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 * *
사상의 세계가 사라지고, 그림자 군주가 그곳에 있었다.
칼날 산맥의 정상에 세워진 검의 전각, 대륙 제일의 검을 가리기 위해 검들이 모여 있는 그 자리에.
“……!”
흑금의 옥좌에서 그림자 군주가 말했듯, 무릎 꿇고 충성하는 제국의 검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살아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림자 군주이자 ‘검은 공자’를 향해 충성하는 데 있어, 생명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으니까.
죽음의 기사.
냉기와 어둠이 깃들어 있는 육골(肉骨)들, 우주의 겨울이 깃들어 있는 데스나이트의 군세였다.
“어, 어떻게……! 그 수많은 오러 마스터들을!”
그 모습을 보고 브란덴부르크의 필립이 힘없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귀검 세필리아 역시 조용히 숨을 삼켰으나, 그녀를 비롯해 두 황자는 결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침묵할 따름이다.
“역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나.”
“……송구합니다, 랜슬롯 황자 저하.”
“아니, 경의 잘못이 아니다.”
귀검 세필리아가 고개를 숙였고, 제1황자 랜슬롯이 고개를 저었다. 제7황자 모드레드가 말을 받았다.
“어느 머저리 새끼가 터무니없는 헛소리를 지껄였는지 몰라도, 잘못은 그 새끼에게 물어야지.”
“화, 황자 저하!”
필립이 당혹을 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곁에서 검의 시험을 주관하는 성 막달레나 기사들 역시, 일말의 기대가 무너지고 ‘역시 이럴 줄 알았다’는 기색을 감추지 않고 있다.
바로 그때였다.
“서, 성처녀시여!”
필립이 무엇이 생각났다는 듯 소리를 높였다.
“성처녀께서는 일개 농노 출신이시지요!”
“…….”
“그러나 우리 자랑스러운 브란덴부르크 백작 가는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대대로 성검 듀랑달을 쥔 유서 깊은 전통을 갖고 있지요! 그렇기에 성처녀께서 저와 혼약을 하는 것으로, 우리는 그 무엇과 비할 바 없는 동맹이 될 것입니다!”
일개 농노 출신에게 자랑스러운 백작 가의 영주가 소리쳤다.
“성처녀와 저, 우리는 함께 성검의 그릇에 어울리는 최고의 짝이 될 겁니다! 우리의 아이 역시 그렇겠지요!”
“…….”
“그러니 부디 제가 당신의 구세주가 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이 백작 가의 위세가 그대의 것이 될 겁니다!”
그야말로 일개 귀족이 노리개로 쓸 농노를 구슬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듣고 있는 데일조차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의 추태였다. 그러나 순백의 성처녀에게 있어서는 결코 추태 정도로 끝나지 않으리라.
스릉.
“히익!”
성검 뒤랑달이, 그대로 필립의 목덜미를 향해 겨누어졌다.
“그 이상 헛소리를 지껄였다가는, 도살장에 매달린 수퇘지 신세가 될 겁니다.”
일말의 자비와 자애도 깃들어 있지 않은 목소리였고, 필립의 표정이 창백하게 얼어붙었다.
“처, 천검! 천검 랭커스터 대공께서는 어떠십니까!”
다시금 필립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우리는 공공의 적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저 사악한 ‘검은 공자’가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을 빼앗았지요! 미하일 공자님, 그리고 저의 아버지! 저 증오스러운 자를 앞에 두고 어찌 그리 평정을 지키실 수 있으신 겁니까!”
그러나 천검은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표정으로 침묵할 따름이다.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이, 그러나 그 이상 헛소리를 지껄였다가는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는 살기를 담아서.
“이 이상 의미 없는 다툼으로 힘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침묵 끝에 천검 랭커스터 대공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이 자리에 우리가 모여 있는 것은 자신의 검위를 증명하기 위해서, 나아가 비어 있는 ‘두 자루 검’의 이름에 적합한 자를 가리기 함이겠지요.”
“그렇습니다, 랭커스터 대공 각하.”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고, 천검이 흘끗 주위를 둘러보았다.
신검이 죽고 나서 공식적으로 대륙 제일검의 무위를 가진 최강의 기사.
“저는 이 자리에서, 신검(神劍)의 검위에 도전하고자 합니다.”
