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 * *
검이란 결국 좋은 스승과 교육, 재정적 뒷받침이 되어 있어야 빛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이곳에 모여 있는 강자들 역시 그들의 검(劍)을 벼리기 위해 천문학적 투자를 쏟았을 것이며,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그들 모두 이름 있는 제국 유수의 귀족 출신이란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 귀족에게 있어 제국 황자의 직명을 거스를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제국이 추구하는 폭력의 시대정신 그 자체였으니까.
“아,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시게나. 작센의 ‘검은 공자’님.”
제7황자 모드레드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엇을 말이지요?”
“이거는 말이야, 딱히 우리가 동맹을 먹고 네 뒤통수를 치려는 게 아니라고.”
모드레드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너와 형님의 말마따나, 이 지루하고 지긋지긋한 시험을 조금 더 ‘빠르게’ 진행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지.”
“…….”
“이 중에서 ‘검은 공자’의 모가지를 따는 놈에게는, 대륙 칠검의 일좌(一座)를 즉시 하사할 것이며, 그 기사와 가문 전체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영광을 하사해 주겠다. 어때, 마음에 들지? 이 제의를 수행하지 않을 새끼는 당장 짐 싸서 산을 내려가라.”
암묵의 겁박. 그와 동시에 모드레드가 데일의 목에 천금과 영예를 내걸었고, 그 의미를 헤아린 데일이 차갑게 웃었다.
“공자님……!”
“너희들이 움직일 필요는 없다.”
나아가 작센의 진영을 자처하는 헬무트 블랙베어 경을 슬쩍 제지하며, 고개를 저었다. 광검과 방랑검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의 힘을 빌릴 가치조차 없다.
“모드레드 황자님의 제의를 받들겠습니다. 저 역시, 수십여 명이나 되는 어중이떠중이들의 싸움을 일일이 보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지요.”
그렇게 슬며시 시험자들을 도발하며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칠흑의 마검, 기아였다.
기실, 오히려 데일로서는 이 상황이 내심 호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검을 고쳐 잡고 데일이 ‘오러 하트’에서 약동하고 있는 삼색의 오러를 체내에 흡수시켰다.
기사들 역시 사람의 육체와 그 구조에 대해서는 무지하지 않다. 그러나 그 육체는 유전자와 세포 조직의 결합이며, 그 미시적 개념마저 이해하고 있을 리가 없다.
사람의 육골이란 헤아릴 수 없는 입자들의 조합이며, 그렇기에 오러가 육체에 깃들고 있다는 것은 곧 그 입자 사이사이의 공백을 메꾸고 흡수하는 과정이란 것을.
이계의 심상을 투영하는 대상은 마법 하나가 다가 아니다. 검과 육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
그날, 세 자루 검의 혹독하기 그지없는 수행 속에서 ‘오러 마스터’의 경지를 손에 넣은 데일이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사방에서 십수 명 남짓의 시험자들이 일제히 오러 블레이드를 펼치며 쇄도했다.
카앙!
휘둘러지는 시험자 하나의 일검을 막아내고, 그의 품속으로 미끄러지듯 파고들었다.
“……!”
푸욱!
칼날이 그의 가슴을 찢고 튀어나왔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었다.
첫 희생자의 등을 찢고 튀어나와서, 그대로 또 하나의 시험자를 향해 내리꽂혔다.
일검(一劍)에 두 명의 기사들이 절명했다.
그러나 여전히 ‘검은 공자’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이들의 숫자는 적지 않다.
“하나가 아니다. 모두가 함께 힘을 합쳐서 쓰러뜨려라. 칠검의 자리는 둘째 치더라도, 너희 모두에게 남김없이 돌아갈 천금의 재화와 명예를 황실의 이름으로 하사해 줄 테니까!”
제7황자 모드레드가 불을 지피듯 비릿하게 웃었고, 기사들이 꿀꺽 숨을 삼켰다.
그때와 같다.
홀로 흑색 마탑에서 ‘탑의 시험’을 치렀을 당시, 배틀로얄 형식으로 벌어져야 할 생명점 쟁탈전의 응시자 모두가 합심해 데일 하나를 공공의 적으로 삼았을 때.
“아바타를 쓰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바로 그때, 대치 속에서 데일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솎아내기라 할지라도, 저 시험자들 역시 그들의 목숨을 걸고 사투를 펼치는 중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기사로서의 전력(全力)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닐지요.”
