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00화 (200/301)

200화

* * *

살검 마스터 바로의 아바타.

어릿광대(Pierrot)가 그곳에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피에로 마스크를 쓰고 있는 어릿광대였고, 그의 손가락에는 헤아릴 수 없는 실들이 매달려 있었다. 핏빛의 오러를 머금고 있는 강사였다.

그리고 그 와이어 하나가, 데일의 오러 블레이드를 칭칭 휘감아 막아내고 있었다.

“어릿광대라. 어느 의미에서는 참 그럴싸하네.”

그 모습을 보며 데일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나 마스터 바로는 웃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로 모가지가 뎅강 날아가도 모르는 일이라오.”

피에로 마스크의 어릿광대가 말했다. 웃지 않는 광대. 눈동자 밑에는 백색과 흑색의 눈물이 잉크로 그려 넣어져 있었다.

마스터 바로가 두 팔을 움직였다. 그의 손가락 하나하나에 묶여 있는 핏빛의 와이어가 시퍼런 살기를 머금고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공자님……!”

“두 명 모두, 여차할 때 제 목숨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데일이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바타를 전개하고 있는 대륙 칠검, 그것도 살검을 상대로는 데일조차 100%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다. 하물며 마력과 그림자 갑주의 아바타도 없이 익숙하지 않은 오러의 감각을 되새기고 있는 와중에는 더더욱.

그러나 딱 이 정도가 좋다. 삶과 죽음의 경계 사이에 서지 않고서는, 그 시절의 감각을 떠올릴 수 없으니까.

용사였을 시절의 자신을 되찾고, 그림자 군주가 아니라 ‘검은 공자’의 아바타를 손에 넣는 것. 오러 마스터가 되지 않고서는 절대로 ‘검의 시험’에 있는 강자들과 맞서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

당장 데일의 앞에 있는 살검, 어릿광대가 그러하듯이.

어릿광대의 손에 묶여 있는 핏빛의 실이 휘몰아쳤다. 저 와이어의 절삭력에 대해서는 결코 의심할 바가 아니다. 사방에서 죽음이 휘몰아치는 것 같은 섬뜩함이 등줄기를 훑었다. 그러나 마법이나 암혈의 갑주 따위를 이용해 저 일격을 막아낼 수 없다.

오로지 검이다. 검 하나로, 나아가 데일의 세포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는 오러와 육체를 믿을 수밖에 없다.

카앙!

혈사(血絲)가 사방에서 휘감겼고, 그 앞에서 데일이 검무를 추었다. 손에 들린 흑색 오러 블레이드 사이사이로 마그마처럼 이글거리는 적색이 새겨졌고, 휘둘러지는 일검 하나하나에 불꽃이 폭발하는 것 같은 파괴력을 싣고 혈사를 잘라냈다.

촤아악!

그러나 와이어가 잘렸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어릿광대의 손에는 새로운 혈사가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혈사가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쇄도하기 시작했다.

빨랐다. 역습을 넣을 틈조차 없다. 그리고 그때였다.

데일의 코앞에서 휘둘러지는 혈사를 막아내려 검을 휘두르기 무섭게, 등 뒤를 따라 살기가 내달렸다.

‘위상 조작……!’

동시에 데일이 오러 하트에 담겨 있는 마나를 마지막 방울 하나까지 쥐어짰고, 오러 덩어리가 폭발하듯 휘몰아쳤다.

카앙!

청색의 오러를 강기(剛氣)의 형태로 응축시켜, 아슬아슬하게 마스터 바로의 기습을 막아냈다.

‘역시 보통이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교묘하게 휘몰아치는 혈사에, 위상 조작의 능력이 더해진 암살자의 검. 정말로 그가 필사(必死)의 마음가짐을 갖고 덤빌 경우, 마력을 쓰지 않는 데일의 목이 잘리는 것은 고작 몇 초로 족하리라.

“기사 대 기사로서 나에게 해줄 어드바이스 같은 것은 없나?”

칼자루를 고쳐 잡고 데일이 물었다.

“허허, 내 꼴을 보고도 아직도 ‘기사’라는 말이 나오쇼?”

마스터 바로가 어이가 없다는 듯 낄낄거렸다.

