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 * *
그로부터 얼마 후.
비로소 조직 내의 소요를 수습하고, 청색 마탑주의 힘을 빌려서 제국 전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그레이브 워커》와 하부 조직들이 자리를 잡았을 즈음.
그림자 군주는 작센 공작 가, 그중에서 ‘검은 공자’의 활약을 상징하는 마왕령 너머의 작센 자작성에 틀어박혀 좀처럼 외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처음에는 며칠 밤낮에 걸쳐 사람들의 출입을 거부했고, 홀로 최상층의 일실에 틀어박혔다. 심지어 그 일실에는 침소조차 준비되어 있지 않은 ‘작전 회의실’이었다.
바로 그곳에서 며칠이고 나오지 않는 데일을 걱정해 시종들이 말을 걸었으나, 대답 같은 것은 들리지 않았다.
유일하게 데일을 설득할 수 있다고 일컬어지는 몇몇 이들, 가령 흑색공이나 세피아, 살검(殺劍)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저 ‘데일의 뜻을 존중하겠다’며 침묵을 지킬 따름이었다.
그렇기에, 몇 주 이상 지속되는 침묵 속에서 최소의 식사를 받으며, 데일은 수감자의 생활을 자처하듯 지속했다.
침대 하나 없는 일실에서 최소의 음식을 섭취하고 생리를 보며, 나머지 생활 전부를 수형자처럼 일실에 틀어박혀 지내는 나날들.
그 속에서 데일이 하고 있는 행위는 오직 하나였다.
전쟁 게임이었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널따란 테이블 위에,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수백의 체스 기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대륙 전체를 그리고 있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커다란 지도 위에서.
탁.
데일이 기물 하나를 움직였고, 장고(長考) 끝에 걸음을 옮겼다. 데일이 옮기는 기물과 테이블 너머에서 자신의 상대를 자처하며.
탁.
테이블 너머에 있는 체스 말 하나가 직전의 데일이 옮겨놓은 기물을 집어삼켰다. 침묵이 이어졌고, 침묵 끝에 데일이 고개를 저었다.
패배였다.
데일의 패배였고, 제국의 승리였다.
“아니.”
촤라락!
그대로 테이블 위의 지도와 기물 일체를 팽개치며 데일이 심호흡을 내뱉었다.
“게임 진짜 좆같이 하네.”
마스터 바로에게서 옮겨붙었는지, 처음부터 자신의 진짜 입버릇이었는지 알 수 없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엎어진 테이블을 뒤로하고,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아 데일이 침묵을 지켰다.
그의 손에는 이미 충분하다 못해 넘쳐날 정도의 체스 기물이 모여 있었다.
어둠과 죽음의 군주, 사막과 모래의 군주, 냉기와 수정의 군주, 거짓과 모략의 군주.
흑색 마탑주 흑색공, 다크 엘프 왕국의 여왕이자 산상노파, 세피아의 어머니자 스노우 엘프 왕국의 여왕 수정 여왕, 끝으로 청색 마탑주 아라크네.
네 명의 군주가 기꺼이 ‘그림자 군주’의 기수를 자처하며 데일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다.
거기에 더해, 대륙 칠검의 세 자루 검.
광검 헬무트 블랙베어, 살검 마스터 바로, 방랑검이 체스 기물로 활약할 수 있으리라.
그럼에도 그들 칠검의 무력 자체는 결코 마탑주나 군주의 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들 세 자루 검 전부가 덤벼도 ‘불과 피의 군주’를 상대로 이길 확률은 제로에 가까우리라.
이계의 용사였을 시절에 데일이 기억하는 칠검 중, 군주의 이명을 가진 자는 오직 하나였다. 설령 그가 왕이 아니라 튜토니아 기사국의 충신을 자처하고 있다 할지라도.
──충성과 신념의 군주, 바델 오르하르트.
그럼에도 칠검의 진짜 가치는 그들이 군주가 아니라는 데에 있었다. 데일 직속의 첩보대 《그레이브 워커》들이 그러하듯이. 군주는 엉덩이가 무겁고, 칠검은 그렇지 않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테이블 너머에 있는 적들을 떠올렸다.
황금의 대제, 거짓의 군주를 따르고 있는 기수들.