그가 다시금 검을 뽑았다. 하늘의 검. 장미 전쟁이 벌어지고 아들이 죽을 때에도, 아울러 ‘검은 공자’가 요크에 붙어 그의 계략으로 랭커스터 가를 몰락으로 이끌어갔을 때도, 하늘의 검은 마지막까지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천검이 바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통일 전쟁 당시 하나밖에 없는 친우 ‘신검’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그 후 결코 자신의 검을 영욕(榮慾)의 도구로 쓰지 않겠다는 맹세 덕이었다.
설령 그 맹세가 그의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할지라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네 자루 검들이여, 그대들 중 달리 저와 검을 맞댈 자가 있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천검 랭커스터 대공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귀검 세필리아를 비롯해 광검, 살검, 방랑검이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신검의 자리에 도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칠검의 이름을 가진 검객 중에서밖에 결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누구도 감히 랭커스터 대공의 검에 거스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이쿠, 새로운 신검 나으리 앞에서 싸게 대가리를 박겠습니다.”
살검 마스터 바로가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이것으로 다시 천검(天劍)과 성검의 자리가 공석이 되었군요.”
어느덧 이 상황을 주도하는 처지가 되어 ‘랭커스터 대공’이 물었다.
“기존의 검 중에서 새 검위를 바라시는 자가 있습니까?”
“허허, 가진 새끼들끼리 감투 하나씩 나눠 먹는 꼴을 보니 참 흐뭇하구려.”
그 모습을 보고 마스터 바로가 재차 낄낄거렸다. 그 말대로다. 기존의 네 자루 검에게 있어, 굳이 그들의 자리를 놓고 새 검위를 넣을 이유는 없었으니까.
“그럼 비어 있는 두 검위를 손에 넣고자 하는 이들이 있습니까?”
다시금 신검 랭커스터 대공이 물었다.
검의 전각에 남아 있는 시험자들…… 성처녀 오렐리아를 비롯해 두 황자, 아울러 데일과 샬롯을 향해서.
그리고 그때였다.
스릉.
“저, 샬롯 오르하르트.”
비로소, 침묵을 깨트리고 샬롯 오르하르트가 그녀의 검을 뽑아 들었다.
“자랑스러운 신검 바델 오르하르트 경의 딸로서, 대륙 칠검의 일좌이자 ‘천검의 검위’에 감히 제 이름을 올리고자 합니다.”
비로소 비어 있는 자리에 입찰자가 나타났다. 데일이 흘끗 두 황자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두 명 중에서 샬롯의 검위를 손에 넣으려는 자는 없었다.
“작센의 데일.”
그렇기에 데일 역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저 역시 ‘천검’의 검위에 제 이름을 올리고자 합니다.”
“……!”
철이 들기도 전부터 함께 작센 공작성에서 검을 맞댔고, 나아가 데일 앞에 충성을 맹세한 여기사. 그 후에는 주군의 곁을 떠나 자신의 검을 갈고닦은 숙녀를 향해서.
설령 그 과정이 아무리 졸속 행정이라도, 칠검의 이름을 짊어지는 의미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굳이 ‘검의 시험’이라는 그럴싸한 자리 없이도, 수시로 칠검을 상대로 자신의 검을 증명하고자 하는 기사들의 도전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전장에서도 이목이 쏠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귀결이리라.
그러나 제국 제일의 천재 ‘검은 공자’가 그러하듯, 신검의 피를 잇는 샬롯 오르하르트 역시 예외가 아니리라.
그녀에게는 검을 쥘 자격이 있었다.
“천검의 검위에 샬롯 오르하르트 경, 그리고 작센의 데일 공자님이 적을 올렸습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랭커스터 대공이 말했다.
“그럼 다음으로, 성검의 자리에 이름을 올릴 자가 있습니까?”
그 물음에 일말의 주저도 없이 성검의 검주, 오렐리아가 검을 뽑았다.
그와 동시에 또 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국 제1황자, 랜슬롯.”
비로소 쌍두룡의 표식을 새겨넣은 제국 서열 1위의 황자가 입을 열었다.
“나 역시, 성검의 검위에 이름을 올리도록 하겠다.”
시스티나 여신이 축복을 내렸다고 일컬어지는 여신의 검.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나.’
