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 * *
아무것도 없는 동토의 대지. 지평 끝까지 뻗어 있는 시린 눈밭에 흑금의 기사가 있었다.
“여기는 대체 어디지……?”
직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검의 전각, 그곳에서 천검의 자리를 놓고 작센의 ‘검은 공자’와 맞붙었었다. 그 직후 그의 칼끝에 깃들어 있는 냉기가 모드레드를 집어삼켰고, 그 뒤에 의식을 잃었다.
그랬어야 했다.
그 직후, 산 채로 살가죽을 벗기는 것 같은 끔찍한 냉기가 모드레드의 존재를 휘감기 시작했다. 결코 알량한 비유 따위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육체를 후비는 광풍이었다.
“허억, 추워, 추워……!”
고통 속에서 흑금의 기사이자 7황자 모드레드가 몸을 떨었다. 호흡과 동시에 냉기가 그의 목구멍을 타고 식도 깊숙이 스며들었고, 체내에서 다시금 고통스러운 냉기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얼어서 죽을 것 같았다.
체내의 뼈와 장기 하나하나에 시린 냉기가 스며들었고, 숨을 쉬는 것조차 벅찰 정도의 고통이 아려왔다.
살과 뼈를 발리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 모드레드가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호흡할 때마다 체내 속으로 스미는 냉기가 두려운 나머지, 비명조차 마음껏 내지를 수 없었다.
그저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것밖에는.
바로 그때였다.
“제국 7황자 모드레드.”
목소리가 들렸고, 모드레드가 황급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직전까지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동토 위에, 그림자 군주가 나타나 있었다. 결코 도망칠 수 없는 종말의 냉기와 어둠을 거느린 채.
“이 냉기로부터 해방되고 싶나?”
“……!”
데일의 물음에 모드레드가 숨을 삼켰다.
“그러기 위해 무엇을 바칠 수 있지?”
“뭐, 뭐라고?”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충성할 수 있나?”
바로 그때, 데일이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림자 군주를 위해, 기꺼이 황금을 버리고 그림자의 기수를 자처할 수 있나?”
“네놈 따위가 감히……!”
“싫음 말고.”
모드레드가 뭐라 중얼거리려는 찰나, 데일이 그대로 팔을 뻗었다.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후우웅!
직전까지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냉기의 무리가 휘몰아쳤다. 방금의 냉기가 봄바람처럼 우습게 느껴지는 고통이었고, 소리 없이 비명을 내지르는 모드레드를 향해 데일이 말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나?”
대답 같은 것을 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데일의 목소리는 확실하게 모드레드의 의식 속으로 파고들었다.
“바깥세상의 네 육체는 얼어붙어 빛나는 얼음 조각이 되어 있다.”
데일이 말했다.
“그러나 의식은 그렇지 않지.”
“……!”
육체가 얼었고, 의식은 그렇지 않다. 그 말의 의미를 헤아린 모드레드가 일순 숨을 삼켰다.
“이대로 얼어버린 육신의 감옥에 감금되어, 남아 있는 일평생을 냉기와 마주할 각오는 되어 있겠지?”
데일이 되물었다. 뼛속까지 시리는 고통을 뒤로하고 모드레드가 다급히 입을 열려 했다.
그러나 어느덧 그곳에 그림자 군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모드레드의 대답을 기다릴 필요조차 없다는 듯이.
“기, 기다려! 기다려……!”
아무것도 없는 종말의 겨울 속에 홀로 남겨진 모드레드가, 발악하듯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대답이 들려오는 일은 없었다.
* * *
눈을 감고 있는 데일이, 그대로 눈을 떴다.
대륙 칠검의 자리를 가리기 위한 검의 전각. 그의 앞에는 처절할 정도로 아름답게 얼어붙은 조각상이 있었다. 천검의 자리를 놓고 데일과 맞섰고, 마지막까지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한 7황자 모드레드였다.
“네놈이 감히 황자님의 존체에……!”