불과 피의 군주, 유리스 후작. 빛과 천상의 군주, 천상공. 그 두 명의 존재는 시작에 불과하다.
냉정하다 못해 잔혹하고 비정할 정도로 자신의 전력을 계산하고, 동시에 적의 전력을 헤아렸다.
‘지금의 나는 그 자를 쓰러뜨릴 수 있나?’
불과 빛의 제국에 군림하는 자, 황금의 대제이자 거짓의 군주.
성검을 쓰러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성검 브란덴부르크 백작의 존재는 결국 장기 말 하나에 불과하다.
당장 제국이 아니라 작센 공작 가의 북부에 있는 《엘드리치》…… 그들의 수장 불사공 프레데릭과 맞선다고 가정할 경우, 지금의 데일에게 얼마의 승산이 있을까? 애초에 옛 작센 가주의 군세와 그림자 마탑을 이대로 놔두어도 될까?
무엇보다 정작 불사공 프레데릭은 황금의 군주 앞에서 처절하다 못해 뼈저릴 정도의 패배를 경험했다.
아버지 흑색공이 불사공과 맞선 것처럼, 지금의 데일이 그 ‘패배자’와 호각을 이룰 수나 있을까?
없다.
데일이 다시금 테이블 위의 지도와 목각 기물 전부를 팽개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아직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가 아니다.’
설령 대륙 칠검의 세 자루 검이 그와 함께하고 있다 할지라도, 두 마탑의 수장이 기수를 자처한다 해도, 나아가 역사 속에 잊혀버린 두 왕국의 엘프 군주가 충성할지라도 다를 것은 없었다.
아무리 많은 군주와 세력을 손에 넣어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황금의 대제를 쓰러뜨리는 것은 군세가 아니니까.
섭리와 진실의 군주, 오롯이 데일이 인간으로서 수행해야 할 몫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당장 황금의 대제는커녕 그를 따르는 거짓의 기수, 군주들을 상대로도 승산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내가 약하니까.’
용사였을 시절의 자신이 얼마나 강했는지. 동시에 그 존재가 얼마나 많은 ‘거짓의 기수와 군주들’을 척살하며 황금의 충성스러운 개를 자처했는지.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일찍이 제국의 황자 모드레드가 조롱했듯, 그 말대로였다.
‘지금은 나 자신의 강함을 쌓아 올리는 데 집중할 때다.’
이 대륙의 강자를 모조리 죽여버린 것은 누구도 아니고 용사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 강자의 대다수가 그림자 군주 앞에 충성하는 진실의 기수들이었다는 사실을, 당시의 용사가 알 턱이 없었다.
“주군이시여, 무엇을 고뇌하고 계십니까.”
바로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일이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림자 속의 검, 레이디 섀도우가 그곳에 있었다.
“아직 전쟁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데일이 씁쓸하게 말했다. 오렐리아가 되물었다.
“그것은 어째서입니까?”
“당장 저 자신이 그들을 이끌 정도의 강함이 없는 이상, 아무리 강력한 세력과 군주들을 등에 업어도 의미가 없으니까요.”
데일이 일말의 주저도 없이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아직 저 자신의 성장에 집중할 때입니다.”
그 말에 그림자 속의 검, 레이디 섀도우가 침묵을 지켰다.
“저는 주군을 믿고 있습니다.”
침묵 끝에 오렐리아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저의 조국을 짓밟고, 제가 지키고자 하는 백성들을 도륙하며 왕을 끌어내렸을 때, 당신이 제게 보여주었지요.”
“무엇을 말입니까?”
“그대야말로 이 제국에 파멸을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적임자임을.”
“…….”
이루 말할 수 없는 씁쓸함을 뒤로하고 오렐리아가 웃었다.
“그곳에서 주군이 말씀하셨듯, 저는 생각해야 했었습니다.”
웃고 나서 오렐리아가 말했다.
“당신의 책략에 휘둘릴 여지가 있는 샤를 전하를 앞서 암살하고, 섬 각지에 제국군으로 위장한 왕국군을 풀어 약탈과 방화를 감행함으로써 제국군을 향한 지역의 적대감을 고조시켜야 했으며, 최종적으로 당신의 ‘제의’에 응하지 말아야 했었지요.”