그제야 비로소 어째서 제1황자 랜슬롯이 검의 시험에 참여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황제 직속의 기사 조직, 철십자 기사들을 이끄는 그의 무위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비록 스스로 칠검의 이름에 욕심을 내지 않았으나, 그의 검이 칠검의 경지에 필적하리란 점에 대해서는 모두가 공감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비로소 그 남자가 침묵을 깨트렸다.
신의 검을 손에 넣는다는 행위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까닭에.
“천검의 검위를 놓고 두 명, 성검의 검위를 놓고 두 명이 다투게 되겠군요.”
유일하게 아무 저항 없이, 신검(神劍)의 이름을 손에 넣은 랭커스터 대공이 입을 열었다.
“아니, 잠시.”
바로 그때였다.
“생각해 보니까, 나라고 손가락이나 빨고 있을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제7황자 모드레드가 조롱하듯 입을 열었다.
“천검의 자리에, 내 이름 역시 올리도록 하겠다.”
그 의도를 헤아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처음부터 데일의 거취가 정해질 때까지 지켜보고 나서, 그쪽에 손을 올릴 셈이었으리라.
“솔직히 말해서, 신검의 딸이니 뭐니 하는 계집 따위에게 흥미 따위는 없다.”
“……!”
“그러나 거기 있는 ‘검은 공자’에게 좀 볼일이 있어서 말이야.”
“기꺼이.”
데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덤덤하게 웃었다.
“시험자들이 홀수, 그것도 정확히 세 명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시험을 수행하는 규칙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겠지요.”
“세 명의 규칙(Rule of Three).”
신검 랭커스터 대공이 말했고, 데일이 일말의 지체도 없이 대답했다.
“셋 중 둘이 싸우고, 나머지 하나는 신검이 직접 상대함으로써 체력을 소진시키는 것이지요.”
그 후 대결에서 승리한 자와 신검이 상대해준 자가 다시 맞서, 최후의 하나를 가린다. 어느 하나가 불공평하게 체력을 비축하지 못하도록.
“그럼 누가 신검과 맞서고, 누가 직접 결투를 수행할지 헤아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데일이 싸늘하게 고개를 저었다. 조용히 결의를 다지고 있는 샬롯을 뒤로하고, 그대로 모드레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떠십니까, 모드레드 황자님.”
“처음부터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데일이 덤덤하게 그의 검을 뽑아들었다. 칠흑의 마검, 기아.
동시에 나머지 칠검들이 그러하듯, 이 정도 경지의 검객들에게 있어 그들의 무기는 결코 오러 하나가 다가 아니었다.
‘검은 공자’의 등 뒤에서 충성하는 어둠과 냉기의 데스나이트들이, 그들의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비로소 일말의 가감도 없는 전력을 내보이기 위해 심장의 서클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슈브의 촉수를 통해 이어진 마나 회로를 통해, 오러 하트 역시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흑적청의 마력과 오러가, 그림자 군주의 발밑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쳤다.
일찍이 작센의 마왕령에서 벌어진 십자군 전쟁 당시, 제7황자 모드레드를 기억하고 있다. 적어도 그때 당시의 그는 데일의 상대가 아니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지금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으리라.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방심의 이유가 될 수는 없으리라.
“부디 그날의 트라우마를 잘 극복하셨길 바랍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데일이기에, 싸늘하게 조소했다.
“마계의 어둠 앞에서 부대 전부를 잃고, 황자님 홀로 살아남아 비참하게 도망치신 악몽을.”
“…….”
그 말에 일순 모드레드의 표정에서 감정이 사라졌다.
그날, 마왕령의 끝자락에서 조우한 악신(惡神)의 모습이 무심코 떠올랐다.
손짓 하나로 그의 부대 전부를 몰살하고 저 천상 너머로 끌고 가버린 존재.
─ 어째서 너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냐, 용의 아이야.
─ 아, 이것 참. 용이 아니었나……. 그것도 나쁠 것 없지.
─ 그림자의 침묵은 여기까지다. 돌아가라, 그림자의 아이야. 그리고 우리를 위한 때를 기다려라.
그날, 광기의 미사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불사공 프레데릭을 떠올렸다. 그의 입에서 솟은 끔찍한 촉수가 거머리처럼 모드레드의 목구멍 속으로 미끄러지는 감각을 떠올렸다.
촤아악!
제7황자 모드레드의 목구멍에서, 칠흑의 촉수가 튀어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