“다들 나를 두고 기사의 수치라고 말하지. 자기 주군 등에 칼을 박아넣은 천하의 쌍놈 새끼라고 말이오. 그래서 생각했다오. 기왕 그렇게 되어버린 거, 진짜 쌍놈의 검(劍)을 보여주겠다고 말이오.”

어릿광대는 곧 마스터 바로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상의 형태 그 자체다.

“피차 다를 것이 있나.”

데일이 대답했다. 비록 자신의 정체를 입에 담을 수는 없었으나, 그에게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랬나.”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데일이 실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무엇이 그리 웃기오?”

마스터 바로의 말이 데일에게 가져다준 것. 오러의 감각을 되살리는 방아쇠가 비로소 데일의 손에 쥐여 있었다.

기사가 아니었다.

오러를 쓴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처음부터 데일과 살검 마스터 바로는 같았다.

이계의 용사, 제국 제일의 암살자.

사냥개와 어릿광대.

처음부터 이계의 용사는 기사가 아니었다. 데일의 앞에 있는 어릿광대가 그러하듯이. 마찬가지로 데일이 사용하는 오러나 마력은 기사의 고결함이나 마법사의 마도(魔道)를 위함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철저하게 제국의 적들을 사냥하기 위한 것이었다.

깨달음과 동시에 오러 하트에 담겨져 있는 마나가 폭발하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

데일이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비로소 자신의 검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깨닫고서.

사냥을 위한 검이었다.

“호오.”

일전하는 공기 속에서 마스터 바로가 흥미롭다는 듯 숨을 삼켰다.

공기가 일전했다. 정확히 무엇이 달라졌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타앗!

체내의 오러를 폭발시키며 데일이 땅을 박찼다.

어릿광대를 향해 사냥개의 검이 휘둘러졌다.

* * *

그 시각, 랭커스터 공작성.

천검(天劍)의 별호를 가진 기사, 랭커스터 대공이 그곳에 있었다. 장미 전쟁에서 패배하고 차남 미하일을 잃었으며, 요크 가의 꼭두각시로 거듭나 몰락 일로를 걷게 될 랭커스터 가 최후의 기둥이.

믿음직스러운 아들 미하일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가 허리춤의 칼자루를 뽑았다.

스릉.

신검 바델 경에 가장 가까운 기사라 일컬어진 하늘의 검. 그의 칼끝에 서린 서슬은 여전히 시퍼런 빛을 내뿜고 있었다.

“자랑스러운 랭커스터의 역사도, 나의 대(代)에서 끝이 나겠지.”

랭커스터 대공이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제국에 충성을 바친 대가가 결국 이것이었나.”

무심코 옛 친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랭커스터 가는 전쟁에서 제국의 기수를 자처하며 검을 뽑았고, 그와 함께 검의 길을 수행한 친우의 조국이 짓밟히고 멸망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기사, 신검 바델 오르하르트 경.

우정보다도 중요한 것은 조국을 향해 바치는 충성이었다. 그러나 충성의 대가가 이것이다.

장미 전쟁에서 황실은 랭커스터 가의 몰락을 방조했고, 요크 가에 패배해 전부를 잃게 되었다. 애초부터 황실이 공작 가에 보내준 전력 같은 것은 구색 맞추기에 불과했으니까.

훗날 장미 전쟁의 실체, 요크 가에서 활약한 것이 ‘검은 공자’라는 사실을 깨달아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모두 나의 업보겠지.”

친우의 조국이 쑥대밭이 되고, 그가 일평생에 바쳐 추구한 검마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랭커스터 대공이 겪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과업이었다.

“이 검이, 너에게 있어 얼마의 속죄가 될지는 모르겠구나.”

랭커스터 대공이 씁쓸하게 입을 열었고, 그의 칼끝이 창백한 서슬을 빛냈다.

공식적으로 신검 바델 경의 검술에 대해 적혀 있는 기록은 모조리 말소되었다. 공식적으로는 그러했다.

그러나 그 기억마저 사라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곳까지 잘 찾아왔다, 신검의 딸이여.”