“그 말대로입니다.”
그 말을 듣고 데일이 웃었다.
“그랬을 경우, 저는 패전의 책임을 짊어지고 기아스의 계약에 따라 심장을 잃었을 테지요. 아울러 브리타니아 왕국 역시 독립의 꿈을 이루었을 겁니다. 결국 종이 하나의 차이로 승패가 갈렸지요.”
적어도 대륙의 군주들은 엉덩이가 무겁다. 일개 섬나라의 사정 따위를 위해 자신들의 입지를 포기하지는 않으리라. 천하의 군주들조차 바다와 해협 속에 빠져 물귀신이 되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으니까.
그렇기에 아직까지도 ‘익사공’ 프란시스 바르바로사를 함부로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종이 하나의 차이가 아닙니다.”
그러나 오렐리아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주군께서는 승리하셨고, 저는 패배했습니다. 그게 다지요. 가정 같은 것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렇기에 그저, 저는 ‘검은 공자’가 보여준 잔혹한 승리와 진실을 믿고 있습니다.”
데일이 조용히 숨을 삼켰다.
“당신께서는 태양과 거짓의 제국을 파멸시키고, 어둠과 냉기로 가득 차 있는 그림자의 제국을 가져올 테지요.”
데일이 말없이 고개를 침묵을 지켰고, 바로 그때였다.
“당신이 저의 조국을 파멸시키고, 제 존재의 전부를 빼앗았듯 말입니다.”
칠흑의 오렐리아가 그녀의 금발을 쓸어넘기며 고개를 가까이했다.
“……!”
데일이 무어라 입을 열 틈도 없이 입술이 겹쳐졌다.
샬롯이나 세피아의 때와 달랐다. 철저하게 욕망을 추구하는 일그러진 집착이었다.
당혹 속에서 데일이 거리를 벌렸고, 칠흑의 오렐리아가 차갑게 미소 지었다.
“저는 그날 작센의 동토에서 잿더미가 되었고, 진실보다 진실한 거짓이 저의 사명을 수행하고 있지요.”
열락과 집착으로 가득 차 있는 목소리였다.
“저는 이미 죽어버린 자이고, 저에게는 오직 당신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
“제 전부를 빼앗은 당신의 그림자가 되는 것, 그것이 저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존재 가치니까요.”
“오렐리아 님께서는 이미 저의 일부입니다.”
데일이 덤덤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누구도 자신의 그림자를 버릴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 * *
대륙 칠검을 가리는 의식의 주기는 일정하지 않다.
아울러 의식을 주최하는 튜토니아 기사국이 멸망해버린 이상, 다시금 칠검을 가리는 자리가 열릴 것이라 기대하는 이들도 없었다.
그러나 여신의 계시를 받은 어느 대장장이가 새로운 성검을 벼려냈고, 그것은 마땅히 대륙 칠검의 이름 속에 속해야 할 것이었다.
그렇기에 두 자루 검의 공석을 메우기 위해, 나아가 새로운 칠검(七劍)의 위계를 가리기 위한 자리가 준비되었다. 제국이 그들의 손으로 무너뜨린 옛 튜토니아 기사국의 영토에서.
천검, 귀검, 광검, 살검, 방랑검. 남아 있는 다섯 자루 검에 더해 두 자루 검의 공석을 채우기 위한 의식.
멸망한 옛 튜토니아 기사국의 전통에 따라 대륙 제일의 기사들이 검을 겨루는 시험의 장.
다섯 자루의 검은 그들의 자리에 도전하는 이들에 맞서 자신을 증명할 것이며, 다섯 자루 검 중에서도 자신의 자리 이상의 검위(劍位)를 바라는 자들도 있으리라.
제국의 이름으로 칠검을 가리는 검의 의식이 준비되었고 저마다 속내를 가진 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성검을 손에 넣은 순백의 오렐리아, 나아가 데일이 거느린 세 자루 검들.
그것은 용사의 손에 쓰러진 신검의 딸, 주군을 등지고 방랑길에 올라 있는 샬롯 오르하르트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자들과 싸움을 통해 ‘다음 경지’를 바라는 데일 역시, 결코 마다할 이유가 없는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