마치 이 상황이 자기 손바닥 위에 있는 것처럼 여유를 잃지 않고서.
“네놈도 아바타를 쓸 생각이냐?”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은 저 역시 예외가 아니지요.”
데일이 차갑게 웃었다.
“그리고 저는 지금부터 ‘마력’을 사용할 겁니다.”
웃고 나서 데일이 싸늘하게 소리쳤다. 그 말에 곳곳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뭐, 뭐라고……?”
“마력이라니! 이 비열하기 그지없는 놈이!”
뒤이어 시험자들이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소리를 높였고, 데일이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아바타를 쓴다는 것은 곧 검의 전력을 사용하는 것과 같지요. 그리고 대륙 칠검의 검위를 가릴 정도의 강자들에게 있어, 그 힘이란 것은 결코 ‘오러 하나’가 아닐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세필리아 경.”
제7황자 모드레드, 나아가 그의 뒤에 있는 ‘귀검 세필리아’를 향해서.
“…….”
“마법사로서 그대들을 상대하려는 게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저는 오러를 쓰는 검사니까요. 그저 마력도 사용하는 겁니다. 귀검 세필리아 경이 그러하듯 말입니다.”
“네놈이 어떻게……!”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법이지요.”
작센의 데일이 귀검 세필리아의 정체를 알 방법은 없다. 그러나 이계의 용사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가 가진 힘의 정체를 입에 담았고, 세필리아의 표정에 싸늘하기 그지없는 귀기가 어렸다.
“그 말이 옳다.”
그렇기에 제7황자 모드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있는 모두, 너희들이 ‘검은 공자’를 상대하는 데 있어 전력을 다할 것을 허락하마. 설령 그것이 아무리 비열하고 치사한 사도(邪道)라 해도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니.”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그 말을 듣고 ‘검은 공자’가 차갑게 웃었다. 이윽고 그를 상대하고 있는 수십여 명 남짓의 시험자들이, 저마다 그들의 검이 쌓아 올린 사상의 극의를 투영하기 시작했다.
“검의 시험이 참으로 다행스러운 점은, 승리를 꼭 ‘모두의 앞에서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지요.”
검을 고쳐 잡으며 데일이 웃었다.
“……!”
일순 그 의미를 헤아린 귀검 세필리아의 표정이 경악으로 얼어붙었다. 그러나 그보다 빠르게, 데일을 중심으로 아바타를 전개하고 있는 시험자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일찍이 ‘검은 공자’가 펼치고 있는 사상의 세계, 희고 어두운 세계 속으로.
“황자님……!”
남겨진 세필리아가 당황하며 무어라 입을 열려 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였다.
“어허, 이 아줌마도 참.”
마스터 바로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어느새 그가 뽑아들고 있는 검에 핏빛 오러를 실어, 당장이라도 살기를 흩뿌릴 것 같은 기백을 내뿜으며.
“모두가 보았다시피, 데일 공자님께서는 검(劍)을 쥐고 오러를 쓰고 계시지 않습니까. 거 시팔, 이미 오러 마스터가 됐는데 사상의 세계를 펼치나 귀신을 부리나 좆도 아무래도 좋은 일 아니겠소?”
“그 말이 맞소이다. 당장에 우리 칠검 모두가, 순수하게 검(劍) 하나에 의지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소.”
방랑검이 어깨를 으쓱이며 거들었다.
귀검 세필리아가 뭐라 말을 이으려다 말고 침묵을 지켰다.
그녀 정도의 강자, 아니, 적어도 이곳에 있는 칠검이 데일이 펼친 ‘사상의 세계’에 침투하는 것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으리라. 사상의 세계는 결코 외부의 침입을 일절 배제하는 콜로세움이 아니다.
사상을 검에 실을 수 있는 자는 누구라도 능히 그것을 찢고 입장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귀검 세필리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금쯤 저 세계 속에서 펼쳐지고 있을 결말을 헤아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니까.
동시에 들어가기는 쉬워도 나가는 것은 그렇지 않다. 천하의 귀검조차 함부로 엿볼 수 없는 무저갱. 역설적으로 그녀 역시 같은 마법사이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그의 앞에 있는 그림자 군주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
그것은 당초 필립이 제의를 꺼냈을 때, 세필리아가 상상한 그릇을 아득히 뛰어넘는 성질의 것이었다.