귀검 세필리아가 허리춤의 칼자루에 손을 올리며 살기를 뿜어냈다. 마찬가지로 작센 측의 삼검(三劍), 헬무트 경과 마스터 바로, 방랑검 역시 그들의 칼자루에 팔을 뻗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일촉즉발의 대치를 깨트린 것은 데일의 몫이었다.
“모드레드 황자님께서는 아직 이렇게 살아 계시지 않습니까.”
“……!”
“제가 마음먹을 경우, 이 냉기를 거두고 황자님을 되돌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데일이 말했다.
“그럼 당장 황자님의 육체를 되돌려 놓아라. 설령 털끝 하나라도 상처를 입혔다가는 네놈 작센 가(家) 전체가 그 책임을 짊어져야 할 것이니.”
“아, 그럴 수는 없지요.”
귀검 세필리아가 위협하듯 소리를 높였고, 데일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모드레드 황자님께서는 아직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십니다.”
“뭐라고……?”
“얼어버린 육체 속의 의식은, 아직도 저에게 굴복하지 않고 맞서 싸우겠다고 말하고 계시니까요.”
“……!”
청색 마법이 다스리는 것은 결코 얼음 하나가 아니다. 사람의 의식과 정신을 조작하고 세뇌하는 거짓과 책략의 마법.
일찍이 청색의 흑막 ‘아라크네’가 그랬듯이, 사람의 의식을 하나의 자리에 결속하거나 조작하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엿한 청색 마법사로서, 종말의 냉기를 매개체 삼아 모드레드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는 일 역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칠검의 자리를 놓고 정정당당한 승부를 치르고 있습니다. 대전자가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는데, 제가 ‘공격’을 멈추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지금도 모드레드의 의식은 얼어붙은 육신 속에 감금되어 있다. 그리고 바깥세상에서 느끼는 것 이상으로 느리고 지루하며, 영겁에 가까운 고통이 되리라.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데일이기에, 조용히 미소 지었다.
* * *
천검의 자리를 놓고 데일과 모드레드가 결투를 치르는 사이.
세 명의 규칙에 따라, 검의 전각에서는 또 하나의 승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신검의 이름을 손에 넣은 랭커스터 대공이, 그의 수제자 샬롯을 마주하고 있었다.
옛 친우의 어린 딸. 그녀의 몸속에 흐르고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신검의 피였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혈맥(血脈)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 잠재력을 끌어내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몫이다.
그 점에 있어 샬롯 오르하르트는 그야말로 ‘검의 천재’란 말이 부족하지 않았다.
여정 끝에 홀로 천검 랭커스터 대공의 영지에 도착한 샬롯이, 그의 밑에서 ‘진짜 잠재력’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에게는 집념이 있었다.
강해지겠다는 열망.
저 여린 소녀의 몸에 깃들어 있는 그 감정은, 검을 수행하는 이들의 알기 쉬운 호승심이나 각오 따위와 비교를 불허하는 것이었다.
광기에 가까운 집념이었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까지 강해지고자 하느냐고 물었다. 아마 아버지와 조국을 무너뜨린 제국에 복수하기 위해서겠지. 그러나 샬롯의 대답은 무척 뜻밖의 것이었다.
‘주군의 곁을 지킬 수 있는 기사가 되기 위해서.’
아울러 샬롯의 주군이 누구를 말하는지는 의심할 여지도 없는 것이었다.
천검 랭커스터의 아들을 쓰러뜨린 증오스러운 존재, 작센의 ‘검은 공자’였으니까.
그리고 비로소 신검 바델을 이해하는 대륙 제일의 검객에게 아버지의 검을 받았을 때, 샬롯의 성장세는 감히 무엇과도 비교를 불허하는 것이었다.
그 후 ‘오러 마스터’의 경지를 손에 넣은 샬롯을 보았을 때, 랭커스터 대공이 느끼는 감정은 희망이었다.
몰락의 길을 걷게 될 랭커스터 대공 가를 다시 일으킬 기회.
그 앞에서 사사로운 감정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으로서 샬롯 오르하르트는 랭커스터의 검(劍)이고, 빚을 청산할 기회 같은 것은 앞으로도 차고 넘칠 테니까.
