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 * *
어둠과 겨울의 세계가 그곳에 있었다.
지평 너머까지 끝없이 뻗어 있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칠흑의 동토였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그 세계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그곳에 우뚝 솟은 하나의 성채였다.
동시에, 형용할 수 없이 거대한 촉수들이 고목의 뿌리처럼 성을 휘감으며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실외와 실내를 가리지 않고 성채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는 칠흑의 촉수들이었다.
데일과 방랑검이 있는 곳은 바로 그 성의 실내, 음울한 플랑부아양 고딕 양식의 그레이트 홀이었다.
우뚝 솟은 흑금(黑金)의 옥좌에 앉아, 희미하게 타오르는 화로를 등진 그림자 군주가 그곳에 있었다.
종말의 냉기와 태고의 어둠으로 이루어진 갑주를 휘감고, 고독의 요새에 홀로 군림하는 성주가 되어서.
“아, 참으로 고독한 제국이외다.”
“이 성 바깥에는 오로지 냉기와 어둠밖에 없다.”
그림자 군주가 그렇게 말하며 팔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레이트 홀의 벽 하나가 통째로 사라지며, 그 너머에서 끝없이 펼쳐진 동토의 냉기가 스며들었다. 옥좌에 등지고 있는 화로가 미친 듯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태풍 속에서 꺼져가는 촛불처럼 덧없이.
그러나 그림자 군주가 다시금 팔을 휘저었고, 성채의 벽이 솟아올라 냉기를 가로막았다.
슈브의 촉수를 휘감고 우주의 겨울을 몸속에 받아들였다. 그 후, 사상의 세계 속에서 그림자 군주가 보여주는 것은 신(神)에 가까운 힘이었다.
보통의 6서클 마법사로서는 감히 흉내 내지 못할 경지. 아마도 7서클 마법사조차 ‘전사로서의 소양’을 가지지 않고서는 순수하게 대적할 수 없으리라.
비로소, 이 세계 속에서는 아버지의 발끝이나마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물며 그의 앞에 있는 대륙 칠검의 일좌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으리라.
타앗!
방랑검이 땅을 박차고 군주를 향해 쇄도했고, 그러나 그림자 군주가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고독의 요새에 군림하는 성주가, 다시금 팔을 휘둘렀다.
그리고 아무도 없어야 할 고독의 성채에, 비로소 그림자 군주의 충실한 부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앙!
어느덧 데일을 따라 일렬로 늘어서 있는 죽음의 기사들이, 냉기와 어둠의 갑주를 휘감고 방랑검을 가로막았다.
사령술사로서의 힘이란 군세를 다루는 것이다. 술사 그 자체가 전투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데일의 세계에, 작센을 위해 충성하는 기사들의 육골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하나, 둘, 셋, 방랑검이 깨닫지 못하는 의식의 사각(死角)에서 끝없이 생성되는 죽음의 기사들이 쇄도했다.
그림자 군주는 흑금의 옥좌에서 몸을 일으키는 일조차 없었다.
이곳은 그의 성이고, 그 자체로 외적에 맞서는 무기이다. 군주로서 그에게 허락하는 힘을 다룰 수 있다.
이 성에 뿌리내리고 있는 옛 어둠의 어머니, 어둠의 원천에서 비롯되는 암혈의 힘을.
“오호라.”
끝없이 쇄도하는 기사들에 맞서, 방랑검이 태도를 휘둘렀다. 동시에 무엇을 깨달았다는 듯 그대로 그의 검을 세로로 내리꽂았다.
푸욱!
검이 성의 대리석 바닥에 내리꽂혔고, 동시에 성의 바닥에서 칠흑의 피가 울컥울컥 흩뿌려졌다.
쿠웅!
성 전체가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촤아악!
동시에 성 곳곳에 녹아들어 있는 촉수 다발들이, 일제히 꿈틀거리며 쇄도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칠흑의 동토 위에 세워 올린 고독의 성채, 이 자체가 하나의 살아 있는 생물이란 것을.
여전히 데일은 흑금의 옥좌에 앉아,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를 전개하고 있었다.
어느덧 그의 군세를 막기 급급한 방랑검의 그림자를 낱낱이 꿰뚫어 보며.
전지에 가까운 통찰의 힘.