천검이 말했고, 신검의 딸 ‘샬롯 오르하르트’가 무척이나 복잡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데일의 곁을 떠나서 홀로 기약 없는 여정을 펼쳤고, 그 끝에 샬롯이 도착한 곳은 천검 랭커스터 대공의 땅이었다. 성장하는 것은 데일 하나가 아니다. 설령 샬롯이 주군의 곁을 떠나 있다 할지라도 다를 것은 없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일찍이 ‘검은 공자’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겨놓은 랭커스터 가의 영지에서 샬롯의 여정은 끝을 맺었다.

천검 랭커스터 대공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러나 달라질 것은 없었다.

“아버지의 검을 계승할 각오는 되어 있느냐?”

“……예.”

천검 랭커스터 대공이 물었고,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검의 검을 따라 흐드러진 보랏빛이 깃들기 시작했다.

신검 바델 오르하르트가 펼친 최강의 검술, 매화검(Sword of Blossom)이었다.

* * *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다섯 손가락의 물집이 터지고 피가 철철 쏟아질 정도가 되어서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침 해가 뜰 때부터 새벽녘 어둠이 내리고, 박명(薄明)의 빛이 동녘 하늘 너머에서 고개를 뜰 때까지.

아버지를 잃고 나서, 그날 이래 백작 가의 망나니 ‘필립 브란덴부르크’는 하루도 검의 수행을 빼놓지 않았다.

구심점을 잃은 성 막달레나 기사 대다수는 그들 조직을 탈퇴해 새로운 주군을 향해 떠나갔고, 그 까닭에 백작 가의 상황은 그야말로 ‘몰락 귀족’이란 말이 부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그의 곁을 지켜주는 이들이 있었다.

성검사를 위해 충성의 서약을 바친 이들이었고, 그들이 기꺼이 필립의 곁을 지켜주었다.

재능도 없고 무엇 하나 가진 것 없는 필립이었으나, 그럼에도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새로운 성검(聖劍)이 벼려졌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그리고 그 성검이 패배하고 잿더미가 되어버린 성처녀를 부활시켜 검주로 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백작 가의 망나니 필립은 좌절하지 않았다.

성검을 쥘 수 있는 최후의 기회, 튜토니아 기사국에서 열리게 될 ‘검의 시험’이 남아 있었으니까.

그 자리에서 증명할 것이다. 성검에 어울리는 것은 거짓의 성처녀 따위가 아니라 성검사의 아들, 바로 자신이란 것을.

* * *

“튜토니아 기사국에서 검의 시험이 시작될 겁니다.”

백색 마탑과 교회의 정점에 서는 자, 천상과 빛의 군주 ‘천상공’이 말했다.

제국의 황제를 향해 충성하는 거짓의 기수.

그 말에 성검 뒤랑달을 쥐고 있는 거짓의 성처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이 그 무엇과 비할 바 없는 순백의 갑주를 둘러쓰고서.

“부디 그대에게 자매신의 자비와 자애가 함께하기를.”

천상공이 말했고, 순백의 성처녀 오렐리아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녀의 몸에 묶여 있는 청색 거미줄을 뒤로하고 그녀의 신념을 수행하기 위해서.

* * *

그로부터 얼마 후, 데일의 열여섯 살 생일이 지날 무렵.

‘검의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대륙 각지의 검들이 하나둘씩 튜토니아 기사국을 향해 집결하기 시작했다.

대륙 최강의 검, 일곱 자루의 검위(劍位)를 가리기 위한 의식을 수행하기 위해서.

그것은 검의 경지를 되찾은 데일 역시 예외가 아니었고, 휘하의 세 자루 검과 ‘레이디 섀도우’도 마찬가지였다.

동시에 천검 랭커스터 대공과 그의 비전을 계승한 샬롯 오라하르트, 망나니 필립, 성처녀 오렐리아…….

끝으로 철십자 기사들의 부수장이자 귀검 세필리아를 비롯해, 제국의 제7황자 모드레드와 제1황자 랜슬롯(Lancelot)이 참가 의사를 밝혔다.

저마다 뜻을 가진 검들이 모여들었고, 옛 튜토니아 기사국의 전통이 깃들어 있는 ‘칼날 산맥’에서 비로소 시험의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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