고마워요, 스승님.”
“네가 작센의 ‘검은 공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같은 것은 중요치 않다. 그리고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다. 설령 그가 전장에서 내 아들을 쓰러뜨렸다 할지라도.”
미소 짓는 샬롯을 향해, 신검 랭커스터 대공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샬롯의 표정이 일순 얼어붙었다.
“그러나 네가 진정으로 그를 주군으로 섬기고자 하며, 충성의 맹세를 올린 이상…… 너는 그를 지킬 수 있도록 강해져야 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느냐?”
“제 손으로 주군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할 것.”
샬롯이 결의를 담아 나지막이 대답했다.
처음 데일을 보았을 때, 샬롯은 세상을 알지 못하는 치기 어린 소녀였다.
무엇 하나 알지 못하는 어린 소녀는 그녀의 검으로 오르하르트 가(家)를 지키겠다며, 제국 제일의 천재를 향해 막무가내로 도전을 신청했다.
데일을 쓰러뜨림으로써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그러나 샬롯은 패배했고, 동시에 샬롯에게 손길을 내밀어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데일이었다.
자신의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도 그녀를 지키기 위해 데일은 목숨을 걸고 맞서주었다.
그렇기에 그 남자야말로 그녀가 진정으로 충성할 가치가 있는 주군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제국 제일의 천재이자 ‘검은 공자’가 헤아릴 수 없는 성장을 거듭하며 강해질 때마다…… 샬롯의 존재는 결코 그를 지켜줄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아가, 데일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는 것조차 그녀의 몫이 아니었다.
데일이 그의 스승, 엘프 마법사에게 보여주는 마음을 깨닫지 못할 샬롯이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달라질 것은 없다.
“각오는 되었습니다.”
샬롯이 조용히 입술을 악물었다.
돌고 돌아 결국 원점(原點)이다.
다시 샬롯 오르하르트는 그녀의 검으로 제국 제일의 천재이자 작센의 ‘검은 공자’에게 도전할 것이고, 이것은 더 이상 철없는 소녀의 치기가 아니었다.
“제 손으로, 작센의 ‘검은 공자’를 쓰러뜨릴 각오가.”
* * *
세 개의 결투 중 두 개의 결투가 끝을 맺었고, 다시 하나의 결투가 시작되었다.
검의 전각에 남아 있는 것은 다시금 두 개의 결투였다.
천검의 검위를 놓고 펼쳐지는 데일과 샬롯의 승부.
그리고 아까 전부터 성검의 검위를 놓고 이어지는 싸움.
성처녀와 호수의 검이 격돌했다.
하나의 검위를 놓고 서로가 100%의 전력을 쏟아붓는 싸움. 적어도 순백의 성처녀 오렐리아에게 있어 그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성검 뒤랑달을 쥐고, 여섯 장의 성스럽게 빛나는 날개를 가진 치품천사로 거듭나서.
순백의 세라프가 땅을 박차고 쇄도했다. 아니, 쇄도하려고 했다.
“그대의 거짓은 아름답습니다.”
바로 그때, 호수의 검이 입을 열었다.
“……!”
휘둘러지는 성처녀의 검이 그대로 정지했다. 성검 뒤랑달의 칼날 끄트머리가 랜슬롯의 황금 갑주를 향해 내리꽂히기 일보 직전에.
“어째서 검을 멈추셨습니까?”
랜슬롯이 되물었다.
“아버지께서는 말씀하셨지요. 우리의 거짓은 진실보다 진실하고 아름답다고.”
“하고자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아, 지금 이곳에서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새들이 너무 많군요.”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청색의 새와 쥐들이었다.
그렇기에 호수의 기사가 팔을 뻗었다.
후웅!
일대의 세계가 그대로 역전되었다. 오렐리아가 나직이 숨을 삼켰다. 그곳은 더 이상 검의 전각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발을 디디고 있는 곳은 어느 호수의 위였다.
지평 너머까지 끝없이 펼쳐진 물의 세계.
랜슬롯은 호수의 물 위에 발을 디디고 서 있었다. 그것은 오렐리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고결하지 못한 자는 이 호수의 대지를 밟고 서 있을 수 없습니다.”
랜슬롯이 말했다.
“그러나 성처녀께서는 그렇지 않으신 모양이네요.”