성의 대리석 바닥, 석조 벽돌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살아 있는 촉수로 화하며 끝없이 방랑검을 집어삼켰다.
그럴 때마다 방랑검이 그의 태도를 휘둘렀고, 암혈의 피가 흩뿌려져 성의 실내를 더럽히고 있었다.
“네 진짜 모습을 드러내라, 방랑하는 검이여.”
바로 그때, 옥좌 위에 앉은 그림자 군주가 말했다.
“……!”
그 말에 일순, 방랑검은 그조차 알 수 없는 위압감에 압도되어 숨을 삼켰다.
일순 그를 향해 쇄도하는 촉수와 죽음의 기사들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얼어붙을 것 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대가 충성을 바칠 군주를 찾고 있듯, 나 역시 충성을 바칠 검(劍)을 찾고 있다.”
“살검과 광검, 두 자루로는 부족한 것이오?”
“일곱 자루가 될 때까지 검을 찾는 일은 멈추지 않겠지.”
그림자 군주가 대답했다.
푸욱!
동시에 죽음의 기사 하나가 방랑검을 향해 그의 검을 내리꽂는 데 성공했다. 종말의 냉기가 깃들어 있는 검에, 그의 육체가 입자 레벨에서 해체되고 사라져야 했다.
그대로 그의 육체가 소멸했다. 그럼에도 데일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머지않아 냉기의 무리가 휘몰아치며 사람의 실루엣을 이루었다.
“제2제국의 생존자.”
그의 그림자를 꿰뚫어 보며, 그림자 군주가 말했다.
“동족들과 함께 섭리의 끝을 추구했고, 그 어리석음을 조롱하며 ‘겨울’이 저주를 내렸지.”
그의 존재를 구성하는 것은 육체가 아니었다.
아득한 과거에 죽었어야 할 망령이자 유령, 다시 말해서 유체(幽體)였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자. 천검과 신검조차 그의 검을 꺾을 수 있어도, 존재 자체를 벨 수는 없었으리라.
그렇기에 흑금의 옥좌에 앉아 있는 그림자 군주가 몸을 일으켰다.
화르륵!
등 뒤에 있는 화로가 터질 것처럼 타오르기 시작했고, 폭발할 것처럼 흩뿌려지는 광염으로 거듭났다.
동시에 암혈의 갑주를 따라, 흑색 암석 사이사이의 마그마처럼 이글거리는 핏빛 무늬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아직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그림자 군주로서의 전력.
섭리의 끝에 달해 있는 흑적청(黑赤靑)의 마력이 융합되었고, 지금까지의 그 무엇과도 비할 바 없는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데일 자신의 의식조차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압도적 힘이었다.
너무나 압도적이다 못해, 그야말로 신의 영역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힘.
폭발하는 마력을 통제하는 행위조차 벅차다. 이 힘을 휘두르는 것은, 도수 높은 술을 병째 스트레이트로 털어 넣는 것과 같으리라.
그리고 그것은 능히 감수할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휘몰아치는 삼색의 마력을 품고 그림자 군주가 땅을 박찼다. 칼날이 솟았다. 그의 허리춤에 있는 마검 기아도 아니었고, 마그마처럼 이글거리는 암혈의 갑주도 아니었다.
대리석 바닥, 석조 벽돌, 레드 카펫, 풀 플레이트 아머 차림의 갑주상…….
성의 실내 전체에서 수백, 수천 개의 그림자 칼날들이 솟아 방랑검을 향해 내리꽂혔다.
말 그대로 천검(千劍)의 폭격이었다.
카앙!
“아, 아아……! 그렇소, 바로 이것이오.”
검의 폭격 앞에서, 방랑검의 몸을 따라 무색의 오러가 휘감기기 시작했다. 무색, 동시에 무형이 아니라 확실한 형태를 가진 오러였다.
“내가, 내가 진정으로 섬겨야 할 존재…… 얼마나 오래도록 찾았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옵나이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소름 속에서, 방랑검이 소리쳤다. 아울러 그의 육체를 휘감고 오러가 폭발하며 비로소 그의 사상을 드러냈다.
대륙 칠검, 방랑검의 아바타. 제2제국의 생존자.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엘프 망자였다.
뒤틀린 섭리 속에서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망령.