아들 미하일의 죽음조차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고 받아들였다. 기실, 지금에 이르러 ‘검은 공자’를 증오하는 사사로운 감정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샬롯의 검끝에서 춤추는 재능을 보고 나서, 랭커스터 대공의 가슴속에는 새로운 야심(野心)이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했다.
* * *
천검의 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다툼, 그러나 검의 전각에서 이루어지는 충돌은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성검의 검주를 자처하는 성처녀 오렐리아가 그곳에 있었다.
세 악마의 피조물이자 거짓의 존재,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순백의 성처녀가 그녀의 검, 성검 뒤랑달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는 황금의 갑주를 두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제국 제1황자이자 황실 직속 철십자 기사 조직의 수장, 호수의 검(Sword of Lake) 랜슬롯.
일찍부터 대륙 칠검에 필적하는 실력을 갖췄다고 알려졌으나, 공식적으로 그가 ‘검의 시험’에 출전해 그 검위를 증명하는 일은 없었다.
그랬어야 할 그가 비로소, 침묵 끝에 칠검의 이름을 얻고자 직접 행차한 것이다.
“시스티나 자매신께서, 작센의 동토에서 잿더미가 되신 성처녀님을 죽음에서 되돌리셨다지요.”
호수의 검이 말했다.
“성처녀님이 여신의 계시를 받은 것은 확실해 보이나, 브리타니아 왕국의 독립은 결코 자매신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성처녀께서는 ‘검은 공자’에게 패배하고 작센의 동토에서 불타셨지요.”
“……우리 같은 자들이 어찌 감히 여신의 깊은 뜻을 헤아리겠습니까.”
“그렇지요.”
제1황자 랜슬롯이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기에 가령, 이 자리에서 성처녀께서 패배하고 성검을 제가 손에 넣게 되어도…… 거기에는 필시 우리로서 이해할 수 없는 ‘자매신의 뜻’이 존재하는 걸 겁니다.”
순백의 성처녀 오렐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이 여신의 뜻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여신이 정녕 사람의 뜻을 아득히 초월하는 불가해(不可解)의 존재라고 가정할 경우, 사람이 신을 믿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필시 여신께서는 사람을 사랑하며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 모종의 계획을 준비하고 계시리라.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나아가 가짜에 지나지 않는 자기 존재를 긍정하며 성처녀가 검을 고쳐 잡았다.
“각오하십시오.”
자신의 거짓이, 진실보다 더욱 진실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 * *
검의 전각 일대에 오러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러나 강력한 고대의 아티팩트와 마법이 결계로 작동하는 이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행해지는 싸움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는 없다.
성검 뒤랑달을 쥐고서 순백의 성처녀가 땅을 박찼다.
샬롯 오르하르트가 작센의 대검을 쥐고 쇄도했다.
신검 랭커스터 대공이 그녀에 맞서 검을 뽑았고, 호수의 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카앙! 카앙!
네 자루 검이 저마다의 목적을 갖고 격돌했다.
그 와중, 침묵 속에서 ‘검은 공자’가 눈을 감았다.
데일의 앞에 얼어붙어 있는 모드레드의 육신, 그 육신 속에 갇혀 있는 그의 의식을 향해서.
모드레드의 체내에 깃들어 있는 냉개를 매개체 삼아, 서로의 의식을 잇는다.
종말의 겨울이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히, 히히, 히히……!”
그곳에서, 어느덧 흑금의 갑주마저 사라지고 알몸 차림이 되어 있는 모드레드가 벌벌 떨고 있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그저 웃음을 터뜨릴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 그림자 군주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제발,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그에게 지켜야 할 프라이드나 긍지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애걸하는 노예처럼, 데일의 발밑에 고개를 조아리고 입맞춤할 따름이었다.
“부디 저를 이 지옥에서 해방시켜 주십시오!”
모드레드가 고개를 처박고 필사적으로 애걸했다. 그 모습을 보며 데일이 물었다.
“충성스러운 그림자의 기수가 될 준비는 되어 있나?”
필사적이다 못해 처절할 정도의 대답이 돌아왔다. 때가 되었다는 듯, 데일이 조용히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등 뒤에서 청색의 나비들이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