“……이곳에서는 새와 쥐들이 속삭임을 듣지 못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랜슬롯이 미소 지었다.
“이곳에서 성처녀님이 ‘제국 제1황자’를 쓰러뜨리고 성검의 검위를 손에 넣을 경우…… 그 명성이 대륙 전체에 울려 퍼지게 되겠지요.”
호수의 기사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차박. 호숫가의 물 위를 따라 잔잔하게 파문이 일렁였다.
“저에게 무엇을 바라시는 겁니까?”
성처녀가 다시금 되물었다.
“저를 쓰러뜨려 주십시오.”
호수의 기사가 말했다.
“그럼 제가 말씀해준 대로, 누구도 성처녀 오렐리아 님을 부정하지 못할 겁니다. 그림자 군주의 검으로 거듭나 있는 진실보다도 더욱 진실한 거짓이 되는 것이지요.”
“……!”
랜슬롯의 말에 거짓의 성처녀가 숨을 삼켰다.
“도대체 무엇을 바라십니까?”
“저는 그림자 군주가 승리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호수의 기사가 대답했다.
“그러나 동시에 저의 아버지, 황금의 군주가 승리하는 것도 바라지 않지요.”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터무니없는 말에, 성처녀 오렐리아가 숨을 삼켰다.
“저는 황금과 그림자의 추악하기 그지없는 오욕(汚辱)의 투쟁이 지긋지긋합니다. 그렇기에 그저, 가장 고결한 자들이 승리하길 바라지요.”
고결함.
“마땅히 승리할 가치가 있는 자들.”
그렇게 말하며 호수의 기사가 웃었다.
“그러나 말씀드렸다시피, 저를 쓰러뜨리는 일은 절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가 검을 고쳐 잡았다.
동시에 비로소 오러가 휘몰아치며 호수의 기사가 가진 ‘사상의 갑주(Avatar)’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기사.
일찍이 용사에게 패배하고 나서, 공식적으로 그 육체가 행방불명이 되어 사라졌다고 전해지는 최강의 기사.
──신검(神劍) 바델 오르하르트 경이 그곳에 있었다.
* * *
“데일.”
“샬롯.”
샬롯 오르하르트가 그 이름을 입에 담았고, 데일 역시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훌륭하게 성장했구나.”
마치 딸의 성장을 축하하듯 데일이 미소 지었고, 그러나 샬롯은 웃지 않았다.
“응.”
그저 감정 없는 표정으로 덤덤히 중얼거릴 따름이다.
“내 주군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야 하니까.”
“그렇구나.”
그 말에 데일이 조용히 웃었다. 샬롯의 주군으로서, 성장한 기사의 검을 마주하며.
그러나 천검의 검위는 오직 하나다. 이 자리에서 둘 중의 하나는 패배하고 검을 쥘 수 없다.
순순히 데일이 검에 욕심을 버리고 패배를 외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양보를 샬롯 오르하르트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그것이 샬롯이란 소녀였으니까.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기사의 딸.
“봐주지 않을 거야.”
그렇기에 데일이 검을 뽑았다. 칠흑의 칼날이 쏟아지는 햇빛에 어두운 서슬을 빛냈고, 샬롯 오르하르트 역시 작센의 대검을 뽑아 들었다.
“약속했잖아. 내가 너를 지켜줄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겠다고. 그리고…….”
그렇게 말하며, 샬롯이 일순 말을 흐렸다.
그녀의 강함. 증오스러운 복수의 대상은 사라졌고 작세의 비호 아래 있는 오르하르트 가는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 그럼에도 샬롯은 강함을 향해 집착을 멈추지 않았다. 오직 하나의 이유였다.
데일의 곁에 있기 위해서.
“네가 나를 필요로 해줄 때,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으니까.”
그리고 그러기 위해, 데일이 자신을 필요로 하기 위해 샬롯은 증명해야 했다.
자신의 검이 제국 제일의 천재, 작센의 ‘검은 공자’보다 낫다는 것을.
바로 그 이유 하나로 샬롯이 검을 고쳐 잡았다.
데일 역시 오러 하트를 따라 삼색의 오러를 방출했고, 그의 검이 작센의 흑검처럼 어둡게 빛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샬롯 오르하르트의 칼끝을 따라 흐드러진 보랏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향기가 나는 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