제국 제일의 천재란 말조차 부족한 괴물.
그것이 그림자 군주의 존재였고, 바로 그 존재가 자신의 세계를 펼치고 있었다.
* * *
그것은 이미 전투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희고 어두운 겨울밤. 태고의 어둠과 시린 냉기가 깃들어 있는 우주의 겨울 속에 성채가 솟아 있었다.
칠흑의 촉수로 이루어진 성채였고, 바로 그 성채가 무기가 되어 아바타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기사들을 유린하고 있었다.
일찍이 불사공 프레데릭이, 모드레드 황자가 이끄는 성전 제1부대를 절멸시켰듯이.
신(神)이 그곳에 있었다.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신이 아니었다. 그곳에 있는 신의 존재는 명백하게 인간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신이 생각하는 ‘인간’과 생물학적 정의 속의 인간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차이가 있었다.
설령 슈브가 인간을 사랑하는 신이라 할지라도, 그녀에게 있어 그들은 결코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사, 살려줘!”
“아아아악!”
“자, 자매신이시여! 히히, 히히히!”
흑금의 성채, 그림자 군주는 바로 그 옥좌 위에 앉아 있었다.
바닥에 그의 검을 내리꽂고, 미동조차 하지 않으며.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표정으로 성의 불청객들을 내려다볼 따름이었다.
성의 그레이트 홀에 있는 헤아릴 수 없는 오러 마스터의 기사들이, 일방적으로 먹잇감이 되어 전락하고 있었다. 데일의 검(劍)이 아니었다. 심지어 마력이나 사령술의 피조물조차 아니었다.
그저 그림자 군주의 곁에 있는 신의 놀잇감이 되고 있었다.
─ 꺄하하하핫!
비명이 울려 퍼졌고, 처절하기 그지없는 저항 끝에 울음을 터뜨리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림자 군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리석은 자들.”
흑금의 옥좌 위에서, 그림자 군주가 입을 열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겨우 이 정도였나?”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목소리로.
“너희들이 정녕 이 대륙 제일의 검(劍)을 자처하는 강자들이란 것이냐?”
대답 같은 것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 성채의 석조, 카펫, 장식 하나하나를 이루는 것은 결국 『검은 산양의 서』였고, 동시에 데일이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로 존재하는 이상 규칙을 어길 여지 따위는 없었다.
저항 같은 것은 의미가 없었다. 설령 그들이 검의 극의, 아바타에 이르러 있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검의 시험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 그중에서도 남아 있는 다섯 자루 검들.
그들의 경지는 결코 검 하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당장 살검 마스터 바로가 위상을 조작하는 이능(異能)을 가지고 있듯이. 귀검 세필리아가 그러했고, 광검 헬무트도 예외가 아니리라.
그렇기에 이 싸움은 결코 순수하게 ‘오러를 사용하는 검사들의 싸움’이 아니다.
알고 있기에, 데일이 기꺼이 마법사로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따름이다.
어차피 이들의 생사 따위에 신경을 쓰는 이들은 없다.
결국 검의 시험에서 진정으로 서로의 실력을 맞대는 것은 열 손가락으로 꼽을 강자들이고, 지금 데일이 맡은 역할은 그저 손가락 밖의 버러지들을 걸러내는 일이니까.
“무릎 꿇어라.”
흑금의 옥좌 위에서, 데일이 말했다. 동시에 그들을 짓밟아야 할 촉수와 악의가 일제히 정지했다.
살아남아 있는 이들, 그 숫자는 3할도 채 되지 않으리라.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 이곳에서 ‘검은 공자’에게 거스르고 살아남을 확률 따위가 없다는 것은 뼈저릴 정도로 이해했으리라.
쿠웅!
“제, 제발 살려주십시오!”
기사 하나가 무릎을 꿇고 애걸했다. 자신의 검을 세로로 내리꽂고 기사의 신종(臣從)을 자처하며.
그들 앞에서 그림자 군주가 덤덤히 침묵을 지켰다.
“살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
침묵 끝에 데일이 되물었다.
“마,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라도……!”
“무엇이라도 하겠습니다! 제발, 제발 목숨을 살려주십시오!”
“펴, 평생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도망칠 수 없는 절망을 뒤로하고, 기사들이 애걸하듯 소리쳤다. 그 말에 비로소 그림자 군주가 미소 지었다.
무척이나 불길한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