동시에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그림자의 천검을 향해, 방랑검의 태도가 휘몰아쳤다. 천 개의 칼날 모두를 쳐내고도 남을 정도의 신속이 깃들어 있는 검무(劍舞)였다.
천 개의 그림자 칼날을 내리꽂고 나서도, 그림자 군주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손에 쥐고 있는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었다.
이 성 전체가 그의 검이자 무기 그 자체였으니까.
끝없이 휘몰아치는 그림자의 폭풍, 그것은 칼날일 때도 있었고 그의 피조물일 때도 있었다. 레드 카펫 틈새의 그림자에서 《섀도우 러커》들이 가시 촉수를 내뿜었고, 샹들리에의 그림자 밑에서 흑색의 총신(銃身)들이 포화를 내리꽂았다.
죽음, 죽음, 또다시 죽음이 이어졌다. 그 앞에서는 천하의 방랑검이라 할지라도 도리가 없었으리라.
“나는, 아니, 저는…… 진정으로 저에게 죽음을 줄 수 있는 존재를 찾아 방랑하고 있었사옵니다!”
죽고, 죽고, 또 죽었다. 그때마다 그의 가슴을 가득 메우는 것은 희열이었다.
“이 몸을 잠식한 거짓으로부터 저를 진실로 자유롭게 해주실 섭리와 진실의 군주시여!”
“너의 방랑은 끝날 것이다.”
끝없는 도살 끝에, 비로소 성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 속에서 어느덧 그림자 군주는 흑금의 옥좌 위에 앉아 있었다.
“이 제국이 멸망하는 그날에.”
“기꺼이……!”
방랑검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가 겪어야 했을 기약 없는 방랑의 세월에 비해, 그의 주군 앞에서 충성하는 것은 찰나와도 같으리라.
“기꺼이, 이 제국의 몰락을 위해 제 전부를 바치겠나이다!”
또 하나의 검이 충성을 맹세했고, 그의 충성을 얻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었다.
* * *
“어이쿠, 시펄. 이 아저씨는 또 뭘 잘못 처먹었길래 대가리를 처박고 있소?”
데일이 비로소 사상의 세계를 해제했을 때, 그곳에 있는 풍경을 보고 마스터 바로가 물었다.
“그럴 일이 있었지.”
데일이 어깨를 으쓱이며 흘끗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는 지금부터 보스에게 충성하는 똘마니들입니다!”
여전히 대가리를 박고 있는 의회 직속 집행부대 ‘암월’이 있었고, 일곱 머리…… 이제는 여섯 머리가 되어버린 자유 도시동맹의 지배자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는 지금부터 보스에게 충성하는 똘마니들입니다!”
거기에 더해져 방랑검 역시 힘차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음, 똘마니들이 많아서 좋네.”
“허미, 쉬펄. 아주 그냥 어둠의 마왕이 따로 없으시네.”
그림자 군주가 남의 일처럼 대답했다. 마스터 바로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자유도시 동맹에서의 일을 마무리 짓고, 데일이 비로소 그의 공작령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얼마 후, 대륙 전체를 발칵 뒤집어놓을 소식이 울려 퍼졌다.
시스티나 교황청의 이름으로, 나아가 교회와 백색 마탑의 정점에 서 있는 ‘천상공’과 휘하의 추기경들이 입을 모아 두 가지의 사실을 공표했다.
하나, 자매신의 계시를 받은 어느 독실한 대장장이가 또 한 자루의 ‘성검 뒤랑달’을 벼리는 데 성공했으며…… 성검이 직접 자신의 검주(劍主)를 택했다는 것.
둘, 성검의 검주는 일찍이 ‘검은 공자’에게 패배하고, 작센의 동토에서 잿더미가 되어버린 성처녀 오렐리아란 것.
그러나 불에 타버린 잿더미가 성검을 쥘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천상공은 자매신의 능력을 통해 ‘성처녀’가 부활했다는 기적을 공식 발표했다.
그녀의 존재가 악마의 피조물이란 사실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백색 마탑의 보증 아래 성처녀는 죽음에서 부활하고 성검의 검주로 거듭났다.
백색 마탑과 성검을 등에 업고, 순백의 성처녀는 제국조차 어찌할 수 없는 명분을 쥐게 되었다.
여전히 그녀의 몸을 묶고 있는 청색의 거미줄을 뒤로하고.